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영성의 만남 3
1. 무엇을, 왜 배우려는가
먼저 이어령 선생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뭐냐, 이렇게 질문드리면 정말 막연하기 짝이 없지만, 교육계에 오래 계신 경험에 비추어 이 교육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어령: 제가 교회에 와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만, 성경에 참 명쾌한 대답이 있어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이것이 교육의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달라고 하는 게 먼저고, 주는 게 나중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이가 달라고 하지 않는데도 줍니다. 그러니까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뱀을 주고,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는 교육이 돼버렸어요.
아이가 정말 갖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어른들은 아이가 싫어하는데도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고 있지요. 교육이라고 할 때 가르칠 교敎 자는 가르친다는 뜻이 아닙니까? 가르침의 반대는 뭐예요? 배움이죠. 그러면 교육이 가르치는 거냐, 배우는 거냐? 교육을 가르치는 쪽에 두니까 문제가 생긴다. 이거죠. 배우는 쪽에 두고 교육이란 ‘배우려 하는 욕망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풀립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겁니다' 하고 얘기하기 때문에, '교육' 하면 학원이 먼저 떠오르고 학교가 떠오르고 여러 가지 제도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배우고 싶은 본능,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밝아지기 위해 뭔가 배우려고 하는 습, 학습이 중요하지, 교육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게 교육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학습에 대한 것이라면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 빗대어 교육의 본질을 설명해 주셨는데, 목사님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부모가 자녀 교육에 임해야 하는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이재철: 우리나라에서 교육과 밀접한 이야기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입니다. 지금 학부모가 되신 분들은 대부분 어릴 적 학교에서 맹모삼천지교에 대해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 내용은 잘 아시다시피 이런 거죠. 맹자 어머니가 맹자를 낳고 공동묘지 옆으로 이사를 갔는데, 맹자가 장의사 흉내를 내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시장 옆으로 이사 가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이번에는 장사하는 사람들 흉내를 내어 맹모가 '아, 이것도 안 되겠다' 해서 서당 옆으로 이사 갔더니 아이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맹자 어머니는 이사를 잘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모賢母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맹모의 교육 지침을 따른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녀가 무엇을 받기를 원하는지와 상관없이 부모가 주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줘야 되는 것이지요. 내 자식에게 좋은 것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여러 가지 과열 현상이 벌어지고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 맹자의 어머니가 과연 지혜로운 어머니일 수 있는가? 지혜로운 어머니라면 처음부터 공동묘지 옆으로 이사 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갔다가 '아, 이거 잘못했구나' 그래서 두 번째로 시장 옆으로 간 거죠. 그런데 지혜로운 어머니라면 시장 옆으로도 안 가야죠.
또 갔다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학교 옆으로 갔으니 그 어머니는 지혜로운 어머니가 아니라 사실은 생각 없이 그저 임기응변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에 지나지 않죠.
맹모삼천지교에 대해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는데요. 맹자 어머니가 일부러 자기 아이를 공동묘지 옆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몇 년을 살면서 아이에게 죽음을 가르쳐 줬다는 것이지요. 죽음을 모르고는 이 세상에서 뭘 배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맹모가 아이를 데리고 일부러 시장 옆으로 간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 현장을 모르고는 배우는 것이 다 추상적인 논리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알게 해주고, 생존 현장을 알게 해주고, 그다음에 학교에 가서 자기가 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배워야 될 것인지를 알게 하고 공부하게 해줬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그 어머니가 지혜로운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맹모삼천지교 이야기를 기존 해석의 논리로 따진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뭘 줄까만 중요해지는데, 본질적으로 생각한다면 왜 교육받아야 하는가, 이 '왜'가 중요해지거든요. 그래서 무릇 그리스도인 학부모라면 자식에게 왜 공부를 시켜야 하는가, 자식으로 하여금 왜 배우게 해야 하는가, 이처럼 '왜'를 먼저 생각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공부해야 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지요. 