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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영성의 만남 1

hope888 2022. 3. 21. 12:08

 

1.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개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우선 이어령 선생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이어령: 다 아시다시피, 가장 쉬운 것처럼 생각되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저는 문학을 50년 이상 한 사람이지만 문학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제일 무섭거든요. 누구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삶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참 답변하기 힘들어요.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형이 담배를 피우니까 동생이 물었어요. “무슨 맛으로 피슈?” “그 맛에 핀다. “그 맛이 뭐요?” “그 맛에 핀다니까.” 얼마 뒤 아우가 형처럼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때 형이 물었지요. “넌 무슨 맛에 담배를 피우냐?” 그러자 아우는 , 저도 그 맛에 피워요하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맛이 말로는 설명이 안 돼요. 이런 경우 그 맛'이라고밖에 말을 못 하죠. 그렇듯 삶은 겪어 봐야 합니다. 체험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계시니 저는 되도록 신앙 얘기는 안 하려고 합니다.

제가 신앙이 없던 옛날 입장에서 말해야 주제가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사실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게 아니죠. 성경을 안다. '내가 기독교를 안다', 이건 겁나지 않아요. 그런데 내가 그 속에 뛰어들면, '기독교라는 게 뭐냐?' ‘크리스천이라는 게 뭐냐?'에 대해 말은 못 하더라도 기도하거나 행동해 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이 뭐냐는 질문에 던져 봐라, 번지점프하지 말고 진짜 빠져 봐라' 하는 식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재철 목사님, 성경적 관점에서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재철: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파악하려 할 때, 그 대상만 들여다보면 오히려 실체를 놓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과 상반되는 것을 같이 놓고 보면 본질을 훨씬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빛만 들여다보면 빛이 뭔지 알 수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실 때 세상은 흑암이었습니다. 흑암이라는 배경을 놓고 빛을 보면 빛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 , 우주를 만드셨는데, 우주는 코스모스cosmos, 질서라는 뜻이죠. 이 질서만 들여다보면 질서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코스모스를 만들기 전의 상태는 카오스chaos, 혼돈이었죠. 이 혼돈을 배경 삼으면 코스모스의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삶이 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대비되는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삶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지 않습니까? 태어날 때는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 손자 순으로 태어나는데, 죽을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치른 가장 어린 아이는 태어난 지 3일 된 아기였습니다. 3일 된 아기도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수 있습니다. 또 죽음은 장소가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혼여행을 가다가 사고로 죽은 부부도 저는 보았습니다. 죽음은 정해진 시간도 없습니다. ‘자를 파자破字하면 한중에 비수처럼 날아온다는 뜻입니다. 낮에 비수가 날아오면 피할 수 있는데, 밤이니 피할 수가 없지요.

죽음은 성경의 이사야 선지자 말씀처럼 우리 코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내뿜은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은 것이죠. 죽음을 알면, 우리가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고 하는 것은 실은 하루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 살았다고 하면 50년 죽은 것이고, 우리 나이만큼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는 것이 아니라 죽고 있는 것임을 알면, 삶이 뭔지, 생명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모르면, 매일 사는 것 같은데 실은 매일 무의미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호흡이 끝날 때가 되면 자기 삶에 후회만 남게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에노스 때 인간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는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 때, 비로소 생명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알고 삶을 알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인생 사용설명서가 됩니다. 그 사용설명서대로 인생이라는 제품, 삶이라는 제품을 쓰면 그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알기 위해 서는 반드시 에노스의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죽음 앞에서는 여호와라는 생명을 찾지 않을 수 없고, 인생 사용설명서를 통해 참된 삶의 실체를 알아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사는 게 참된 삶입니까?

 

이어령: 모른다는데 자꾸 물어보시네요. (웃음)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죽음의 반대가 삶이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모르면 어떻게 반대를 설명하나요?

왼쪽 오른쪽의 도그마'라고 하는 건데, 오른손이 뭐냐 왼손의 반대, 왼손은 뭐냐 오른손의 반대, 이렇게 설명하면 한계가 있지요.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경에는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나오는데, 창세기를 읽어 보면 영성의 세계가 더욱 확연히 느껴집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나는 세계, 그 창조주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빛 아니면 어둠에 있지요. 기껏 해봐야 황혼으로밖에 못 들어갑니다.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닌 상태인 거죠.

