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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1

hope888 2022. 3. 27. 21:53

요즈음 나는 70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과 시집을 낸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망령이 났다고들 합니다. 요즘엔 그것을 점잖게 알츠하이머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꼭 그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은 한 가지이지만 묻는 사람들의 말투는 제각각 다릅니다.

예수님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이 하는 안티 크리스천들은 경멸조로 묻고, 카뮈의 경우처럼 신 없는 순교자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배신자를 대하듯 질책하는 투로 말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금시 혀라도 찰 듯이 혹은 한숨을 쉴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 " 라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오랜 세월 글을 써 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 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 새 나를 ‘쟁이' 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 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요.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갑자기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에 이미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도 거북한 무엇이 암종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가 봅니다. 겉으로는 강한 싸움꾼인 척하지만, 옆에서 누군가 한 마디 훈수를 하고 조금만 역성을 들어주면 금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약한 무신론자들인 겁니다.

그렇지요. 그들은 대부분이 내 옛 친구들이었습니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 이라는 에세이집을 읽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30대에 쓴 글들인데, 나는 그 책 제목 그대로 신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기성의 모든 권위에 대해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온 무신론자였지요. 저항과 부정의 삶, ‘허공을 향해 독침을 찌르고 땅 위에 떨어져 죽은 웅봉(雄蜂)의 시체' 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처절한 삶이었지요.

세례를 받기 얼마 전인데도 말입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생활하던 것처럼 일본 교토의 연구소에서 홀로 지내던 그 시절, 남몰래 써 두었던 몇 편의 시를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일기를 쓰면서 간간이 써오던 시를 발표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2008년에 처음 출간한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질문들을 해 왔습니다. “왜 시를 썼느냐, 시인이 된 느낌이 어떠냐"고 말입니다. 당연한 반응인 것 같습니다. 절대로 신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니까 절대로 시를 쓸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시를 썼으니까 뉴스가 되는 것이지요.

나의 글쓰기는 20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문단에서는 문학평론으로 시작하여 에세이,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심지어 올림픽 개폐회식의 대본까지 썼어요. 대학 강단에서는 누구도 잘 읽어주지 않은 기호론 관계의 연구 논문을 써 왔지요. 그리고 알다시피 언론계에서는 신문칼럼을 전담하여 수십 년 동안 집필해 왔습니다. 출판계에서는 문학사상 주간을 맡아 광고 카피에서 기사의 헤드라인까지 썼지요. 문화부에 취임하여 관료사회에서 일할 때에는 담화문에서부터 '갓길' 같은 공공 용어까지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50년 동안 언어 노동자로 안 해본 일이 없지만 시에 대해서 만은 자의든 타의든 성역으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세례와 시집을 통해서 한꺼번에 내 자신도 모르게 두 성역을 침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이든 시학적이든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누군가 나무를 자르는 데 여섯 시간을 나에게 준다면 나는 그중 네 시간을 도끼를 고르는 데 쓰겠다"고 한 링컨의 말과는 정반대로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두 성역의 높은 문지방 위에 오르게 된 것이지요.

나에게 있어서 시와 신은 'ㄴ'받침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였지요.

그래서 그러한 물음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의 시작품에서부터 시작하여 세례를 받을 때까지의 내 일상을 수상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이 책입니다. 그리고 나를 이곳에까지 인도한 내 딸 민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권말에 그 간증을 함께 엮었습니다. 녹취 원고를 그대로 따서 실은 글이고 또 정리된 글의 양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지만, 이 책 전체의 메시지로 볼 때 그 비중은 내가 차지한 부분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나와 민아의 공저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입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책 제목은 대담하게 붙였지만 나는 아직도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도움이 있으면 나는 그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빛을 향해 더 높은 곳으로 갈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이 글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이어령 지음 / 『지성에서 영성으로』 / 열림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