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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의 기술 10 - 이야기를 들려줄 최적의 상황은 언제인가?

hope888 2022. 5. 19. 20:05

 

 

 

1. 이야기를 들려줄 최적의 상황은 언제인가?

 

청중을 안다는 말에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내 이야기를 가장 잘들을 수 있는지를 아는 것도 포함된다. 골프를 함께 칠 때인가? 조용한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을 때가 좋은가? 아니면 집이나 사무실이 더 좋은가? 듣는 사람이 과연 어떤 곳에서 내 말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면, 관찰과 경청을 총동원해 그들이 편안하게 생각하는 장소를 알아내야 한다. 언뜻 간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이 점을 절실히 깨달은 것은, 팀 버턴 감독과 함께 <배트맨> 1편을 만들면서 잭 니컬슨에게 조커라는 중심 배역을 맡기려고 무진 노력을 기울일 때였다.

<배트맨>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 회사의 오랜 여정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코믹북을 영화화한 모든 작품의 시조가 된 셈이지만, 당시만 해도 8년이라는 제작 기간에 우리가 마주한 것은 온통 불확실한 일들뿐이었다. 이 영화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태도'였다. 당시만 해도 4천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는 정말 상상을 하는 규모였으므로, 도저히 아이들만 겨냥해서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다. 팀 버턴 감독을 제작자로 초빙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비틀주스>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선보인 바 있었다. 팀 버턴 감독은 바로 그 비틀주스 즉 마이클 키튼을 설득해서 배트맨 역을 맡겼고, 1988년쯤에는 모든 일에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세계 수준의 빌런(악당)을 구하는 일뿐이었다.

니컬슨은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내가 사장으로 있을 때 컬럼비아 픽처스가 제작한 <마지막 지령>, <잃어버린 전주곡>, <토미> 등에 출연했고, 모두가 알다시피 조커 역을 기막히게 해낼 수 있는 배우였다. 그러나 일분일초가 아쉬운 판에 그는 분명히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끌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좋습니다. 팀 버턴을 한번 만나 보죠"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애스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팀 버턴과 함께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니컬슨이 제작자를 만나려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번처럼 감독의 역할이 중요한 영화라면 더욱 그랬다. 우리는 워너사의 비행기를 타고 애스펀으로 날아갔다. 섬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변덕쟁이 팀 버턴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그로서는 애스펀같은 시골이 낯설었을 뿐 아니라, 잭 니컬슨을 사로잡을 스토리를 생각해 내지 못하면 영화가 아예 무산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버턴은 니컬슨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슈퍼 빌런, 즉 안티 히어로의 성격을 띤 복잡한 캐릭터를 창조해 냄으로써 영화계의 혁신을 이룩하겠노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역할의 비중이 아니라 그 역이 얼마나 강렬한 영향을 미치느냐였다. 그런 빌런이 나타나면 관객은 분명히 응원할 것이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널리 회자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니컬슨이 먼저 판을 키웠다. 그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어서는 대뜸 "같이 말 타러 갑시다."라고 했다.

내가 전화기를 내려놓자 버턴이 말했다. "나는 말 탈 줄 모르는데요."

나는 “무조건 타면 됩니다. 가시죠."라고 대답했다.

니컬슨이 버턴이라는 사람을 미리 알아보고 시험하려던 것인지, 아니면 같이 일하기에는 너무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나로서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작부터 거절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상대방이 나를 편안하게 느끼고, 저 사람이라면 끝까지 함께 갈 수 있겠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니컬슨이 사는 애스펀까지 간 마당에 그가 말을 타고 싶다고 했으니 우리도 고집을 버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말을 타야만 했다. 버턴은 자신의 스토리를 전할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선택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버턴은 자신이 탈 말을 앞에 둔 채 '이런 세상에! 차라리 영화 만드는 일이 더 쉬울 것 같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말에 올라탔다. 앞으로는 그가 다시는 말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말을 몰고 니컬슨의 안마당 격인 목초지로 들어서자, 버턴은 열정적인 목소리로 자신과 힘을 합쳐 영화의 역사를 바꾸자고 니컬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 장소, 그 환경은 니컬슨이 버턴의 스토리에 마음을 열기에 딱 맞는 조건이었다. 말에서 내릴 때쯤에는 이미 니컬슨의 마음이 정해진 뒤였다.

 

2.  전립산암 표지자 PSA

 