하나님께서는 부모, 자식, 선생, 학생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죄성罪性을 지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다움을 상실했거든요. 따라서 내 자식을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적어도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이 목적에서 분명한 신앙적 마음가짐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분명하게 매듭지어진다면 지금과 같은 교육제도 속에서도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얼마든지 용기 있게 자식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육을 잘 받아 바른 됨됨이를 지녀도 세상에 나아가서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죠. 전문적인 능력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대인 관계, 요즘은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따져서, 사람은 참 괜찮은데 우리 회사에서 쓰기는 ‘좀 그래' 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어령: 맹모삼천지교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학교에 보낸 뒤, 그 후편이에요. 맹자가 공부를 안 하고 집으로 도망 온 거예요. 그걸 본 어머니가 베틀에서 베를 짜다 말고 칼로 짝 잘라 버리면서 “내가 지금까지 죽어라 고생하며 베를 짰는데 잘라 버리니 이 얼마나 아깝니? 봐라, 네가 지금까지 배운 걸 중단하는 것은 바로 이 베틀의 실을 끊는 것과 다름없지 않느냐. 그러니 어서 가서 공부하거라"고 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걸 봐야 합니다. 어머니는 학교만
믿은 거죠. 아이가 왜 학교에서 배우다 말고 도망 왔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어머니라면 당연히 얘가 뭐 때문에 도망 왔을까. 달라는 것을 주지 않은 게 아닐까 이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옛날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기존의 틀 속에서 기존의 교육을 받으면 다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석봉의 어머니를 보세요. 깜깜한 밤중에 불 꺼놓고 자신은 떡을 썰고, 배우다가 도망 온 아이에게 글씨를 쓰라고 하죠. 불 꺼놓고 떡 썰듯이 반듯하게 글씨 쓰면 뭐할 거예요!
그건 반복 노동일 뿐이죠. 요즘 반복 노동은 소위 3D(Difficult, Dangerous, Dirty) 업종에 속하지 않습니까. 창의성을 가르쳐야죠. 창의적인 걸 가르쳐 줬으면, 아이가 왜 도망 왔겠어요. 어머니야 밤낮 노동으로 떡을 썰었으니까 불 꺼놓고도 똑같이 하지만, 어머니가 떡 썰듯 그렇게 똑바로 글씨 써가지고 뭐 할 거예요? 그거 인쇄하면 다 될 것을. (좌중 웃음)
여기에 근대 교육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전에는 똑같은 생각, 똑같은 질서, 똑같은 코스로 갔으니, 그저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고 원하지 않아도 열심히만 하면 대가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오자등과五子登科라 했습니다. 아들 다섯 명 낳고 그 다섯을 몽땅 과거에 합격시키는 것이 당시 어머니들의 꿈이었지요. 이건 공부가 아니라 취직 시험 준비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열심히 학원에 보내며 그것을 자식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옛날 과거 시험 준비시키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요.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퇴계 선생이 조카들을 데려다 놓고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도록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인성 교육을 시킨 겁니다. 이미 그때도 학원이라는 게 있고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과외 선생님이 있었어요, 유명한 학자였던 퇴계는 사람이 되기 위한 인성 교육을 기가 막히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애들이 배우다가 다 도망가서 동네의 다른 선생님에게 배워요. 퇴계 선생에게 배우다가는 과거 급제는커녕 아무 것도 못 하겠다 싶어 과거 급제용 선생한테 간 것입니다. 인성 교육이 아니라 과거 급제 맞춤형 과외를 한 거예요. 퇴계 선생도 과거 보려는 사람에게는 '형편없는 선생'이었던 거지요.
학교 선생님과 과외 선생님의 차이는, 학교 선생님은 어쨌든 공교육을 하지만 학원에서는 입시를 위해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까 물었던 '왜 배웁니까?' 하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죠. 지금의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자기 특성에 맞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학교에 들어가도록 가르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요즘 ‘공부의 신’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특정 학교에 들어가려는 아이들만 모아 놓았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자기 인생을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에 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친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제 손녀딸에게 그 어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버지, 얘는 바보예요.” “왜?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반장도 하는데.” “다른 애들은 내신 성적 때문에 다들 노트를 안 빌려 주는데, 얘는 전부 빌려 줘서 손해 볼 짓을 한다니까요.” 누가 더 나은 거죠? 친구들에게 '너도 공부 잘해라' 하면서 공책을 내주는 아이가 바람직해요, 아니면 보여 주지 않고 자기만 내신 성적 올리려는 아이가 더 나은 거예요?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자기 노트를 빌려 주지 않아야 사회에서 성공한다고 여기는 이 교육 풍토는 분명 문제가 있지요.
