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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환자 되기 28 - 장애 진단서

hope888 2022. 4. 7. 18:01

 

1. 장애 진단서

 

"형님, 왜 고스톱 안 치고 방에 누워 계세유?"

남 씨가 무릎이 아파서 방에 잠시 누워 있는데 처남이 들어왔다.

", 운전을 오래 하고 왔더니 무릎이 아프네." 남 씨가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그럼 병원을 가보시지.“ 처남이 앉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병원 가도 진통제나 주지 별 소용이 없더라고, 관절이 많이 망가져서 인공 관절 수술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젊은 편이라 더 있다 하는 게 좋다고 그냥 참고 살라네.” 남 씨가 한숨과 함께 대답을 했다.

", 이런, 아직 환갑도 안 되셨는데 큰일이네유."

"그러게 말일세."

남 씨는 젊어서 교통사고로 무릎뼈가 크게 부러졌었다. 6개월을 고생해서 뼈는 다 붙었지만 그 이후로 무릎이 아파서 건축 공사장에서 하던 일도 그만두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조금만 걸으면 무릎에 물이 차고, 앉았다 일어나려면 신음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여기저기 병원도 숱하게 다녔지만 효과가 없었다. TV에 나와서 줄기세포가 어쩌고 자가 혈액주사가 저쩌고 하는 데들을 다 가봤다. 열댓 번의 치료 시도에 수천만 원은 족히 까먹었을 게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끝판에 가선 내가 언제 고칠 수 있다고 했느냐, 조금 나아지지 않았느냐 따위의 헛소리들을 해대는 통에 마음만 상했다.

정 그러면 인공 관절을 하라는데, 그걸 하고 나면 일하기가 더 어려워질 뿐 아니라 많이 움직이면 10년도 못 돼서 또 수술해야 한다니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추석이라고 오랜만에 형님 집에 오는데 길이 막혀 네 시간을 운전하고 왔더니 무릎이 쑤셔서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만져보니 무릎이 물이 차서 꿀렁거렸다.

아무튼 잠시 쉬었다가 마루에 나가 고스톱 판에 끼었다. 명절에 남자들이 모이면 이만한 놀이가 또 있을까. 잃었다고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땄다고 약 올리지만 않으면 말이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부엌에서 형수가 상 펼쳐놓으라고 고함을 친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무릎이야 원체 신경을 쓰는 터라 화투 치는 동안에도 뻗고 있었기에 아까보다 오히려 나아졌지만 이번엔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형님이 있는 터라 신음 소리는 겨우 거둬들였으나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젊디젊은 놈이, 쯧쯧.”

형님이 못마땅한 투로 혼잣말을 한다.

"나도 내년이면 환갑이유." 남 씨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고 때 다친 것은 무릎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후로는 허리도 자꾸 아프고 구부러진다. 오늘처럼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려면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다. 병원에 가서 물어보면 뚜렷이 무슨 병이라고 말해 주지도 않는다. 그냥 연골이 다 닳아서 그렇다나. 아직 청춘인데 무슨 연골이 다 닳았냐고 하면 무거운 걸 많이 들고 다녀서 그렇단다. 건설현장에서 일한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왜 나만 그럴까. 어쨌든 방법이 없다고 운동이나 많이 하라는데, 무릎이 아파서 어디 운동인들 마음대로 하겠느냐 말이다.

형님, 그렇게 앓을 바에야 장애 진단서 좀 써 달라 하세유, 고치지 못한다면 장애인증이라도 있어야 먹고살 것 아니유.” 처남이 밥을 나르면서 거들었다. 듣고 보니 딴에는 맞는 말이다. 못 고치면 장애 아닌가.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남 씨는 집에 가는 대로 장애 진단을 받아보리라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남 씨는 운전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아서 남은 연휴 동안 기어 다니다시피 했다. 출근하는 날이 마침 야간 근무라 저녁에 겨우 몸을 추스르고 나가서 간신히 순찰 돌고 반듯이 앉아 있다가 퇴근했다.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어 다음 날 병원엘 갔다.

"안녕하세요? 어디 아프세요?” 원장 의사가 물었다.

"명절 끝나고부터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에요.” 남 씨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명절 때 오래 앉아 있으셨지요?" 의사가 다 안다는 듯이 물었다.

운전을 오래 해서 그런가 봐요. 내려갈 때부터 아프더라고."

"허리가 더 아프세요, 무릎이 더 아프세요?"

"똑같아. 둘 다 안 아프게 해줘요."

자주 가는 병원이라 원장과도 친했다. 적어도 남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군데다 주사 맞으면 좋지 않아요. 한 군데만 우선 맞고 다른 데는 다음에 맞으세요. 게다가 두 군데 다 맞으면 보험이 안 돼서 돈도 많이 내야 해요.” 남 씨와 원장은 많이 아플 때면 으레 뼈주사 맞는 걸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가 주머니 걱정까지 해주니 고맙다.

