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캐나다 여행 - 여름

hope888 2014. 2. 24. 11:44

  캐나다 여행기 -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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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23일

   21세기에 들어와서 기후 이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90년만의 극심한 가뭄이 끝나자마자 40년만의 집중 호우가 들이 닥쳐서 물난리가 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눈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 재앙은 우리가 함부로 환경을 파괴해서 생긴 것이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환경을  함부로 파괴하지 말고 자연을 우리 몸처럼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환경이 파괴되지 않도록 말이다.   

  6개월만의 두 번째 캐나다 여행을 위해서 아내와 두 아들이 가지고 오라는 품목들을 챙기면서 한달 정도를 바쁘게 살았다. 라면, 튀김가루, 고춧가루, 책, 은단, 침대보, 베개 등등을 커다란 가방에 가득 넣고서 캐나다를 향해 출발했다.

 오전부터 뇌성번개와 함께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걱정이 된 나는 콜밴을 불렀다. 오후 1시까지 아파트까지 와 달라고 전화했더니 약속시간 15분전에 미리 와서 기다려 주었다.

 다행히 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활짝 개었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콜밴을 타고 인천국제 공항으로 출발했다. 

 

 항공권은 두달전에 미리 사 두었는데 인천과 토론토 왕복 비행기 값으로 1,490,000원이 들었다. 공항을 가는 도중에 콜밴 택시 기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정부에서 콜밴 6인승 택시를  허가해 주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설마하면서 허가해준 콜밴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일반택시 회사가 망할 지경에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정부는 일반 택시 회사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기 위하여 6인승에서 좌석을 떼어 내고 3인승 콜밴으로만 운행하도록 부랴부랴 정책을 입안 중에 있다고 한다.  그 콜밴 택시 기사는 정부에 대해서 매우 불신을 하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나에게 왜 캐나다에 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펭귄 아빠'가 된 내 입장을 말해 주었다. 두 아들의 공부를 위하여 잠시 아내를 캐나다에 보내고 나서 혼자서 살고 있는 내 입장을 펭귄 아빠라고 소개했다. 내 이야기에 이어서 그 기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IMF의 희생물로 전락한 그는 건설회사에서 도장일을 하면서 자그마한 페인트가게를 운영했었는데 부도를 맞아서 다 망해 버리고 현재는 경매에 들어가 있어서 언제 쫓겨 날지 모르는 불안한 자기 아파트에서 두 자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부인의 한달 수입이 50여 만원이고 본인 수입은 100여만원으로써 한달 수입이 150여만원인데 네식구가 살아가는데는 매우 부족하지만 희망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43세인 그 기사에게 캐나다의 이민사를 조금 이야기 해주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캐나다로 유학을 가기 위한 준비로 이번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토론토에 가는 서울의 모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을 보호하게 되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미국으로 불법입국을 하려고 캐나다를 이용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캐나다 입국수속이 매우 까다롭다. 그러므로 그 소년의 보호자들은 나에게 그 소년의 보호자가 되기를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기내에서 나눠주는 입국서류에 영어로 써야하는데 그 소년은 처음 가는 길이라 무척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짐을 찾는 방법과 입국수속 절차를 가르쳐주었다. 열두시간 이상의 지루한 여행을 끝내고 토론토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입국장이 너무 혼란해서 그 소년을 다시는 만나볼 수 없어서 미안했지만 내가 입국할 때의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무사히 통과했을 것으로 믿는다.

 

 

 열두시간 동안의 논스톱 여행 중에 내 옆자리에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아저씨가 검은 가방을 꼭 쥐고 앉아 있었다. 그 분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오로지 검은 가방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그분과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캐나다에 이민을 가는 모양이었다. 그 검은 가방 속에는 자신의 전 재산이 들어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꼭 쥐고 여행하지 않았을까? 덕분에 나는 아주 외롭고 쓸쓸한 비행기 여행을 했다.

 

  토론토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할 때 계류장에서 40여분동안 대기하였다. 토론토 공항이 수많은 비행기로 꽉 차있어서 우리 비행기가 출국장까지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오는 여행객 중에서 60%정도가 캐나다에 정착한다고 하니 많은 한국사람들이 이민, 유학, 취업 등으로 이곳 캐나다에 온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여행객들 속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입국수속을 받았다. 왜냐하면 대답을 잘못하여 세관에 까지 가게 되면 내가 가지고 간 그 많은 짐들을 다 풀어 놓고 하나씩 조사를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되었다. 예쁘게 생긴 캐나다 입국 담당 여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무엇 때문에 오느냐, 며칠간 있을 거냐, 술과 담배는 사 가지고 들어오느냐,  60$ 이상 되는 물건이 있느냐 등등. 심지어는 언제 떠나는지 물어 보고, 그 사항을 확인하기 위하여 내 왕복 비행기표까지 확인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다행히 나는 세관으로 불려가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2$를 투입한 후 카트를 끌어내서 무거운 짐들을 싣고 공항 밖으로 나서니 수많은 환영인파들 속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뜨거운 포옹을 했다. 두 아들은 더욱 늠름해졌고 내 아내는 더욱 세련되어 있었다. 두 아들의 키가 벌써 180cm가 훨씬 넘는 사내 대장부들이 되어 있었다. 아내의 차인 Ford Taurus(3000cc)를 타고 한밤중의 캐나다 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서 한국에서 가지고온 사랑의 보따리를 하나씩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7월 24일

