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일생일문 11 – 부의 비밀은 무엇인가

hope888 2022. 6. 3. 09:52

 

 

 

비트코인, 주식 등 재테크를 향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요즘입니다. 열풍을 넘어 광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죠. 어떻게 하면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유망한 종목은 무엇인지뿐 아니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부의 비밀이나 막대한 부를 쌓은 사람들의 공통점 같은 것들을 알려준다는 각종 책과 영상, 자료 등도 많습니다.

 

'부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는 참 많은 사람이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지요. 여기 부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오랫동안 노력하고, 마침내 거대한 부를 쌓은 역사적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거상 김만덕입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이름을 올릴 만큼 당대의 거상으로 유명했습니다.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시대에 성별의 벽을 뛰어넘을 만큼 재력을 쌓은 사람이니, 아마도 부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이 돈으로만 쏠리는 현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 땅의 청춘들이 재테크에 열을 올리느라 꿈을 제쳐두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는 더 알아야 합니다. 김만덕이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또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를 통해 진정한 부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만덕은 1739년 제주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 어릴 때 김만덕은 자신도 평범한 여염집 아녀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평범하게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열두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과도 헤어지게 된 김만덕은 생계를 위해 기방에 얹혀살다가 결국 기생이 됩니다.

어린 김만덕 앞에는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 가난이라는 경제적 한계, 기생이라는 신분적 한계, 그리고 지역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김만덕이 살았던 조선 후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꿈도 꿀 수 없던 시기였고, 더욱이 제주도는 여성들에게 '출륙금지령'까지 내려져 마음대로 이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출륙금지령'은 육지로 이주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제주도를 방어할 인력이 감소하자 이를 막기 위해 인조 이후에 생겨난 법이었죠.

이토록 많은 한계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김만덕은 상황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이 된 그는 자신의 신분을 회복해달라고 제주 관아에 지속적으로 탄원했고, 마침내 양인 신분을 회복했습니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은 김만덕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어려서부터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이 치산에 재주가 있음을 깨닫고 장사를 통해 돈을 벌고자 한 것입니다. 신분 회복과 함께 시작된 꿈이었죠. 김만덕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서 김만덕을 통해 배우는 첫 번째 부의 비밀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목표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김만덕이 주어진 삶에 순응해 평생을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는 아마도 위대한 거상 한 명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성별, 출생,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목표에 집중한 덕분에 거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부자이자 투자의 귀재로 유명한 워런 버핏은 부의 절대 법칙이 집중'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아주 먼 과거의 김만덕은 이미 이를 알고 행한 것입니다.

이후 김만덕은 객주를 운영하며 인근 상권을 장악했는데, 특히 제주의 진귀한 특산물을 육지와 거래해 많은 이윤을 남깁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해 해상 무역이 활발하고 포구를 중심으로 유통업이 크게 발달했는데, 그는 이러한 시대 변화를 읽어내고 객주를 차린 후 쌀, 소금, 옷감, 장신구 등을 사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전복, 진주, 미역 등을 육지로 내다 팔아 거상으로 성장합니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인 채제공의 시문집 번암집에 따르면, 김만덕은 수완이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번암집<만덕전>그 재주는 재산을 늘리는 데 뛰어났다.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갓의 테두리를 만드는 양태를 통해 그야말로 '대박'을 칩니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을 사고파는 일이 벌어지자 양반 인구가 급증했고, 덩달아 양반이 쓰는 갓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양태로 어마어마한 돈을 번 것입니다.

이것이 김만덕을 통해 배우는 두 번째 부의 비밀입니다. , 세상과 돈의 흐름을 면밀히 파악하고,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죠.

오직 돈만 좇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만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김만덕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쌓고 엄격한 신분제까지 뛰어넘은 김만덕,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한계를 극복하며 주체적인 삶을 산 그를 정약용, 채제공, 박제가 등 당시 사회 지도층이 기록을 통해 입을 모아 칭송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김만덕이 조선 팔도에 이름을 알린 이유는 단지 여자로서 거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1792년 제주에는 흉년과 태풍으로 극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제주도민의 30%가 흉년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갈 정도로 인명 피해가 엄청났죠. 상황이 심각해지자 1794년 제주 목사 심낙수는 제주도민들을 구하기 위해 조정에 구휼미를 요청했고, 조정에서는 구휼미 11,000석을 실은 배를 제주로 보냅니다. 이 소식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제주도민들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구호 식당을 실은 조운선 중 다섯 척이 가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바다에 가라앉습니다. 사람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이때 김만덕은 생각합니다.

 

‘부모를 여의고 혼자된 내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이웃들의 은덕이다. 지금 이 그 은혜를 갚을 때다.’

