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강한 가정 만들기
자식이라고 하면 결사적으로 변할 부모들 많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자식 때문에 다른 동네로 이사들을 가고 싶어 하죠.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도 이젠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기리기 부부는 가정의 파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식의 가족 해체, 부모 자식 간의 문제, 시부모 문제 등에 어떤 답을 주나요?
이재철: 성경이 부모, 자식, 가족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식의 의무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주로 명령하는 것은 좋은 부모가 되라는 것이거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야기하지만 몇 번밖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 성경은 먼저 좋은 부모가 될 것을 명령하는가? 그건 자식이 있기 전에 부모가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가 좋은 자식을 만들죠. 좋은 부모 밑에서 나쁜 자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모가 바른 믿음,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면 자식들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일차적인 교육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 문제는 결국 남편과 아내의 문제이고, 바꿔 말하면 부모의 문제죠. 부모의 모든 문제가 자식의 문제로 바뀌고 사회 문제로 증폭됩니다.
부모에게 가장 큰 문제는 나이 들어가면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나이 먹은 '노인'으로만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호칭은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막 태어난 영아에서 유아, 청소년, 청년, 장년으로 넘어가는데, 그다음에 갈림길로 들어섭니다. 노인이 되는 길이 있고, 어른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과의 관계에서 어른으로 시작해서, 어른으로 지속되고, 어른으로 완성돼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른이 되느냐 노인이 되느냐, 그 분기점은 내가 나를 더 생각하느냐 상대를 더 생각하느냐, 바로 여기서 갈라집니다.
그래서 노인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만 알죠. 그런 분들은 나이가 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지요. 그런 부모는 겉으로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틀 속에 자식을 집어넣는 것이죠. 이는 자기 체면과 욕심을 위해 자식의 인격과 정서를 해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부모가 노인이 되면, 그 노인이 건강할수록 자식들은 괴로워집니다.
반대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을 위하는 마음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20대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30대에는 이해하고, 30대에 이해 못 하던 것을 50대, 60대에 이해하고 품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곁에 있으면 그분이 설령 병상에 누워 있어도 주위는 훈훈해집니다. 어른은 모두를 감싸고 덮어 주고 자기 것으로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어른의 모형이십니다. 어른 중의 어른이시죠.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진 것, 내 인생의 경륜과 모든 것으로 자식과 이웃을 위해 거름이 되어 주면, 사실 가족 문제가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는 빈도가 훨씬 줄어듭니다.
부모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첫째는 몸과 마음이 같이 늙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60대인데 마음은 20대'라고들 하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예순 되신 시어머니가 20대 며느리를 보며 20대 마음을 갖고 있으면, 20대 며느리가 경쟁 상대이지 어떻게 딸이 됩니까? 며느리를 사랑할 수 없는 거지요. 아버지가 60대가 되고서도 30대 마음을 갖고 있으면 30대 아들에게 일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아들과 다툴 수밖에 없게 되죠. 우리가 나이 들어 백발이 된다는 것은 잠언서 16장 31절에서처럼 ’영화榮華의 면류관‘을 쓰는 것이거든요. 이건 절대 부끄럽거나 허망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에게 훈장이죠.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이 그만큼 커지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그들을 위한 그늘이 된다는 증거인데, 마음이 늙어 가지 않으려 하면 자기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로 인해 그 가정은 여러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나이가 들어 자식을 품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청지기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종착역이 아니고 단지 통로일 뿐이다. 나에게 있는 것은 떠나갈 때 다 두고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베풀면서 어른이 되어 가면, 그 가정은 정말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공직자 중 한 분이 은퇴하고 나서 예수를 믿고 세례 받은 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 앞만 보며 살다가 이제 멈춰서 나를 돌아보니 “아, 내가 세 가지를 몰랐구나.” 그 첫 번째가 인생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했습니다. '철없이 평생을 뛰어왔구나. 인생이 뭔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좀 알아야겠다. 신을 알아야 나를 알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아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고 했습니다. 평생 아내와 대화 한번 제대로 못 해봤다는 거죠. 아내와 여행도 가고, 애써 대화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가 '베품을 알아야겠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였고 진급하기 위해 짓밟고 올라가다 보니 베품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 세 가지를 통해 바른 어른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거든요.