그래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립니다.

예술가, 문학가는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질문을 주고, 있는 것을 표현할 뿐입니다.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것밖에 못 해요. 슬픔이 뭔지, 아프다는 게 뭔지 의사나 심리학자는 알아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성경에서도 해답이 드러나 있는 것은 문학가들에게 그닥 매력이 없죠.

TS. 엘리엇이 자신의 시에서 떠납시다. 그대와 나' 하고 썼습니다. 이 시에서 그 시간은 저녁노을이 번져 갈 때입니다. 저녁노을이 번져 가는 시간에 '갑시다' 하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녁이라는 게 뭐예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죠. 그 저녁을 뭐라 비유했냐면, '환자'라고 했어요. 수술대에 누워 있는 마취된 환자로 황혼을 비유했지요. 이 사람이 죽었나요?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 있잖아요. 그런 저녁에, 황혼에 반쯤 폐허가 된 길거리로 그대와 내가 함께 갑시다. 바로 이게 삶이죠.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고, 대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어렴풋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빛을 구하고 어둠을 구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참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헬레니즘을 알아야 헤브라이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이네heinrich Heine는 절대 신인 기독교의 하나님을 버리고 희랍 신을 그렇게도 좋아했습니다. 그는 희랍의 여러 신을 그토록 믿었는데도 죽기 직전 루브르 박물관의 비너스가 자신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는 거예요. “너는 나에게 매달리는데 나는 너를 구할 힘이 없어. 나는 팔이 없지 않냐? 너를 안아 주고 싶은데 팔이 없어. 너희들과 너무나 차원이 같아 같이 울어 주고 같이 슬퍼해 줘도 너희들을 끌어안아 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때 하이네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이 못하는 것, 잡신들이 못하는 것, 두 팔을 뻗어 우리를 끌어안는 것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재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삶과 죽음을 대비해서 '그 위에서 보아야 하는데, 하이네의 지성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방황하며 괴로워한 것입니다. 이 지성의 몫을 뛰어넘어서 삶과 죽음을 대비하여 어떤 게 빛이고, 어떤 게 어둠인가, 어떤 게 악마이고 어떤 게 신인가를 알 정도가 되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지요. 생사를 넘어서야 생사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영성의 입장에서 '바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재철: 바로 산다는 것의 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임을 삶의 대전제로 삼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과 의도에 맞춰 사는 것이 바른 삶이죠.

바른 삶을 판단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죽음을 알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인생 사용설명서죠. 사람들은 고가 제품을 구입할수록 철저하게 제품 사용설명서를 숙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제품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그 의미를 절대화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떤 제품보다 귀한 '인생'이라는 제품을 하나님의 인생 사용설명서대로 사용하지 않는데, 그러면 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란 있을 수 없죠. 바르게 사는 길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2. 삶의 근간, 가족 공동체

 

삶에서 우리가 최초로 만나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집 가자를 보면, 지붕을 나타내는 '갓머리 아래 사람이 아니라 왜 돼지가 있는 겁니까?

 

이어령: 저도 궁금하게 여기는 것인데, 이게 참 재밌어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옛날 사람들은 동굴 같은 곳에 살았는데 돼지는 밖으로 나가면 안 되니까 우리 안에 뒀다는 겁니다. 처음에 지붕도 하고 집을 만든 이유가 돼지를 위해서이고, 그러다가 사람도 집으로 들어갔다는 거죠. 엉터리 얘기일 수 있지만, 가정을 먹는 개념, 경제적인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가족을 '식구食口'라고도 하지요. 가족을 정의할 때 경제적 측면에서는, 같이 빵을 먹는 입을 가족이라고 본 것입니다. 경제적 기반이 가족을 만든 것이지요.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먹는 것, 즉 세 끼를 해결해 주는 것인데, 이 식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돼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돼지가 번식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복한 사람은 애를 많이 낳는다고도 하죠. 돼지만큼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이 없으니까 돼지는 곧 생식의 의미를 지닙니다.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는 말처럼, 가정이란 결혼해서 낳고 불리고 생식하는 곳입니다. 자식 낳고 손자 낳고 많이 낳아서 다복하게 사는 것, 이것은 경제학적이 아니라 생물학적 의미입니다.

