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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과 아내의 미소

hope888 2022. 6. 11. 10:12

 

요즘 볕이 잘 드는 양지쪽에는 봄을 상징하는 봄나물과 쑥이 탐스럽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쑥으로 쌀가루를 묻힌 쑥버무리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라서 어머니가 봄이면 우리 가족들에게 쑥을 뜯어와 쑥버무리를 해 주셨습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가 되었지만,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봄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생각이 납니다. 마침 아내가 먹고 싶다고 했기에 새벽 동이 트자마자 칼과 비닐봉지를 준비하여 숲이 우거진 양지쪽 언

덕으로 향했습니다. 길옆은 차량이 빈번하게 다녀 매연이 있을까 싶어 길을 피해 언덕을 올라가는데 드문드문 쑥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 비닐봉지를 채울 것 같았는데 1시간 정도 지나고 확인해보니 쑥을 얼마를 캐지 못했습니다. 또한 금방 싫증이 났습니다. 쉬다 캐다 하다 보니 이미 해가 돋아 주위가 환해졌습니다. 3시간쯤 지나서인가 비닐봉지가 반 정도 찼습니다. 생각만큼 쑥이 쉽게 모여지지 않았으나 아내를 위해 지루함을 참아 가며, 가시에 찔려 가며 쑥을 뜯었습니다.

한참이 지나 집에 돌아오니 9시가 넘었습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아내는 무엇 하느라 아침 식사시간에 늦냐며 호통을 치는 듯했습니다. 나는 아무 소리 않고 쑥이 든 봉투를 슬그머니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냐고 하며 열어 보는 아내의 얼굴에서 갑자기 환한 미소를 감추질 못했습니다.

어디서 쑥을 이만큼 뜯었냐며 물어봅니다.

어제 친구 집에서 쑥버무리를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었다며 잠결에 말을 했는데 잊지 않고 뜯어 왔다고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까지 시집을 와 46년간을 우리 식구를 위해 그 숱한 힘든 일을 다 했는데 이것 하나 못하겠냐며 쑥 먹고 나면 또 뜯어 올 테니 맘껏 먹으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잠시 후 아내는 쑥과 쌀가루로 쑥버무리를 만들어 상위에 올려놓으며 "나도 고마운 남편 덕에 호강 한번 해볼까” 하며 손으로 뚝 뜯어 맛을 봅니다.

함께 먹자고 하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이 마치 어릴 때 제가 본 어머니 모습 같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밤낮 쉼 없이 자식에게 맛있는 것 해 주려고 숱한 고생을 하던 그 모습 말입니다. 이미 세월이 흘러 아내도 손주 6명을 둔 칠순의 할머니가 된지 오래입니다. 맘속으로 내년 봄에는 아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쑥을 뜯어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봄쑥을 그리도 좋아하는지를 강산이 네 번이 바뀌도록 여태껏 몰랐으니 어떻게 괜찮은 남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 쑥버무리를 먹으며 환하게 웃는 눈가에 주름이 범벅이 된 아내의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내년은 더 많은 쑥을 뜯어 올 작정을 하면서 부디 아내가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이건원 / 『공무원연금』 2022년 3월 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