"그럼 우선 허리부터 놔줘요."

남 씨는 허리에 신경 차단 주사를 맞았다. 이건 하고 나면 며칠은 효과가 반짝한다. 요번처럼 굴신도 못하게 아플 때 살 만하게 해주니 용한 주사이기도 하다. 자주 맞아본 남 씨는 주사 맞고 일어나자 우선 자신감이 생겼다. 실제로 통증이 없어지기도 했다. 무릎 주사는 일주일 후에 맞기로 하고 나오다가 생각이 났다.

원장님, 나 장애 진단 해줄 수 있어요?"

원장은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글쎄요, 쉽지 않을 걸요.”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다음에 올게 해줘 봐요."

남 씨는 며칠 후 처남이 알려준 대로 우선 주민 센터를 찾아갔다.

요즘 장애인 판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다. 복지계라는 팻말이 보였다. 마침 한산한 시간이었다. 여직원이 무심하게 앉아 있다가 남 씨가 다가가자 번호표 뽑아 오세요, 한다. 아무도 없는데 그냥 보면 되지 무슨 번호표 타령이야. 남 씨는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렇다고 소리 내서 타박하면 그것도 꼴불견이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직원 말투가 비교적 상냥하다. 알았다. 번호표를 쥐여주면 순해지는구나,

, 장애인증을 받는 걸 알아보러 왔어요." 딸보다 어려 보이지만 처음 보니 존댓말을 해야겠지.

, 어디가 불편하신데요?" 여직원이 남 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고 일도 못하면서 산 지가 벌써 10년 가까이 돼요.

남 씨가 공손히 대답했다. 요새는 공무원이 장애 판정을 한다니까 이 아가씨가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그러시면 이것 가지고 정형외과 의사가 있는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 오세요.

"진단서만 받아 오면 되는 거여?"

"일단 받아 오세요. 될지 안 될지는 내용을 봐야 아는 거니까요."

직원이 고개를 숙인다. 이제 그만 가시라는 뜻이렷다.

오늘 내로 결판을 보겠다고 생각하고 남 씨는 곧장 병원으로 갔다.

원장님, 나 이것 좀 써줘요.” 남 씨가 동사무소에서 받은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 그런데 어쩌나. 이게 쉽지 않아요. 규정상 아저씨는 안 되는 걸로 돼 있거든요." 의사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원장님, 생각해봐요. 허리와 무릎이 망가져서 일도 못하는 놈이 장애인 아니면 뭐야? 써줘요!" 남 씨는 오늘은 가는 데마다 떼를 쓰겠다고 아침부터 작정한 바 있다. 처남이 안 그러면 안 해줄 거라며 단단히 당부를 해놓은 터다.

고집 부리신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그리 원하시면 써드리기는 하지만 제가 써드려도 복지부에서 퇴짜 놓을 겁니다. " 의사가 시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의사가 장애인이라고 쓰면 장애인이지. 안 그래요?” 남 씨는 한시름 놓았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싶었다.

요즘은 의사가 쓰는 진단서에 급수 적는 난이 아예 없어요. 지금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만 쓰는 거지요. 그러니까 명칭만 진단서지 사실은 소견서에 가까운 거예요.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환자는 장애 진단이 나오지 않으면 의사를 욕할 게 뻔하다.

"어쨌든 원장님이 잘 써줘야 뭐가 돼도 될 것 아니에요? 잘 써줘봐요.” 남 씨는 의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꼭꼭 틀어 막으려고 노력했다.

"장애가 있다는 것과 장애인증을 받는 건 다른 얘기거든요. 어쨌든 저는 아저씨 상태를 잘 적어드리는 거니까 나중에 원망은 마세요."

쓰는데 옆에서 보니까 척추 후만증과 외상성 관절염 때문에 잘 걷지 못한다고 쓰는 것 같았다. 몇 가지 서류에다가 엑스레이도 복사해서 가지고 가라고 했다. 가지고 가면 공무원들이 뭘 알까 싶었지만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니까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척추 후만증은 척추가 뒤로 휘어지는 병이다. 보통 청소년기에 발병하는 경우를 가리키지만, 퇴행성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외상성 관절염은 다쳐서 부러지거나 한 후에 그 후유증으로 발생한 관절염을 말한다).

남 씨는 받자마자 부리나케 주민 센터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들어가자마자 번호표부터 뽑았다. 앞에 할머니 한 분이 한참을 서 있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여직원이 몇 번을 설명해도 똑같은 걸 자꾸 물어봤다. 도대체 자식들은 어쩌고 혼자 와서 민폐를 끼치는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자 여직원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할머니, 가서 아드님이랑 같이 오세요.“

아들 없어." 할머니가 시치미를 뚝 뗀다.

