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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1 – 밀라논나 이야기

hope888 2022. 6. 13. 15:45

 

 

 

1. 울고 있는 제자에게

 

옛 제자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상하고 초췌해져 있었다.

이유가 있을 텐데 입을 쉬이 열지 못하던 제자는 마침내 오열을 터트렸다. 실컷 울게 가만히 기다려준 뒤 따뜻한 차와 보드라운 수건을 건네주었다.

울음이 잦아들면서 침묵이 흘렀고, 제자는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나를 찾아온 이유를 소상히 풀어놓았다.

살기가 싫고 힘들어서 목숨을 끊으려다가 이제는 마지막이라 생각되어 스승인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사연인즉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병원신세를 졌단다.

그간 각고의 노력 끝에 원하던 조직에서 원하던 위치까지 올라가는 등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재주도 많고 열정적인 사람이 풀이 죽어 있으니 가슴이 더 아팠다.

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중년이 된 제자는 바위처럼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보수적인 시댁은 용돈 액수에만 관심이 있고 남편의 태도는 결혼 전과 백팔십도 달라졌다.

가정 안팎의 온갖 궂은일은 모두 자신이 맡아야 한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외벌이가 아닌 맞벌이 부부라 분명 경제적으로 넉넉한데 이 풍족함을 남편 혼자만 만끽하는 현실에 온갖 회의만 밀려올 뿐이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청탁은 밀려오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날 일은 계속 생기고, 밤마다 업무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하소연을 이어갔다.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나는 제자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제자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조금씩 희미해지는 걸 보며 어떤 답을 들려줘야 할지를 심사숙고했다.

제자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과부하가 걸린 줄도 모르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방향을 잃고 허둥대다가 번아웃이 온 것이다. 이렇게 번아웃이 오면 불면증을 겪게 되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면 번아웃 증상은 더 심해진다.

알코올로도, 신경안정제로도 다스려지지 않으며 우울증이 깊어져 극단적인 상상까지 하게 된다. 작은 걱정을 크게 침소봉대하니,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이유 없이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심지어 부정맥 증상까지 나타난다.

특히 엄하고 까다로운 부모님 아래서 자란 사람일수록 완벽주의 콤플렉스, 전능감 콤플렉스가 작동해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기대를 걸거나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부모님의 기대를 채우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부담감도 커지고, 자기 기대치를 넘지 못했을 때 심한 좌절감도 느낀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제자가 그런 환경에서 컸다는 걸 예전에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제자에게 이런 콤플렉스의 모습이 있냐고 물으니, "어찌 아세요? 점쟁이 같으세요"라고 말하며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아느냐고? 내가 다 겪어봤잖아."

"정말요? 선생님은 항상 당당하시고 자신 있어 보여서 두려움이 없으신 줄 알았어요."

", 그럼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

그렇게 저녁 내내 나의 고군분투기를 제자에게 들려주었고, 이런 조언과 격려의 말도 전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산다는 대명제를 세우라고.

나의 자식, 나의 남편 앞에 ''라는 한 음절이 붙는 건, 내가 존재해야 자식도 남편도 있다는 뜻이라고.

내가 없어지면 나의 우주도 멸망한다고.

조물주가 나를 만드신 뜻이 분명 있을 텐데 죽었다! 생각하고 도리어 살아갈 이유를 찾아보라고.

그 의미를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명 희미한 빛이 나타나고 터널의 끝이 보일 거라고

자신을 들볶지 말고 내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라고.

그러려면 자신의 어깨에 걸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요구부터 먼저 알아차려서 들어주어야 한다고.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아야 타인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자신의 몫이라고.

실패해도 창피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도전한 자신을 칭찬해주라고.

쓸데없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다 보면 내 어깨에 온갖 궂은일이 얹히게 되는 법이라고.

어려운 청탁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지 냉정히 판단하고, 불가능할 때는 담담하고 공손한 태도로 "내 능력 밖이라 호언장담하다가 실수할지 모르니 좋은 관계를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서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해야 한다고.

자식과도 남편과도 시댁과의 관계에도 다 이런 방법을 대입하라고

처음에는 섭섭해할지 모르지만 그런 관계야말로 가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어떤 관계든 내가 선한 의지를 갖고 행동하면 결국 나쁘게 꼬이지는 않는다고.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에 나를 내맡기지 말고, 내 마음부터 따뜻하게 달래주고 품어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게 하는 에너지를 만들라고.

힘에 겨워 넘어지면 넘어진 채로 잠시 쉬어가고, 주변 산천경개 구경하며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나는 제자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몰래몰래 눈치를 봐가며 성심성의껏 진심을 다해 일러주었다.

다행히도 세상 모든 고민을 끌어안은 것 같던 제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평정심을 되찾아가는 듯했다.

그러곤 한번 노력해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며칠 뒤 그 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걷힐 것 같다며, 혼자 완벽하게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중이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고 있어요. '실수해도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잠시 쉬었다가 툴툴 털고 일어나면 돼.' 이렇게 저를 계속 다독이면서 조금씩 힘을 내고 있어요. 내 몸과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느끼고 들여다보려고 노력합니다. 감사합니다. 곧 더 밝은 얼굴로 찾아뵐게요."

제자가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인생이 한 번뿐이라는 게 이럴 때는 참 아쉽다.

첫 번째로 살면서 깨달은 것을 두 번째 태어나 살아가면서 써먹으면,

두 번째 생은 참 수월할 것 같은데

아니다. 그래도 한 번뿐인 게 좋다.

인생을 두 번 살면 힘들고 무서워서 못 살 것 같다. (장명숙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김영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