'그깟 대학 안 들어가면 어떤가, 창조교육 시켜라', '대학 안 들어가도 너만 좋으면 돼' 이런 이상적인 이야기는 남들에게만 하는 얘기지, 자기 손자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들 합니다. 신문 칼럼을 보면 창조교육이 어떻고, 인성 교육이 어떻고 이야기하지만, 당장 아이가 대학을 못 가고 좋은 대학을 못 나오면 앞날이 깜깜한데 무슨 창조교육, 인성 교육을 따지느냐는 거죠. 이래서 똑똑한 부모들이 다 알면서도 한 사람이 뛰면 미친 듯이 다 뛰는 거예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뛰지 않으면 처지니까 다 몰려가는 거예요.
이건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예요. 이걸 어떡하면 좋겠는지, 이 시간에 여러분과 대화하면서 한번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2.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툭 터놓고 얘기해서, “서울대 가야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들 말하는 게 사실 아닙니까? 이 같은 현실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나오시고 이재철 목사님과 저는 그렇지 않은데요. (웃음) 이재철 목사님께 여쭙겠습니다.
시험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핀란드 같은 나라는 16세까지는 경쟁을 시키지 않고 시험도 안봅니다. 그럼에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에서 최근 몇 년간 1위를 하고 있는데요. 엄청난 돈을 들여야 하는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과 학벌 및 제도적인 문제까지 합쳐 해답을 기대해 봅니다.
이재철: 먼저 서울대를 졸업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울대가 어느 대학보다 좋은 학교로 꼽히고 서울대를 나오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어떤 경우보다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담에서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공을 성공이라고 한다면 어떤 길에서의 성공이냐,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평생 그 종착역이 허망한 공동묘지인 황제의 길에서 헤맬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공이라고 말할 때 황제의 길에서 성공인가, 예수의 길에서 성공인가, 저는 이 부분이 항상 명확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은 참 높은데,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한국에서 재벌 그룹은 차지하고 대기업들 중에서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창업한 기업이 몇 개나 되는가. 극소수지요. 즉 개척 정신, 도전 정신, 모험 정신 같은 면에서는 서울대 출신의 성공 확률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요.
또 1948년 우리나라가 정부 수립을 한 뒤, 과도기 때의 윤보선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을 제외하면, 현재 이명박 대통령까지 여덟 분이 실제로 권력을 행사한 대통령인데, 그 여덟 분 가운데 서울대학교 출신은 한국전쟁 와중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신 김영삼 대통령 한 분밖에 없거든요. 서울대학교를 나온다 할지라도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리더십이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는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 크리스천에게 참된 교육의 목적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함으로써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면, 서울대를 나온다고 해서 정말 그 삶이 행복한가, 그것도 아닐 거란 말이죠. 따라서 그리스도인마저 ‘서울대를 나오면 성공 확률이 높다'는 식의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핀란드 교육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핀란드 교육이 세계적인 수준인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스위스에 있을 때 핀란드에 열흘 정도 가서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만, 핀란드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으로 볼 때 중3 졸업 때까지 시험이 없습니다. 성적표도 없고요. 사교육도 없고 사립학교도 없으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배우니 '교육 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도 없고 성적표도 없다고 해서 가만히 방관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예체능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 윤리, 심지어는 철학, 문학, 자연, 환경까지 가르칩니다. 그리고 시험은 치르지 않지만 선생님이 아이들을 한명 한명 면밀하게 분석하고 관찰합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무엇을 잘하고 어떤 적성이 있고 어떤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평가서를 씁니다.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 정보가 그대로 초등학교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초등학교 선생님은 유치원에서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명 한명을 다시 확인하고 재평가하죠.
