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꾼
다이애나 스펜서가 영국의 왕세자비가 되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는 시기와 맞물려 카메라 제작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덕에 파파라치의 역사가 시작됐다. '비운의 왕
세자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다이애나는 결국 파파라치의 추적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이 시작된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 파파라치들은 집요하게 다이애나를 쫓았다. 그녀의 사진 한 장이면 미디어로부터 두둑한 금액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스타들의 일상을 찍은 파파라치 사진은 타블로이드지에 비싼 값에 거래됐고 이는 곧 '팔리는 기사'가 됐다. 대중은 파파라치 사진 속 스타들에 열광했다. 일상을 흠모하고 패션을 따라 했다. 파파라치 사진의 파급력이 커지며 스타들은 공식 석상이 아닌 일상복 에도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했고 브랜드는 이를 광고에 활용했다. 최근 유행하는 '아이돌 출근 패션' '공항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소구되는 광고 방식의 시초라 할 수 있다.
폭식증이 시작될 무렵 할리우드 파파라치 사진 속 패션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이 아니어도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파파라치에 찍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셀러브리티'라는 새로운 계층을 이루며 미디어를 메웠다. 그중 올슨 자매와 니콜 리치는 당시 파파라치 사진으로 타블로이드 지를 장식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올슨 자매로 불리는 메리 케이트 올슨과 애슐리 올슨은 쌍둥이 자매다. 어린 시절 할리우드 영화에 콤비로 등장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할리우드 아역 출신 배우들이 그러하듯 10대에서 20대로 넘어오는 시기 기행과 외모 변화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기행이라지만 사실 파티에서의 행동이나 남자친구와의 애정 행각 등 귀여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외모 변화는 달랐다. 그녀들은 마치 거식증에 걸린 환자처럼 말라갔다. 귀엽기만 한 외모가 싫다는 듯 젖살을 빼더니 점점 여위어갔다. 그녀들을 추종하는 소녀 팬들이 많은 만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온갖 타블로이드지에서 그녀들의 몸무게를 가늠하는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잡지 속 그녀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던 사람이 한명 더 있으니 다름 아닌 니콜리치다.
니콜 리치는 미국의 유명 작곡가 라이어널 리치의 딸이지만 글로벌 호텔 체인인 '힐튼'의 손녀 패리스 힐턴의 친구로 더 유명하다. 둘이 함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알려 졌기 때문이다. 모델처럼 키가 크고 깡말랐던 패리스 힐턴과 달리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 였던 니콜 리치는 당연하다는 듯 패리스 힐턴과 비교 대상이 됐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파파라치 사진에 등장한 니콜리치는 그야말로 곧 말라 죽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깡마른 상태였다. 뼈에 살가죽만 겨우 붙어 있었다. 올슨 자매와 니콜 리치, 미디어가 우려하며 기사들을 퍼 날랐던 그들은 당시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말라야 했을까? 올슨 자매나 니콜 리치 외에도 당시 할리우드의 수많은 20대 배우들은 누가 누가 더 마를 수 있나 시합이라도 하듯 말라갔다. 2000년대 초반은 한국에서도 모델 출신 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었고 그들의 몸매는 날씬한 연예인 중에서도 더욱 마른 축에 속했다. 다이어트 비법을 묻는 잡지 인터뷰에서 그들이 “원래 먹는 걸 싫어해요. 귀찮아서요”라고 대답하는 걸 볼 때면 그들의 그런 식성이 부럽기도 하고 식욕이 왕성한 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먹는 것을 귀찮아하는 그들의 습성을 쿨하게 생각하며 이를 따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프로아나족이었다. 할리우드 타블로이드지도 마른 스타들의 섭식장애를 걱정하는 척하며 그들의 마른 몸을 대문짝만하게 신는 것으로 화제몰이를 했으니, 얼핏 보면 다른 결의 기사로 보이지만 마른 연예인들의 다이어트 비법을 묻는 국내 잡지들과 그 속성은 동일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표준 몸무게’와 ‘미용 몸무게가 인터넷에 나돌지만 사람마다 이상적이라 여기는 몸매의 기준은 각각 다를 것이다. 나에게 그 기준은 '뼈'였다. 말라서 모양이 드러나 보이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몸매였다. 꾸준한 운동으로 잡힌 탄탄한 잔 근육 사이로 보이는 뼈가 아니다. 말라서 골반, 쇄골, 척추 등의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야 했다. 올슨 자매와 니콜 리치의 비쩍 마른 몸과 푹 꺼진 볼을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의 몸을 보며 현혹됐던 것은 앙상하게 드러나는 그녀들의 뼈였다. 그중에서도 갈비뼈와 척추.
그 시작은 스무 살 때 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나체의 몸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던 주인공 의 등에 갈비뼈와 척추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찰나였지만 내 눈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모두 사라지고 내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그녀의 등뿐 이었다. 그날부터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으로 각인됐다. 그 이후 올슨 자매와 니콜 리치처럼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몸매를 가진 사람들을 추종하게 됐다. 그런 몸이 되기 위해 더욱더 심한 다이어트를 했다. 그 배우처럼 연약해 보이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몸이 되고 싶었다.
파파라치에게 시달리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섭식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한다. 스무살의 나를 현혹했던 그녀는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과연 우연일까. (김안젤라 /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 창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