젊었을 때부터 부모가 어른의 마음으로 나이를 먹고,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 큰 그늘이 되면, 그 그늘의 자식들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믿고 당신의 자녀를 맡겨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가꿔 나간다면, 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는 예외 없이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가정적으로 문제 투성이였지요. 그래서 성경은 한편으로는 인간 타락의 반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누구든 회복되는데, 누가 먼저 회복 돼야겠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식이 아니라 부모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복사판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결국에는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이어령: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짐승과 달리 생식만 하는 유전자적 존재도 아니고, 먹고살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며,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살아가는데, 인간이 추구하는 그 가치가 없으면 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무리일 뿐입니다.
"하늘에 나는 새를 바라, 들에 나는 백합화를 바리, 그런데도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느냐'고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까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로 다들 고민합니다. 먹는 돼지, 새끼 치는 돼지를 넘어 마지막 제례 공간, 가치의 세계가 없으면 집은 '하우스house'이지 ‘홈home'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지적하신 겁니다. 하우스와 홈은 전혀 다릅니다.
하우스는 벽돌로, 홈은 사랑과 믿음으로 지어진 거예요. 아무리 기가 막힌 내 집이 있다고 해도 내 가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우스를 홈으로 만듭니까? 집의 하드웨어에 사랑과 믿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집어넣어야 합니까?
박목월 선생의 문학 속에 나타난 아버지 심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옛날에 쓰여진 이 시를 보며, 가정이 얼마나 변했고, 변하지 않은 요소는 또 무엇인지, 문학으로 보면 이런데 성경으로 보면 어떤지 생각해 보면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年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璧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십구문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가정)
박목월 선생이 아주 옛날에 쓴 시인데 지금도 실감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왜 자기를 십구 문반의 신발로 표현했는가 입니다.
막내는 왜 가장 작은 신발로 표현되었는가, 이것이 가족의 고독입니다. 같은 방에 사는데도 신발은 사이즈가 각기 다르죠. 어머니 아버지, 한 몸 같지요?
부부, 한 몸 같지요? 부부 사이인데, 아내의 신발을 내가 못 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에요. 아무리 가까워도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외로운 실존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아도 틈이 있어요. 어머니가 내 아픔을 대신할 수 있나요? 눈 오는 날, 내가 머리가 아픈데 어머니가 밖에서 늦게 돌아오셔서 이마를 짚어 주지만,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통해 느끼는 것은 내 뜨거운 이마인 거죠. 이게 슬픈 겁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가까운 존재라 할지라도 어머니를 통해 보는 것은 나이지, 어머니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죄이고 실존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외로움입니다.
가족이 완벽하다면, 어머니 아버지 나의 관계가 완벽하다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가인과 아벨처럼 형제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족이기 때문에, 현세적 가치만으로는 가족은 절대 성립되지 않아요. 집 안에 어떤 빛을 들이느냐, 어떤 향기를 들이느냐, 어떻게 튼튼한 삼각형을 만드느냐는 인간의 힘으로는 힘듭니다.
상상력, 직관, 믿음, 또는 저는 문학을 생각해 왔는데, 이런 것들이 가정의 파탄을 뛰어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에서는 서로 다른 문수의 신발이 한 집에 존재하는 역설과 아이러니, 이것을 초월하는 게 '나의 미소‘입니다.
인간은 가인과 아벨 때부터 형제를 서로 죽였습니다. 북한과 남한이 형제간인데 왜 싸웁니까? 아무리 북한이 우리 동포이고 싸우지 말자 해도, 성경 보세요. 인류 최초의 형제가 상대를 죽였잖아요. 이게 현실입니다. 형제니까 사랑해야 하는데 죽였잖아요. 이것이 원죄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우리의 실존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족을 얘기하는 것은, 인간 집단으로 수천 년 됐어도 기본적인 공동체가 끝없이 죽이는 행위를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역사상 한 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화목하지 않았고 그 안에 절실한 문제가 있었어요. 옛날부터 너와 나라는 인간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제대로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드느냐, 기독교에 삼위일체가 있듯 가족 삼각형도 어떻게 서로 소통해서 바른 모양을 유지시키느냐는 문명을 어떻게 회복시키느냐 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저 또한 많은 것을 읽고 그대로 시행도 해봤지만 해답이 없었기 때문에 영성으로 가보면 혹시 마지막 희망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지금 제 심정입니다.