자신의 스토리를 전하기에 딱 맞는 환경을 찾는 것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시도를 앞둔 마이클 밀컨Michael Milken 에게도 똑같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197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그의 자발적인 헌신이다. 최근 밀컨이 나를 집으로 초대해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해 준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의학 연구 분야의 권위자이면서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지금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내가 운영하는 마이너리그 야구팀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와 나의 관심사가 연결되는 지점이 뚜렷해진 것은 그가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1993년에 저는 46세의 가장이었습니다. 종합검진을 받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서, 전립선암이 있는지 PSA Prostate Specific Antigen (전립선특이항원) 검사도 받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20년이나 암 연구 지원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이 분야는 꽤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나의 절친이기도 한 타임워너의 CEO 스티브로스가 65세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것 외에는 전립선암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내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PSA 검사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결국 내 고집이 먹혔죠. 아니나 다를까…… 저는 전립선암에 걸린 것은 물론, 림프절이 건강한 사람에 비해 무려 100배나 크다는 진단을 받아 들었습니다. 거기다 약 12~18개월 정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제게는 아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있었고, 전립선 때문에 인생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밀컨은 호르몬 요법과 방사선 치료 그리고 공격적인 식이요법으로 병마와 맞서 싸웠다. 식습관을 바꾸고 전통적인 치료법에다 몇 가지 대안요법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몇 개월 후 그의 PSA 수치는 0으로 떨어졌다. 전립선암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증상이 완화되면서 그는 자신의 사명을 뚜렷이 인식했다. 그것은 바로 이 질병의 진로를 바꿈으로써 자신의 오랜 꿈인 의학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밀컨은 유방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속히 확산하는 데 비해 전립선암은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스토리를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중장년 남성들의 PSA 검사율이 증가할 것이고, 그들의 스토리를 통해 메시지가 더욱 전파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스토리를 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은 과연 어디일까?

가장 다양한 세대가 모이는 곳이 어디일까 고심하던 그가 최고의 환경으로 선택한 곳은 바로 야구 경기장이었다. 우선 야구야말로 스토리 그 자체다. 야구라는 경기와 그 장소는 일종의 무대가 되며, 이닝과 이닝 사이에는 스토리를 전하고 들을 수 있는 여백이 있다.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에 집중할 여유도 충분하다. 관중뿐만 아니라, 경기장이나 클럽 하우스에서 뛰는 선수도 마침 남성이 대다수다. 밀컨이 스토리를 전하기에 아주 유리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혼자 말해 봤자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그렇겠죠. 그러나 켄 그리피 주니어 같은 메이저리그 선수가 성인 남성들에게 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한다면, 그 효과는 완전히 다를 겁니다. 게다가 통계상 각 팀의 감독들은 언제라도 전립선암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대개 고령이니까요. 따라서 모든 팀의 감독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로 만드는 것도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전립선암을 앓고 있는 테리 스타인바흐 같은 선수를 내세워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선수에게도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소에도 클럽 하우스에서 선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팀의 시설 담당자나 트레이닝 코치가 나서도 좋지요. 그들이 나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스토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의 주인은 바로 그들이니까요."

밀컨은 곧장 스토리의 슬로건을 만들어 냈다. '야구장의 아빠를 지켜주세요.' 그 자신도 아버지였지만, 세대를 초월한 관중이 모이는 야구장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려줄 최적의 환경이었다. "아버지의 날에 맞춰 대미를 장식하는 이벤트를 마련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6월 1일에 시작해서 아버지의 날(6월 셋째 일요일 - 옮긴이)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 매일 경기장에 방문하는 이벤트를 개최했습니다. 첫해였던 1994년에 우리는 총 열 개 도시를 방문했지요. 그때부터 토미 라소다 Tommy Lasorda (LA 다저스의 전성기를 이끈 유명한 감독 - 옮긴이)가 매년 저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밀컨은 지난 15년 동안 자신의 스토리를 아낌없이 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의 노력이 전립선암과 벌이는 사투에 미친 영향력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1년 중 성인 남성이 PSA 검사를 가장 많이 받는 달은 6월, 즉 아버지의 날이 있는 달이다. 밀컨이 '야구장의 아빠를 지켜 '주세요' 운동을 펼친 이래, 전립선암으로 사망한 남성의 수는 과거 예측했던 수준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더 많은 야구장에서 자신의 스토리를 펼쳐 놓고 있다. 그가 그 이야기를 다음번에는 마이너 리그 경기장에서 하고 싶다고 나에게 제안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편 밀컨은 자신의 스토리를 통해 필생의 사명을 확장하고 있기도 하다. 마이클 밀컨이라는 이름이 주로 금융계를 떠올리게 하는 시절도 있었지만, 2004년을 기점으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경제 잡지 <포천>에 마이클 밀컨의 전혀 다른 면모를 다룬 표지 기사가 실렸다. '의학계를 바꾼 사나이'라는 제목의 그 기사에는 그의 스토리가 야구장에서 아빠를 지켜 낸 모든 과정이 실려 있었다. (피터 거버 / 『스토리의 기술』 / 라이팅하우스). 끝.

 

- 나도 5년 전에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전립선암이 전이가 되어서 척추까지 아프게 되었다.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청천벽력같은 전립선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 그 전까지 PSA검사라는 것도 몰랐었다. 내가 처음 PSA 검사를 받을 때 수치는 139였다. 정상은 4 이하여야 한다는데 말이다. 그 후 나는 내 주변의 친구들, 가족 들에게 혈액으로 간단히 받는 PSA 검사를 받기를 적극 권장하는 사람이 되었다. 5년 이 지날 동안 암 투병을 하면서 항암 12번, 방사선치료 4번 등 지금은 PSA 수치가 0.01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재발이 무서워서 6개월 마다 병원에 가서 PSA 검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아무런 증상이 없는 무서운 전립선암을 예방하기 위해서 PSA 검사를 적극 권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