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문 4 - 이순신

나는 왜 방황을 반복하는가?
“방황과 변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말입니다. 명언이라고 회자되는 말들을 보면, 어떻게 이런 통찰력 깊은 생각을 하고 이토록 멋진 표현을 할까 싶어 절로 무릎을 치게 됩니다. 바그너의 이 말 역시 이리저리 흔들리며 헤매는 자신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으니 방황하고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위로를 건네고, '그러니 더더욱 방황하고 변하며 살아가도 된다.'고, '그래야 삶이 더욱 생기 있다'고 용기를 북돋우는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라면 이렇게밖에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
“세상에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니?
너만 그런 것이 아니니 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파이팅! 아자아자.!“
그런데 제 말, 바그너처럼 멋진 표현은 아니지만 맞는 말이긴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방황을 하거든요. 혹시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 어마어마하게 방황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학창 시절 그는 공부는 멀리한 채 난폭한 학생 집
단과 어울려 다니고 연애에만 열중하는 등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결혼은 좋은 가문의 여자와 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인을 버리기도 했고요. 그야말로 탕아 중의 탕아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젊은 날의 방황을 끝내고 존경받는 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걸까요? 그의 말에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성서》를 접하며 그간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처절히 깨달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때부터 스스로를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 실수와 잘못을 범했던 것인지 그 원인을 알고자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파헤치고, 그 잘못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반성하며, 하나씩 하나씩 깨달음을 얻어간 거죠. 외면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과 마주하는 일, 그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우리 모두 잘 압니다. 그 고통스러운 일을 피하지 않고 계속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철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젊은 시절의 방황이 위대한 철학자를 탄생시켰다고도 할 수 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는 일들을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라. 쇠는 달구어야 굳는다. 당신도 지금의 그 시련을 통해 더욱 굳건한 정신을 얻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젊은 날의 좌절과 방황을 거쳐 역사의 위인으로 자리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성웅'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 바로 이순신 장군입니다.
사실 젊은 시절의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을 거둔 불패의 신화, 철저한 준비와 전략으로 절대 지지 않은 이 명장의 젊은 날은 뜻밖에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청년 이순신은 원래 문과를 준비했으나 뒤늦게 진로를 변경, 스무 살이 넘어서야 무과 준비를 시작합니다. 늦은 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스물여덟 살에 처음으로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는데, 안타깝게도 말에서 떨어지며 왼쪽 다리를 다쳐 실격합니다. 이후 이순신은 4년을 더 준비해 무과에 급제했고,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관직에 오릅니다.
무관이 되어서도 그의 길은 그리 순탄치 못했습니다. 이순신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이순신이 국방 강화를 위해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조정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얼마 후 여진족이 침입해 조선의 군사와 백성이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를 모두 이순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문책했죠. 이로 인해 결국 이순신은 첫 번째 백의종군의 길을 가게 됩니다. 백의종군이란 관직을 내려놓고 일반인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가서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말합니다.
이 사건 외에도 이순신은 관직 생활 중 많은 곤경과 부침을 겪었습니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그 이름만으로도 일본군을 벌벌 떨게 만드는 위용을 자랑하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연승을 거두기까지 오랜 방황과 좌절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죠. 이순신은 그 시간들을 과연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그가 고통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의 비밀을 저는 그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승승장구하는 조선 수군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본은 이순신 제거 작전에 들어갑니다. 당시 일본군을 이끄는 양대 축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로 둘은 앙숙 관계였는데, 어느 날 고니시가 조선 조정에 가토의 이동 경로를 흘립니다. 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던 조정은 옳다구나 하며 이순신에게 거기로 가서 가토를 치라고 명하죠. 그러나 그 정보가 함정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조정을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순신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다행히 그간의 공로가 매우 큰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순신은 다시 한 번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순신이 파직되자 '때는 지금이다‘ 싶었던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정유재란 당시 벌어진 칠천량해전에서 거침없이 밀려오는 왜군에 조선 수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죠. 옆에서 배가 가라앉고 동료들이 총과 활을 맞은 채 바다에 빠지자,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공포에 떨던 수군은 결국 목숨을 구하고자 피신하고, 그렇게 12척의 배가 뱃머리를 돌리고 맙니다.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전장으로 불러냅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병사와 식량, 무기는 어찌어찌 갖출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배였습니다. 바다에서 싸우려면 배가 필요한데, 이 배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던 중 칠천량해전에서 도망친 12척의 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하들이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분개해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분노보다 반가움이 앞섰습니다. 그토록 간절했던 배가 확보된 만큼 이제 부대를 꾸리게 되었는데, 이때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는 명이 떨어집니다. 가망이 없으니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합류시키라는 어명이었죠. 이에 이순신은 결단을 내리고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립니다.
“임진년부터 5~6년 동안 적이 호서와 호남을 감히 공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오히려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없앤다면 것이야말로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며, 적들은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은 비록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의 결과는 우리 모두 아는 대로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고작 12척에 1척을 더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의 영해로 쳐들어온 일본 수군을 막아내고 기적적인 승리를 이뤄냅니다. 저는 이 대단한 승리의 초점을 이순신 장군이 아닌 12척의 배에 맞춰보고 싶습니다.
명량해전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무릅쓰고 일본군에게 돌격해 대승을 거둔 12척의 배. 이 배는 칠천량해전에서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치기 바빴던 바로 그 배들입니다. 분명 같은 12척의 배인데 결과는 완전히 달랐지요.
우리는 모두 12척의 배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12척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기겠어. 어서 도망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우리에겐 아직 배가 12척이나 있다. 그러니 해볼 만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배는 어떤가요?
'12척밖에 없는 배인가요,‘ '12척씩이나 있는 배인가요?’
칠천량해전에서는 겨우 12척밖에 남지 않아 도망친 그 배를 이순신은 오히려 12척씩이나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찾아내는 희망, 어려움에 당면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낸 결과는 실로 놀랍고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이순신이 좌절과 방황을 이겨낸 힘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늘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온 그였으니, 젊은 시절에 반복된 좌절과 그로 인한 방황 역시 자신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여기며 이겨냈던 것은 아닐까요? 젊은 이순신은 '이제야' 무과 공부를 시작했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 자책하는 대신, '이제라도 적성에 맞는 무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북돋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학생 때는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이 일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지금이라도 새로운 길에 도전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른이 되려면 한참 먼 것 같아서 낙담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쉬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어렵고 복잡해지는 인생 속에서 우리는 모두 방황을 반복합니다. 가끔은 이런 내가 답답하고 한심해 스스로 따져 묻기도 하죠.
'나는 왜 이토록 계속 방황하는 걸까?
대체 언제쯤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이런 고민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나는 왜 방황을 반복할까‘라는 의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아주 잘하고 있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지금의 방황과 시련은 우리의 정신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테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보여준 발상의 전환을 기억하세요. 어떤 상황이라도 희망의 단서를 찾아 내 것으로 만든다면, 지금의 방황을 발판 삼아 더 나은 내일로 뛰어오를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