마지막 가설은 이렇습니다. 사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우리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를 잡지 않습니까? 유목민들은 돼지를 싫어해요. 그들은 양을 바을 바치죠. 농경사회에서는 반드시 돼지를 제물로 바칩니다. 즉 가정은 돼지를 바치는 집, 교회당 같은 장소, 종교의 공간이지요. 가정이란 단지 먹고 자고 애 낳는 곳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돼지를 바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교회당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정은 종교적 · 이념적으로 신성한 곳입니다. 가정은 경제적 공동체이자 생물학적 장소이지만, 빵과 생식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정에 속하는지, 어떤 돼지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지요.

 

이재철: '인간'이라는 단어에서 '사람 인' 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 있는 모습을 하고 있죠. ''자도 인간들 사이, 곧 관계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사람을 '안드로포스' 라고 하는데, 남자를 가리키는 '아네르와 눈을 가리키는 '옵스'가 합해진 말입니다. 남자가 있고 그를 보는 눈이 있다. 결국 두 사람이죠. 이 세상은 한 사람으로 살 수 없고, 두 사람 이상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을 글자가 보여 줍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삶에서 '' 자 밑에 ’ ‘'이 있는데, ''''''으로 해석하신 거지요. 그래서 삶이라는 우리말도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지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산다면 삶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문제로 대두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책을 '창세기'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야기는 창세기 총 50장 가운데 2장에서 끝납니다. 3장부터는 가정을 세워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세우셨다가 그들의 타락으로 노아의 가정을 세우시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이 타락한 이후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에, 창세기가 아니라 '가정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가 성경 첫머리에 나오는 것은 가족 공동체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이죠.

국가가 건강하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 단위인 가족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고, 병든 사회는 결국 가족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의 문제는, 실은 어그러진 가족 관계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 이 두 기둥으로 그 믿음의 축이 이뤄지는데, 사람 사랑의 출발점이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니까 성경이 가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 헌신을 통해 사랑을 몸에 익히는 장소, 타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익히는 곳,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배양하는 곳도,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윤리 도덕을 익히는 곳도 그 출발점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3. 성공하는 삶이란

 

기본적인 단위이자 출발점이 되는 가정이 늘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 기본적인 출발점이 흐려지죠. “저 사람은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회만 다닌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성공이 가정의 성공이 되는 이 문제를 목사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재철: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 성공이 어떤 길 위에서의 성공이냐가 먼저 밝혀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낚시로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 어부에게는 밤을 새워 월척을 낚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 하는 사람이 책상 앞에서 밤새 책을 읽는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말하는 성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땅 한 평도 가지신 적이 없고 단돈 1원도 없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는데, 지금 관점으로 보면 다 실패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을 실패했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 구별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 이것을 분명하게 재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여러 대답이 나오자, “너희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주님께서는 반석과도 같은 베드로의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교회는 건물도 제도도 아닌, 나사렛 예수를 주님 으로, 그리스도로,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데, 그러면 이 현실 세계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가에 대한 규명이 한 번 더 필요해집니다.

주님께서 그 고백을 받으신 장소가 벳새다 들판이나 심산계곡이 아니라, 빌립보 가이사라였습니다. 분봉왕 헤롯 빌립이 신도시를 건설하고 로마황제의 칭호인 가이사라와 자기 이름을 붙여 그곳을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는 아무 도시나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를 붙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상당 규모 이상의 도시여야 하고, 그 도시 한복판 혹은 가장 중요한 지점에 황제의 신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인간에게 경배받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바로 그 황제의 신전 앞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당신이 신이라는 것이죠. 삼권을 장악한 로마 황제가 그 힘으로 구원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사렛 예수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했다는 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나 욕망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버림, 자기 헌신, 자기 비움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길을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길이냐, 예수의 길이냐, 이 갈림길에서 황제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좇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를 버리고 영원을 얻는 길입니다. 로마 황제의 모든 흔적은 지금 폐허로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주로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고라조''건져 올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시간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데, 그 시간을 자기 욕망으로 물거품처럼 날리는 사람도 있고 영원으로 건져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성공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황제의 길에서 부와 명예를 갖지 못하더라도 영원을 건져 올린다면 성공한 사람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실패자처럼 보이는 베드로와 바울은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것은 다 갖췄는데 영원을 갖지 못했다면, 적어도 영원의 길에서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영원은 멀고 현실은 가깝고, 사는 건 다급하고, 그래서 계단을 내려가 영성보다 지성 쪽에 들러붙고 싶은 심정인데요. 지성 쪽에서는 이렇게 부담되는 말씀은 안 주시겠죠?