중3 과정이 끝나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핀란드에서 고등학교 진학률은 55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상업학교에 가거나 적성에 맞는 일자리로 선생님들이 배치해 줍니다. 그 나라의 교육 목적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게 살기 위해 필요한 지성과 인성을 배양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 반드시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과정이 3년으로 고정돼 있지만 핀란드는 2~4년으로 개인마다 다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마다 다르게 '너는 4년 공부해라', '3년 해라', '너는 2년 만에 대학 가라' 하고 정해 줍니다. 작년 핀란드의 대학 진학률이 57퍼센트입니다. 즉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갈 때 55퍼센트만 가고, 그 55퍼센트 중 57퍼센트가 대학에 가니, 7년 전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 중 작년에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의 비율은 3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학 입학률이 약 70퍼센트인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르죠.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정부가 생활비를 지급합니다. 등록금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독일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가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활비를 송금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핀란드는 한때 전 국민이 그리스도인이었던 대표적인 개신교 국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우리 자식들에게 사람됨을 가르치는 참된 교육, 곧 자식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하자고 의기투합했고, 거기에는 영성 교육까지 포함돼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는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영성 교육을 위한 환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가 들든지 함께 부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핀란드인은 소득이 높은 사람은 최고 80퍼센트까지 세금을 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이라고 자랑하는데, 이 천만 명이 자녀 교육에 대해 바른 성경적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세금 80퍼센트를 내더라도 세상을 한번 바꾸자‘고 마음먹으면 바꿀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마저 개인적인 생각,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세속적 가치관으로 자식들을 키우려 하니까 상황이 개선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핀란드가 교육에 관한 한 천국임은 틀림없지만, 핀란드 교육 이야기가 나온 김에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핀란드의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을 때 서로 합의해서 신앙으로 그런 나라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런 외형은 견지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핀란드인 대부분이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핀란드 국민은 거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태어나면 세례 받고 결혼식, 장례식 때만 교회에 가는 형식적인 종교인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현재 핀란드는 한 사람만 사는 단독 가정이 전 국민의 50퍼센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핀란드 국토에는 18만 8,000여 개의 호수가 있는데 호수마다 몇 집씩 떨어져 있어 왕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조울증,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죠. 교육 천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시켰는데, 결과는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참 많지요.
우리가 핀란드 교육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결심하고 추구해야 할 바를 핀란드에서 배울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핀란드는 그리스도인들이 교육 천국을 만들긴 했는데, 그 교육 천국에서 하나님을 믿는 영성을 잃어버리자 삶이 불행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핀란드를 진면교사眞面敎師인 동시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입시제도와 입시 지옥의 문제를 어떻게 탈피할 수 있겠는가? 저는 그리스도인 부모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까 선생님께서 창의적인 삶, 창의력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평소 이것을 독창적인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각자를 다 다르게 독창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도 상상력만으로는 열 명 이상의 얼굴을 그리지 못합니다. 반드시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독창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70억 인구를 다 다르게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한히 독창적인 분이시라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직선 위에 줄 세워 놓고 1등, 2등 순위를 매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둥근 원 위에서 우리가 각자 자신의 독창적인 방향으로 뛰어가게 하셨습니다. 직선 위에 서면 1등, 2등, 꼴찌가 있어 괴롭지만 독창적인 방향으로 삶을 살면, 똑같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입시제도하에서 성적의 노예로 자식이 열등감 갖게는 하지 않는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소년이 골리앗과 맞설 때 사울 왕이 자신의 갑옷을 입혀 주고 투구도 씌워 주지 않습니까. 만일 다윗이 왕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왕의 흉내를 내려고 했으면 골리앗의 단칼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베들레헴 양치기답게 자기만의 방법, 즉 양을 치면서 맹수를 물리칠 때 쓰던 물맷돌 하나로 거인을 물리쳤거든요. 그런 독창적인 삶을 살면 학력 중심의 풍조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사회자께서 말씀하셨듯 저는 서울대가 아닌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회생활을 할 때, 또 사업을 할 때, 출판사를 시작해서 경영할 때 서울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제게 불이익을 준적도 없고, 그것 자체로 어떤 경쟁에서 낙오된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 동기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늘 한발 앞서 갔습니다. 그 이유가 어머니께서 저에게 ‘너만이 살 수 있는 인생을 살지 않으면 너는 평생 간판을 추구하고, 남 따라 다니느라 네 인생 못 산다'고 말씀하시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끔 제 눈을 열어 주신 덕분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세상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자식에게 주신 독창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면, 똑같은 학교에 보내면서도 얼마든지 자식을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으며 자식을 시험의 노예로 병들게 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령·이재철 대담 / 『지성과 영성의 만남』 / 홍성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