말씀 끝에 영성에서 해결해야 된다고 하신 것인데, 이재철 목사님이 십자가를 지는 격이네요.
이재철: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래쪽에 카멜carmel이라는 예쁜 동네가 있는데, 그곳에 200여 년 된 수도원이 있습니다. 수도원 내 박물관에는 수도사들이 사용한 그릇, 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진열품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그곳을 둘러보다가 벽에 두 켤레 샌들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발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물건에는 그 물건을 쓰던 존재의 인격이 배기 마련입니다. 한 인간의 인격을 우리에게 신발보다 더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발을 보면 그분이 얼마나 피곤하게 살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지요. 신발이 그 리얼함을 더하는 것은, 그 존재가 빠져나간 텅 빈 그 자체가 고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200년 전 그 황량한 벌판에서 수도사들이 저 샌들을 신고 나름대로 예수의 길을 좆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독과 싸웠을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처음 하신 말씀이 “이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으라"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고독한 존재의 고독 자체를 하나님에게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그 고독을 내 사랑, 내 생명, 내 소망으로 채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신발은 고독한 한 실존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
께서 채우심으로 그 신발을 다시 신고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갈 때 그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까. 그 수도원의 신발을 보면서 눈물이 돌았던 것은, 수도사의 고독을 봄과 동시에 그 고독을 채워 주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과 생명을 가슴 진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정말 21세기 현대인들, 다 고독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채워질 수 없는 게 있거든요. 절대 홀로인 존재로 태어나서 그렇습니다. 고독한 존재끼리 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니, 많으면 많을수록 더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으로, 소망으로 채워 가면,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우리 개인의 삶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가정을 통해 사회가 회복되고 시대가 회복되는 것이죠.
이어령: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묻기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했을 때, 예수님은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인이라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강도를 만나 피 흘리고 쓰러졌는데,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가 나를 그냥 지나간다면 그를 이웃이라 할 수 있겠나. 피가 다르고 지위가 다른 사마리아인, 예루살렘에도 못 들어가는 배척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내 상처에 기름 부어 주고 갈증 나는 내 목을 축여 주고 생명을 구해 주었다면, 과연 누구를 내 이웃이라고 하겠느냐?' 하고 되물으셨지요. 그러면 가족이라는 게 무엇인가? 피를 나눈 가족, 생물학적 가족만 가족이라 할 수 없다. 이웃이 가족이다. 이게 공동체다. 그러니 가족이라 해도 피를 흘리고 쓰러졌는데 그냥 지나친다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라 할 수 있느냐'는 거죠. 내가 아파 쓰러졌을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그가 나를 일으켜 주면 그것이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보면, 가족주의에 익숙한 저로서는 너무 화날 때가 있어요. 1백 살 돼서 겨우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그걸 번제로 드리려 합니다. 너무 잔인하잖아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죽이러 데려간 그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지만, 따라가는 젊은이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해 보세요. 성경 인물 가운데 입다는 주님께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평안히 돌아갈 때 제일 먼저 나를 환영하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나이다.” 했습니다. 제일 먼저 기쁘게 맞으려 나오는 사람이 누구였어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 바로 자기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끌고 가서 죽이잖아요.
그런데 더 큰 가족, 진짜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가 혈연으로 맺은 세속적인 가족 이상의 것으로, 그런 가족이 실제 존재하지요. 핏줄만 나눈 가족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혈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제가 쓴 시를 보시면, 믿을 때와 믿기 전의 가족관이 어떻게 다른지, 박목월 선생님 시와 한번 대조해 보세요.
보아라. 파란 정맥만 남은 아버지의 두 손에는
도끼가 없다.
지금 분노의 눈을 뜨고 대문을 지키고 섰지만
너희들을 지킬 도끼가 없다.
어둠 속에서 너희들을 끌어안는 팔뚝에 힘이 없다고
겁먹지 말라.
사냥감을 놓치고 몰래 돌아와 훌쩍거리는
아버지를 비웃지 말라.
다시 한 번 도끼를 잡는 날을 볼 것이다.
2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했을 때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던 최초의 돌도끼.