 

이어령: 표현이 다르지 똑같은 말을 하신 거예요. 기독교와 관계없이 생각해 보서요. 가정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어떤 인류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배가 고파 사냥을 해서 토끼를 잡았어요. 가족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토끼를 잡아먹을 거예요. 그런데 배고픔을 참고 자신의 먹잇감을 짊어지고 갑니다. 어디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이게 가족이죠. 먹는 것이 전부고 경제 문제, 출세 문제, 물질 문제만이 중요하다면 짐승들처럼 그 자리에서 잡은 먹이를 먹을 텐데, 왜 불타는 식욕을 잠재우고 그 무거운 것을 끌고서 자식과 아내 있는 곳으로 가는가. 이게 바로 사랑이고, 가족의 출발입니다. 지금 식욕과 사랑, 어느 쪽이 이겼어요? 가족은 희생과 사랑이 아니고는 절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가족의 원리가 시장 논리, 피의 교환 논리, 돈의 교환 원리와 같다면, 가족은 그날로 없어집니다. 가령 결혼할 때는 아내가 날씬했는데, 살다 보니까 살이 쪘어요. 제품을 샀는데 며칠 후 형태가 바뀌면 리콜 안 합니까? “살다 보니 영 아니네요. 장모님, 다시 가져가세요" 하고 싶은 겁니다. 자녀가 대학 시험을 쳤어요. 대학입시 철만 되면 고아들이 수두룩하게 될 거예요.

"다른 애들은 적게 투자했는데도 시험을 잘 봤는데 너는 더 많이 투자했는데도 떨어지니, 너 아니고 다른 애 데려다 아들 삼을란다" 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자식이 못났어도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바꿀 순 없죠. 못났어도 자기 자식이니까.

아담 스미스도 말하기를, 모든 것을 시장 원리에 맡겨 두면 잘 돌아가지만 한 가지만큼은, 곧 가족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욕망들이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통해 시장을 번성하게 하지만 시장 원리와 다른 게 하나 있으니, 그게 가족의 원리라는 겁니다. 만약 어느 가정이 시장 원리로 움직이면, 그 가정에서 돈 못 버는 아버지는 쓸모없으니까 이혼당하고 내쫓기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주식회사일 뿐이죠.

이런 식으로 보면 기독교의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속을 얼마나 썩였겠어요. 동생 속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사랑과 전혀 다른 얘기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유교에 젖어 있는 한국인, 조상을 섬기고 효를 다하고 가족 공동체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래서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과 예수님이 이해되지 않고 갈등하는 거예요..

바깥에 형제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가 듣기에 언짢은 소리 하시잖아요. “누가 내 형제냐, 여기 있는 사람이 나의 형제니라.” 찾아온 가족을 왜 가족이 아니라고 할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도 그러시잖아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자기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제자 중 한 명을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하신 겁니다.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신주 모시듯 하죠. 세상에 불효막심하게도, 어머니가 울면서 찾아왔는데 여자여, 저 사람이 당신 아들이니이다'라고 하느냐는 거죠. 하지만 뒷구절을 보세요. 그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저기 네 어머니가 있다.” 이것으로 비추어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은 '나만 당신의 아들로 생각하면 슬프겠지요. 하지만 여기 다른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곧 자식을 잃은 슬픔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모두 내 아들로 보고 가족보다 더 큰 사랑을 이웃까지 가져가면, 자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제자도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마리아를 모셔다가 어머니로 섬기지 않습니까.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예전에 믿던 가족관이 기독교를 믿으면서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가족관이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더 정확하게 해석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시원찮고 어머니가 시원찮은 것이면, ‘여기 어머니가 있다'고 했겠습니까? 그 존재와 가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세속에서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고 어머니인데, 그렇게 귀중한 가치를 아는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모르니, 어머니의 사랑과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보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이 가정의 성공과 연결됩니다. 사랑이 없고 먹는 것만 있으면 돼지우리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지요. 먹는 건 기본이고 그 위에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령·이재철 대담 / 지성과 영성의 만남/ 홍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