 

김만덕은 장사를 하며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의 쌀 600곡을 구입, 그중 10분의 1로 가족과 친척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위탁해 기아에 허덕이는 제주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략 80kg 600포대 정도를 기부한 것인데, 이는 당시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모은 돈을 남을 위해 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가 자기 재산을 내놓지 않은들 아무도 욕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김만덕이 전 재산을 기부한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요? 조선 후기 문신 이면승이 지은 <만덕전>에 실린 김만덕의 말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다 나의 동포이다.

하물며 같은 섬사람 아닌가!

재물이란 몸 밖의 물건이라

벌 때와 쓸 때를 알아야 하거늘

내 어찌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가 되어

내 눈앞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뻣뻣하게 보기만 하고 구휼하지 않겠나.

- 이면승, <만덕전> 중에서

 

재물이란 모이는 때가 있으면 흩어지는 때가 있다는 것, 잘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때에 올바르게 흩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김만덕을 통해 알 수 있는 세 번째 부의 비밀입니다. , 잘 벌고 잘 모으는 데서 나아가 이를 잘 쓸 때 진정한 부가 완성된다는 것이지요. 김만덕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는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 전체를 풍요롭고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당시 왕이었던 정조마저 크게 감복시켰고, 정조는 김만덕에게 상을 내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김만덕은 상을 사양하고 조금은 엉뚱한 소원을 말합니다. 바로 상경해서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었죠. 엄청난 부를 요구하거나 명예가 될 만한 직위를 바랄 수도 있 었을 텐데, 고작 상경과 금강산 유람이라니, 다소 어이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에 걸쳐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고, 신분의 한계를 돌파하고, 가난의 한계를 극복해온 그에게 지역의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만큼 의미 있고 뜻깊은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당시에는 제주도의 여인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들어가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렇게 쉰아홉 살이 되어서야 난생처음으로 제주도를 벗어나 한양에 도착한 김만덕. 하지만 상민 신분의 여성이었던 김만덕은 궁궐에 출입할 수 없었죠. 그러자 정조는 김만덕에게 당시 여성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의 벼슬인 '의녀반수'를 하사해 궁에 들어오게 한 뒤 이렇게 칭찬합니다.

 

“의로운 기운을 발휘해 주린 백성 1,000여 명을 구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이후 김만덕은 금강산으로 가서 멋지고 놀라운 경치를 두루 탐방했는데, 한양으로 돌아오자 김만덕의 이름이 한양 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당시 금강산 구경은 모든 사람이 평생의 소원으로 꼽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남성도 양반도 쉽게 할 수 없었던 꿈을 이룬 것이죠.

이후 제주도로 돌아온 김만덕은 죽기 전 양자에게 먹고살 정도의 재산을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제주도민을 위해 기부하며 마지막까지 나눔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과 같은 인물입니다.

조선 시대에 제주의 평민으로 태어나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제약 을 이겨내고 남성들조차 누리기 어려운 영예를 누린 김만덕.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하게 요구한 삶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의지력과 집중력, 세상의 흐름을 읽는 통찰, 그리고 이를 사회에 환원한 그의 일생은 오늘날 부를 쌓고자 하는 많은 이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듯합니다. 진정한 부란 그것을 통해 나를, 내 삶을, 나아가 세상을 가치 있게 만들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김만덕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짜 부의 비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객주

 

조선 후기에는 선박을 통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가 각 지방 상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포구에는 대량의 물자를 원격지로 이동하는 선상(船商)이 출입했는데, 그들 간의 거래를 주선한 이가 바로 객주다.

객주는 배로 수송해온 물자를 대상인이나 행상에게 중개하는 일종의 위탁매매인이었다.

객주의 형태는 일반 보행자에 대한 숙박만을 본업으로 하던 보행객주(步行客主), 대금 등 금융의 주선만을 전문으로 하는 환전객주(客主), 조리··바가지·삼태기와 같은 가정용품만을 취급하는 무시객주(無時客主) 등으로 다양했다.

 

2. 만덕전

 

정조는 김만덕이 재물을 풀어 제주 백성들을 구휼한 점을 높이 사 신하들에게 그에 관한 글을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채제공, 정약용, 박제가 등이 김만덕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이 중에서 정조 시대 개혁 정치를 주도한 채제공의 번암집에 실린 <만덕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에는 김만덕이 당시 남성도 해내기 힘든 일을 여성 혼자 힘으로 해낸 것에 대한 칭송과 정조의 배려로 제주 여성이 섬을 벗어나 한양 나들이를 하고 금강산을 유람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채제공과 대립하던 심노숭은 김만덕에 대해 부정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최태성 / 일생일문/ 생각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