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암은 짠 음식, 탄 음식, 헬리코박터균의 합작품
전문가들은 위암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고염식과 탄 음식, 조리 후 오래된 음식 외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꼽는다. 근대의학이 확립된 이후부터 최근까지 위 내부에는 어떤 균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강력한 산 성분의 위산 때문에 생물체가 자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30여 년 전 이 같은 오랜 학설이 깨졌다.
1982년 호주의 의학자 마셜과 워렌이 위점막에 기생하는 세균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발견한 것이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은 나선형의 간균(막대균)으로 섬모를 가지고 있어서 끈끈한 점액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또 유리 에이스라는 효소를 이용해서 요소를 분해, 암모니아를 만들어 주위를 알칼리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위산이 많은 위 속에서도 자신 주변의 산도를 ph7~5로 유지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다.
1)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과 위암
3개월 전부터 계속 체기가 있고 소화가 안 되는 증상이 반복돼 분당 서울대학교병원을 찾은 이보라 씨(37세), 내시경 진단 결과 위 내부에서 조그만 병변이 발견됐다. 큰 궤양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통 병변이 아닌 암 병변이라는 게 이 씨를 진찰한 담당 의사의 설명이다. 원래 역류성 식도염이 있어서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암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이보라 씨. 평소 저녁은 거의 안 먹고 아침, 점심도 불규칙하게 먹는다는 보라 씨는 자신의 식습관 때문에 암이 온 것 같다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암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어떻게 내가 암이… 몸이 하나도 아픈 데가 없어서 과연 정말 암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37세의 젊은 나이고, 가족 중에 위암 환자도 없다는 점을 유심히 살펴본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는 이보라 씨의 위암 발병 원인으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을 의심했다. 김교수는 위 점막에서 조직의 일부를 떼어내 조직검사와 요소검사를 실시했다. 헬리코박터균은 일반세균보다 요소분해 요소를 100배 이상 많이 가지고 있어서 요소를 분해해 암모니아를 발생시킬 때 지시약의 페놀레드 산도가 올라간다. 이 원리를 이용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 여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돼 있으면 지시약의 산도가 올라가고 이때 지시약의 색깔은 빨갛게 변한다. 검사 결과 이보라 씨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돼 있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위점막을 얇게 만드는 만성 위축성 위염을 일으키고, 불규칙한 식사와 고염식, 또 다른 발암물질 등이 가세해 위점막이 장상피세포처럼 우둘투둘해지는 장상피화생을 거쳐 암으로 진행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위산 속에서도 살 수 있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위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 중의 하나로 분류하였다. 이 균은 위점막의 점액층 바로 밑에 있는 위 상피세포 표면에 붙어 기생하며 독소를 만들어내 자기가 붙어살고 있는 위세포를 손상시킨다. 이후 위점막이 장세포처럼 변하는 장상피화생이 일어나고 여기에 식이 요인, 유전적 요인이 더하여 위선암, 위림프종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과 고염식 습관이 위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은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동물실험을 통해서도 밝혀졌다.
가천의대 길병원 연구팀은 실험용 쥐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감염시킨 후 0.5%의 소금물을 음용시킨 후 80주 후에 정상 쥐와 위의 상태를 비교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쥐의 수명은 태어나서 약 80주 정도이므로 주의 1주는 사람의 1년에 해당한다. 결국 이 실험은 쥐의 한평생을 관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험 결과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시키지 않고 소금물만 음용시킨 쥐는 일생동안 위의 주름이 약간 커진 정도임에 비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된 쥐의 주름은 거의 10배 이상 커지고 위 점막에도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가천의대 길병원 함기백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엄청난 증식을 유발해서 2차적인 원인, 즉 짜게 먹는다든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든가 혹은 위에 해로운 물질이 들어오게 됐을 때 이 요소들과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합작해 암 발생에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축성 위염이 만성화되면 위점막이 점차 노화된다. 이 노화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빨리 진행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암세포가 발생하게 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세계적으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률이 높은 편에 속한다. 특히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난 전후세대(50세 이상)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돼 있을 정도여서 이 시기 사람들의 위암 발병이 높은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50대 이상은 50%, 40대는 40%, 20대는 20% 정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돼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감염률이 약간 높아서 위암 발병률이 높은 50대 이상은 감염률이 60%가 넘는다. 일본 야마가타대 의대 예방의학과의 후카오 아키라 교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된 사람이 고염식을 하면 위염 발생률이 높아지고 위염이 위축성 위염이나 위궤양으로 진행돼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며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위암 발병 위험성을 강조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이 위암 발병에 독립적으로 관여한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의학적 증거가 불충분하다. 하지만 전체 위암 환자의 40~60%에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양성으로 나오므로 이 균의 감염자는 위암의 상대적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자들은 이 균을 제균시켜 버리면 암 발생도 막고 위장 관련 질환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모든 사람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제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보균자라 하더라도 80% 이상은 평생 이 균과 동거하면서 아무 문제없이 일생을 마친다. 보균자 중 15% 정도의 인구에서만 위염과 장상피화생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헬리코박터균이 제거된 경우에는 위 분문부(식도와 위가 연결된 부위) 암과 역류성 식도염의 빈도가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어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에 대한 무차별적 제균치료는 권장되지 않고 있다. 위암으로 진단되어 부분적 위 절제술을 받은 사람이나 위암 가족력이 있는 경우 이 균을 제균하는 것이 위암 치료와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되고, 위암 발병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단독 감염만으로는 위암 발병의 주요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조사 연구도 있다. 우리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률이 비슷한 인도네시아인(인구의 약 60%가 감염)들은 위암 발병률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1천분의 1도 안 된다. 오래 보관한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을 바로 조리해 먹으며, 소금간을 거의 하지 않고 식전이나 식후에 열대과일을 많이 먹는 식습관이 위암 발생률을 적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위암은 어느 한두 가지가 아닌 복합적 요인의 산물이다. 고염식과 불에 탄 음식, 조리 후 오래된 음식 등을 먹은 사람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돼 있을 경우, 위암 발병 확률을 높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김정수 PD 지음 / 『위암』 / 경향미디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