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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4 - 세례는 씻는 것이 아니라 캐내는 것

hope888 2022. 4. 2. 10:11

1. 세례는 씻는 것이 아니라 캐내는 것

 

"오늘부터 저는 신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동안 많은 직함을 갖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이제는 그냥 세례를 받은 평범한 한 신자로서 기억해 주십시오."

 

기자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생각지도 않던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 CEO의 포럼에 강연을 하러 가는 거였는데 뜻밖에 세례를 받기 위한 행사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더구나 아프간에서 봉사활동 중이던 신도들이 테러범들에게 납치를 당해 국내외로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치는 그 태풍의 눈 속에서 말입니다. 그때의 내 마음, 생각 그리고 세례 받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이야기를 여기에 모두 다 옮길 수는 없습니다. 각 신문에 난 인터뷰 기사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대로 게재하려고 합니다.

내가 쓴 글씨로 개칠을 하고 싶지 않기에 지금은 색 바랜 신문 스크랩을 뒤져서 그때의 나를 다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2007724일 세례를 받았다.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선교집회인 '러브소나타' 도쿄 대회 현장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평생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지금까지 쌓아온 인본주의적인 작업을 뒤로 하고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크리스천 이어령, 무엇이 그를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떠나게 만들었을까. 세례 받은 다음날인 25일 도쿄 프린스파크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세례 받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세례받기 전과 비교해 삶을 대하는 태도나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제가 참신자가 되어 믿음의 세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세례 자체가 영적 세계에서의 승리의 삶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막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이 졸업 후의 포부를 말할 수는 없는 이치지요. 중도에 낙제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지금 합격통지서를 받은 학생과 같습니다. 아직 입학도 안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도 사역을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해야지요.

솔직히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아직 성령 체험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고 나니 몸가짐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조금만 안 좋은 일이 생겨도 , 이제 핍박이 시작되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동안 온갖 자유를 누리며 살았는데 이제 저를 가두는 벽이 생겼습니다. 제게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인지, 벽이 생겼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인격적인 주님으로 받아들일 결심을 하게 되셨습니까.”

딸 민아(장민아 변호사)는 암과 시력장애, 그리고 아이의 문제를 모두 신앙심으로 극복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피와 살을 물려준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지요. 그동안 딸에게 해준 것이 없었습니다. 일찍 등단하면서 가족들에게 많이 베풀지 못했고 아이들은 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민아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아의 문병을 갔던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저는 처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자녀로 살겠나이다' 라고요.

딸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도 언젠가는 누구나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진짜 기적은 단 하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세례를 받고 영성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해서 과거 지성과 이성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이성의 삶을 살아왔는데 영성을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젊은 시절 제 사진과 지금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사진 속 젊은 사람도 저이며, 여기 있는 일흔다섯 된 늙은이도 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옛 바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속에 묻혀 있던 영성이 이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술가적 기질과 초월적 영성의 기질이 있습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디지로그 를 쓰면서 물질이 아닌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0의 조합으로 영상과 노래, 텍스트가 나옵니다.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는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컴퓨터를 통해 비물질이 메시지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영성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과 접속하면 신양의 세계를 내려 받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예술가로서 저만의 우주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 그 우주를 걷었지요.

 

영성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해서 지성과 이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없어져야 영성이 맑아진다는 태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나 제자들에 비해서 지성과 이성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과 베드로를 모두 쓰셨습니다. 믿는 일이야 고기 잡는 어부들이 낫겠지만 복음 전하는 일은 바울 같은 사람이 더 잘합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바울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이제 바울 같은 전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지성과 이성이 어찌 사도 바울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20대에는 반기독교적인 글을 많이 썼습니다. 지 역시 소설가로서 창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들을 내가 만들겠다는 오만한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뛰어봐야 벼룩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아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창작과 지적 세계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몇 십 배 더 크고 귀한 창조주를 인정함으로써 저의 예술적 지평은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 삶과 관련된 글을 쓸 수도 있겠지요.

 

자기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기 쉽지 않은데요.”

그렇습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 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에 '플런지(Plunge)'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 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세례 받으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평생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영상을 보니 충격적이었습니다. 죄수 같았습니다. 기쁨보다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왜 우는지, 세례 받으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절망한 적은 없지 않았습니까? 딸의 절망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경험은 아니었는데요.”

딸이 남이라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동일합니다. 내가 타인과 동일한 체험을 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딸의 체험은 저의 체험입니다. 저는 딸을 사랑하니까요. 제가 세례와 관련해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 한 이유는 이는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딸의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났다면 사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내게 보편적 사랑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해서도 믿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글 쓰는 사람은 남의 아픔도 내 아픔으로 알고 글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한 글이 나옵니다. 나 혼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 전화를 걸어줘야 휴대전화의 기능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소통입니다. 사실 기독교적 발상은 20대부터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아내가 모태신앙인이었지만 지난날 내가 교회에 가지 않았던 것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신앙과 관련된 좋은 글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도 아끼지 말아야겠고요.”

이제 저는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더 이상 교회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인사이더입니다. 아웃사이더가 하는 말은 비판입니다. 인사이더가 '우리 의식'을 갖고 하는 말은 비판이 아니라 협력입니다. 우리는 '먹어버려’, ’가버려' 라는 말에서처럼 '버리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한국 교회는 버려야 삽니다. 역사상 예수님만큼 많이 버린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믿음은 육상경기에서 그렇듯 모든 것을 벗고 가벼운 몸으로 목표점을 향해 뛰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버리고 나가야 합니다. 버릴 때, 이 땅의 교회는 일상의 가치를 뒤집는 새로운 가치를 이 사회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현재 상황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들은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눔과 사랑, 관용이 충만하다면 한국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 기독교연구소장) 인터뷰 (2007.7.25.)

 

인터뷰를 하고 난 뒤 나는 다시 내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세례란 물로 씻는 의식이 아니라 가슴 깊이 묻혀 있었던 온천수의 뜨거운 수맥을 퍼 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때 흘린 눈물이었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가슴 깊이 파고 들어가면 거기 영

성의 수맥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 열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