멧돼지를 잡던 그 도끼날로 이제 너희들을 묶는
이념의 칡넝쿨을 찍어 새 길을 열 것이다.
컸다고 아버지의 손을 놓지 말거라.
옛날 나들이 길에서처럼 마디 굵은 내 손을 잡아라.
그래야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차린 저녁상 앞에 앉을 수 있다.
등불을 켜놓고 보자.
너희 얼굴 너희 어머니 그 옆 빈자리에
아버지가 앉는다.
수염 기르고 돌아온 너희 아버지
도끼 한 자루,
- 이어령, (도끼 한 자루)
아버지가 신의 역할을 하고 싶을 때, 내가 아니면 아이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폭력의 도끼로, 도끼 곧 힘이 없으면, 세속의 힘이 없으면 먹여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능해요. 그때는 예수 믿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시는 믿음이 있기 전 국회의원이나 장군인 아버지를 둬야 집안이 지켜지는 줄 알았을 때 쓴 것입니다. “나는 지금 지켜 줄 힘이 없다. 그러나 봐라. 언젠가 멧돼지 잡던 도끼로 지켜 줄게, 그리고 어머니의 밥상처럼 이 평화로운 가족을 내가 지켜 줄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믿은 것은 도끼라는 무기, 권력, 돈, 힘입니다. “힘없는 아버지, 고개 숙인 아버지가 다시 힘을 길러서 꼭 온다. 수염 기른 아버지, 권위 있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아버지가 아버지 구실을 하지 못할 때의 처절한 슬픔을 끝내기 위해 다시 힘을 되찾자고 하는 것이지, 사랑이나 믿음을 되찾자는 게 아닌 거지요.
믿는 사람은 아주 약해 보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지요.
기독교의 특징이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세속적으로 보면 참 약해 보여요. 또 온유는 관용을 베푸는 것이니까 굴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참 힘이 듭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녀라도 아버지가 근사하게 입고 좋은 차타고 왔을 때 우리 아버지 믿을 만하다. ‘밥은 안 굶겠다'고 생각하기 쉽지, 힘없고 착하기만 한 집사님, 장로님인 아빠가 아이들에게 기도하자고 하면, 아이들이 여간해선 못 좇아가거든요.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우느냐 하는 데서 결론이 나옵니다.
'늑대보다 강한 양을 만들자. 이제는 늑대한테 잡혀 먹는 양이 되지 말자, 늑대하고 싸우다가 되려 호랑이가 되지 말자. 대신 약한 양, 쫓기는 양, 늑대한테 밤낮 목 내미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없어도 내 힘으로 늑대를 이기는 지혜로운 양이 되자' 이게 오늘 같은 험악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의 길입니다. 옛날 성자들처럼 제물로 바쳐지겠다는 믿음, 아무리 하나님 뜻이라 하더라도 가장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믿음만으로는 살기가 참 힘든 때가 왔습니다. 그러니 공부도 많이 하고 기술도 쌓고 연구도 해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렀을 때, 가족이라는 세속 공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신앙이 생긴 뒤 돌아보니, 그 지키는 수단이 도끼가 되어선 안 됨을 느꼈습니다. 무지개나 꿈이나 안개나 무언가를 아이들이 황홀한 눈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게 해야 해요. 도끼 대신 우리 아버지가 손에 무얼 들었으면 좋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이재철: 이 선생님 말씀이 실은 예수님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순결하기만 하면 천치와 다를 바 없거든요. 그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도 하셨습니다. 순결 속에 지혜가 따르고, 지혜가 또 순결하게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자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그런 뱀의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늑대보다 강한 양이 되자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가장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지성인이었고 가문과 혈통도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 배설물이더라. 황제의 길을 갈 때는 굉장한 무기였는데 영원의 길에서는 다 배설물이더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때 순결과 지혜의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가운데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도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길인데, 황제의 길에서 갖고 있던 것들을 도구로 쓰는 것이죠. 그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권력이든 돈이든 힘이든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단지 도구로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그렇게 순결과 지혜의 삶을 산다면, 죽음을 깨뜨리고 살아나신 주님 안에서 언제든지 소망이 있고 새 길이 있으며 새로운 내일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어령·이재철 대담 / 『지성과 영성의 만남』 / 홍성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