아까는 있다셨잖아요.” 여직원이 새침해졌다.

"어디 사는지 몰라.

할머니는 능청스러웠다.

보다 못해 옆자리의 민원인 없는 남자 직원이 할머니를 맡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느라 막 화가 치밀어 오르던 남 씨는 그 남직원이 기특해서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남 씨 순서가 되어 병원에서 받아온 진단서와 CD를 내밀었다.

장애 진단서요? 이리 주세요. 제가 심사위원회에 접수를 시킬게요. 결과가 나을 때까지 길면 한 달도 걸릴 수 있습니다.” 여직원은 할머니와 한참을 씨름한 끝인데도 상냥했다.

? 심사위원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진단서 내면 그 자리에서 장애인증을 받을 줄 알았던 남 씨는 잠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곧 당연한 일인 걸 깨닫고는 내가 왜 그리 바보같은 생각을 했을까 하고 허허 웃으며 나왔다.

남 씨는 집으로 돌아왔다. 신청해놨으니 기다리면 결과가 나오겠지만, 의사가 하는 말로 봐서는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그럼 눈앞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이야기를 해줘야 따져보기라도 할 텐데 심사위원회라니,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인간들인지도 모르니 따질 수도 없고, 참 허탈한 노릇이다. 기다려서 안 된다면?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의사가 한 말이 이해가 갔다.

작년부터는 의사한테 맡기지 않고 공무원들이 결정하게 고쳤다는 것 말이다.

의사가 결정하게 했을 때는 환자들이 코앞에 앉아서 사정도 하고 협박도 했을 테니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디 있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결정하도록 하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3주쯤 지나서 연락이 왔다. 장애인증 발급은 불가하다고, 반드시 받아내서 생활고를 덜어보려 했던 남 씨는 어디 가서 떼를 쓸 수도, 따질 수도 없었다. 얼굴 없는 상대에게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 생각해보면 나한테 닥쳤으니 화나는 일이지, 국가적으로 보면 잘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 달쯤 되자 허리는 견딜 만한데 무릎이 아파와서 지난번 저축해둔 무릎 주사를 맞으려고 병원에 들렀다.

원장님 무릎이 아파요. 주사 좀 놔줘."

"어디 봅시다. 무릎 주사 맞은 지는 한 네 달은 됐네요. 맞아도 크게 해롭지는 않겠네.” 의사가 간호사에게 주사 준비를 시켰다.

원장님, 근데 난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나처럼 일도 못하고 허리와 무릎이 아파 죽겠는 사람을 장애인증 안 주면 누굴 준다는 거야?"

남 씨가 바지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하기야 따지고 들면 아저씨가 엄지손가락 하나 없는 사람보다 더 힘들긴 하지요, 그렇지만 전 국민을 상대로 얼마나 아픈지 따져서 장애인증 만들어주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아프기만 한 건 진단 기준에 넣을 수가 없는 거예요. 손가락만 해도 셋째, 넷째, 다섯째 손가락은 하나나 둘이 없어도 장애인증이 안 나와요, 엄지나 검지는 하나만 없어도 내주지만, 그리고 아프다고 장애인증 주면 나이가 일흔 넘은 사람은 다 달라고 할 것 아니에요. 그럼 국가 운영이 안 되지요."

"그럼 무릎 아픈 사람 중에선 어떤 사람을 주는 거지요?"

"인공관절 수술을 한 사람 중에서 상태가 안 좋은 사람만 장애인증을 내줘요. 예전에 의사가 장애 진단을 해줄 때는 인공 관절 수술을 한 사람은 다 해줬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 중에서도 상태가 안 좋은 경우에만 장애인 판정을 하는 거지요. 그건 정부에서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수술이란 게 그 이전보다 상태를 좋게 하려고 받는 건데, 수술했다고 다 장애인증을 주면 그게 뭐예요. 논리가 안 맞아요. 그러니까 수술했다고 다 주면 안 되고 수술하고도 문제가 있는 사람만 해주는 게 맞지요.”

"허리는? 허리도 수술한 사람만 해주는 건가요?" 물으면서 남 씨는 장애 진단 받으려고 수술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허리도 수술한 사람만 대상인데, 그것도 핀 박아서 고정하는 수술을 해야만 내주지요. 정부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평가를 하자면 그런 식으로밖에 방법이 없어요. 핀 박는 수술의 경우도 수술 전보다 좋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런 힘든 수술을 받고 싶었을 만큼 병이 심한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해주는 거지요.“

"몰라. 하여튼 나는 안 해주니까 맘에 안 들어.” 남 씨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허허허, 원장이 웃었다. 남 씨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억울한 건 풀리지가 않았다. (정병오 지음 / 똑똑한 환자 되기/ 모멘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