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43

마음 달래기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어느 때 보다 가슴 깊이 공감이 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미로 암담함, 시시각각으로 목을 조이듯 다가오는 불안, 공포, 두려움 무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살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불안을 호소하며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팬데믹, 무엇 하나 명쾌한 해답도 없고 세계는 전쟁의 암운이 감돌고 힘없는 아이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 지구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누구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제일 두려운 것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는..

수필 2022.06.13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찬란한 봄빛인데, 학교생활은 어떠니? 코로나로 친구도 마음대로 못 만나고 학교 교정도 맘껏 뛰놀지 못하고……. 아마 곧 활기를 되찾을거야. 오늘은 너희들에게 우리와 동고동락하는 친구 소나무에 대해 설명해 줄게. 반평생 근무하던 직장에서 퇴임하니, 긴장이 풀려선지 건강이 안 좋아지더라. 그래서 먼 여행보다 동네 주변 솔밭이라고 불리는 소나무 공원을 들르곤 했어. 소나무가 촘촘히 들어서 있는데, 그 모습이 승천하는 용처럼 구불구불하고 기울어져 새삼스레 눈여겨보게 되었다. 태양 찾아 힘들게 살아 가며 하늘 옥상에 솔방울을 잔뜩 매단 모습이, 자식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 물론 인간사처럼 좋은 환경 아래 햇볕 좋은 곳에 사는 나무들은 부채처럼 팔 벌리고 우아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깎아지른 ..

수필 2022.06.13

어머니의 떡

애기 업은 엄마 - 비양도에서 봄이 완연하다. 온전히 봄을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오려는 듯 4월 한낮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진다. 올해는 일찌감치 채소밭에 심을 종묘도 마치고 밭에 퇴비도 넉넉하게 뿌려두었다. 코로나19에 걸려 출근도 하지 못하고 재택근무 중이라는 딸과 며느리, 손주들도 차례로 양성판정을 받고 격리 중이라고 했다. 고위험군에 속하는 나로서는 산골에서 살고 있으니 도시의 애들을 돌봐줄 수도 없고 전화로 목소리만 듣는다. 40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에서 정년을 1년 남긴 채 명예퇴직을 하였다.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나의 건강까지 위협했다. 퇴직한 지 1년도 안되어 시작된 코로나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세상과 단절되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나의 교육에 대한 열정도 모두 잊었다. 어느덧 ..

수필 2022.06.07

명태의 변신

코가 끼어 덕장에 매달린 명태들의 인간을 향한 말 없는 외침이 애틋하다. 애를 태울 내장도 없이 깡말라 버린 몸짓이 마치 모든 걸 비워낸 성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도대체 몇 구비의 고개를 넘었을까, 넓은 바닷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뜨거운 삶을 영유하던 한 시절이 꿈이었듯 아득하다. 화려한 욕망을 미련 없이 내 던지고 허탈한 서글픔에 지친 영혼처럼 공포에 질린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뭉크의 를 연상케 한다. 이웃에 사는 막내는 가끔 가슴 답답한 어미의 숨통을 트여주기 위해 야외 나들이를 시켜주곤 한다. 딸도 딸이지만 장모를 배려하는 막내 사위의 마음 씀이 더 고맙다. 임진각이나 헤이리를 주로 가지만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먹거리도 풍성한 강원도를 더 자주 가는 편이다. 얼마 전 딸네..

수필 2022.06.06

아내가 기르던 난(蘭)

감꽃 매년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향기를 집안에 가득 채워주던 우리 집 난이 요즘 들어 비실비실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서로 간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답답할 뿐이다. 난도 아내가 먼 길을 떠난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만 같다. 아내는 아들 형제를 아무 탈 없이 키워 출가를 시키자 마음이 허전했던지 하루는 친구가 주었다며 꽃이 핀 난 화분 한 개 들고 들어왔다. 초등학교 동창이 주었다는 그 난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첫눈에 들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어느 날, 시골 허름한 한 찻집에서 시골 처녀인 아내와 처음으로 맞선을 보았다. 그때 아내는 저 난처럼, 나를 홀릴 듯이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다. 난 화분을 들여놓고 아내는 나보다도 그 난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좋아했다. 시간..

수필 2022.05.31

고슴도치 딜레마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비가 오려나 보다. 베란다에 놓아둔 화분에는 벌써 냉이 꽃도 피고, 달래와 부추가 올라온 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작년에 싹이 나서 한 뼘 정도 자란 단풍나무와 중국단풍은 줄기가 충전기 줄 만큼 가늘다. 추운 겨울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더니, 앙증맞은 연두색 잎을 벌써 달고 한들한들 인사를 한다. 흙 속 여기저기에 꿈틀거리는 생명이 있는 듯하여 물을 듬뿍 주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에는 쇼펜하우어가 썼다는 '고슴도치 딜레마'를 아무 의심 없이 그런가 보다 했었다. 키르케고르도 그것을 인용해 실존적 고독 속 현대인을 설명했다고 하고 프로이트도 심리학에서 인용했다니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5년 가까이 고슴도치를 키워보니 그 말은 틀렸다. 가시가 있어 가까이 가면 서..

수필 2022.05.31

오월의 나비

나이가 들어서야 추억의 진미를 안다고 했던가. 내 벌써 종심(從心) 고개를 넘고 보니 지나온 날들에 대한 갖가지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가슴속에서 회억의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나는 곧잘 아득한 세월의 강 저 너머로 홍안의 젊었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 누구인들 가슴 아린 추억거리가 한두 가지쯤 없을까만 참으로 삶과 죽음의 구획마저 가늠할 수 없었던 전쟁 마당에서의 회억만큼은 절실하지 못하리라.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야기된 6·25 전란이 한창일 때 나는 금강산이 내려다보이는 동부전선 최전방 고지에서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아무리 무쇠처럼 단단한 젊은 몸이라고 하지만 몇 날 몇 밤을 공방전투 시달리고 나면 그야말로 온몸이 녹초가 되어 아무 데서나 곯아떨어지고 만다. 1952년 5월의 ..

수필 2022.05.30

수의(壽衣)

수의를 준비해두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 선물로 해드리기도 하는데 친정어머니께서는 젊은 날 손수 마련해 두셨다. 친가 나 외가 쪽 부모님이 단명하셔서 애달프게 살아온 어린 날의 얘길 종종 하시더니 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이 깊으셨는가 싶다.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어머니가 비방책으로 수의를 장만하셨다 해도 그 마음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는 평생 몸담은 교직에서 정년을 2년 앞두고 크게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세상을 등지셨다. 오래 살기를 바라 준비해 둔 수의를 입고 가시긴 했으나 마음의 준비 없이 맞은 영원한 이별 앞에 누구보다 큰 상실감에 빠진 어머니는 당신의 수의..

수필 2022.05.30

검은등뻐꾸기

"오호호호, 오호호호" 난생처음 들어보는 새소리였다. 딱, 네 음절씩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울음소리를 냈다. 앞 세 음절은 높이가 같고, 마지막 한 음절이 두 음 정도 뚝 떨어지는 소리로 들렸다. 은왕봉 앞 능선에서 신둔사 쪽으로 가는 내리막길에서다. 낙락장송이 빽빽이 솔숲을 이루고 있는 높은 곳 그 어디에선가 의문의 새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울고 있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살펴봐도 새의 모습은 오리무중, 혼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그 새소리는 분명히 맑고 경쾌한데도,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애잔함이 깔려있는 듯했다. 마침내 신라 군사들에 의해 나라가 초토화될 때, 서둘러 몸을 피한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왕과 그 가족들이 한동안 숨어 살았다는 은왕봉(隱王峰) 앞에서 그 새소리..

수필 2022.05.14

자투리가 필요해

감자 수제칩 수제 칩을 만들었다. 명절 끝에 손이 잘 가지 않는 과일에 대한 처방이다. 정갈한 손질 한두 번이면 진품이 되는 건 시간문제, 갈수록 재미가 붙는다. 받는 사람에 따라선 잗다란 것일 수 있어 포장에 공을 들인다. 소분 봉지마다 색색의 리본을 묶고 색한지 쪼가리에 손편지를 적는다. 그대 향한 마음이 새콤달콤한 사랑이 되었다고 신통하다. 뒷전에 밀려있던 자투리들이 불려 나와 제 몫을 했다고 눈웃음을 친다. 어느 결엔가 자취를 감추어도 몰랐을 소소한 나부랭이들, 없어도 그만일 뻔했던 자투리들 잔치를 앞에 놓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이들에게서 오는 물건에 버리기가 아까운 것들이 많아 꼬맹이 상자서 부터 진기한 것이면 칸칸이 모아 둔다.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한다며 좁쌀이 되어간다고 농을 거는 옆..

수필 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