  토론토의 야경은 정말로 멋이 있었다. 어제 저녁에 나는 석양의 토론토 시내를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따라서 멋진 집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일렬로 듬성듬성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부러워 했다. 이렇게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참으로 행복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는 아내와 함께 '제임스 가든'이라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제임스'라는 사람이 평생을 가꾼 정원을 주정부에 희사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제임스 가든'이라고 명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입장료 한푼도 내지 않고 자기 집처럼 마음대로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이다.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듯 고풍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진, 세월이 덕지덕지 낀 공원이다. 고사목이라든지 수만 년의 낙엽들이 썩어서 검은 부식토로 이루어진 푹신푹신한 오솔길이 우리를 반겼다.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가족, 개와 한가로이 산책을 하는 노부부들이 가끔씩 우리 곁을 지나면서 반갑게 '하이!' 인사를 하면 우리도 즐겁게 응답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커다란 빵 덩어리를 들고 다니면서 조금씩 떼어서 다람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험버강'은 이른 아침의 신선한 햇살을 반짝이면서 나의 캐나다 방문을 환영하는 듯 했다.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풍경 속에서 벤치에 나란히 앉은 우리 부부는 두 손을 꼭 잡고 서로 사랑을 고백하였다. 아내는 나의 모든 것, 나의 영혼까지도 사랑한다는 뜨거운(?) 고백을 했다. 나도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노라고 고백하는 등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양육하라고 주신 선물이자 기업인 두 아들을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아침밥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뿍 담긴 큐티(Q.T) 및 가족 예배를 드린후 맛있게 먹었다.

아내는 주 3일을 아르바이트한다고 한다. 캐나다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아내가 몹시 고마웠다.

  

  아내는 어린이들을 위해 자원 봉사자로 한글 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봉사를 하고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한다.

  아내가 아르바이트를 나간 후 우리 세 남자들은 각자가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내적 치유의 실제"라는 책을 가지고 독서 삼매에 빠지고 두 아들은 컴퓨터 학원 숙제와 영어 에세이 학원의 과제를 해결하느라 서로 바빴다.

 

7월 25일

 우리 부부는 새벽 기도를 하러 '큰빛교회'에 갔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핸들을 잡은 내 손은 떨렸다. 그러나 한국에서 15년 무사고 운전 경력이 어디 가겠는가? 힘이 넘치는 커다란 차를 타고 토론토의 새벽을 깨우며 신나게 달리는 그 기분은 매우 좋았다.

  

  새벽 5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새벽기도에서 '신명기'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두 아들을 위해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아내는 다시금 아르바이트를 가고 우리 남자들은 다시금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저녁에 우리 부부는 또다시 저녁 수요 예배에 참석했다. 새벽 기도에서는 서로 기도를 하느라 만나뵙지 못했던 임현수 목사님을 반갑게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임목사님과는 지난 겨울방문때 스키장에서 함께 뒹굴며 사귀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이다.

 

   수요 예배가 끝난 후 많은 교우들이 나를 환영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교회 옆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세상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야기 도중에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캐나다 교민들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았다.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애국자들이 되는 모양이다.

 커피 한잔과 빵 하나가 3$(2,500원)정도 했으며 매우 맛이 있었다.

 

  나는 캐나다의 운전 규칙들을 조금씩 알아갔다. 캐나다의 운전 체제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이곳은 좌회전 신호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운전자들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운전을 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좌회전 차량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빨간신호일 때에는 절대로 진입을 하지 못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지만 요즈음은 빨간 신호일 때에도 튀어나오다 사고가 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주정부에서는 네거리에 빨간신호 위반 차량을 적발하는 카메라를 장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반 차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곳의 교통체제는 우리나라보다는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오래 살고 있는 교민들에게 내가 이곳의 교통체제에 대해서 불평을 하니까 본인들은 불편함을 잘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이곳에 동화되어서 일 것이다. 그리고 시내 주행속도는 우리나라와 같이 시속 60km이다.

  캐나다에서는 초보 운전(?)인 나는 좌회전을 할 때마다 엄청난 신경을 써야 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지하 차고에 들어 갈 때에는 차고 앞에 있는 '센서'에 주차 카드를 '스캔'하면 차고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주차장에 들어가서 각자의 고유 번호가 적혀 있는 주차공간에 주차하고 난 후 또 다른 열쇠로 아파트 현관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는 열쇠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자동차 열쇠도 3개나 된다. 문을 여는 열쇠, 시동을 거는 열쇠, 뒷 트렁크를 여는 열쇠가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이곳 사람들은 항상 열쇠 뭉치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우리 집은 한달 임대료가 1,135$(약 950,000원)를 내고 사는데, 이 임대료에는 전기세, 냉온방비, 수도세, 수영장 이용료, 헬스 이용료가 다 포함되어 있다, 다만 세탁기 사용료는 한번 사용하는데 1.50$(1,300원)을 내야만 한다. 집에는 붙박이장이 각 방마다 있고 방이 두 개이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작동되며 냉장고, 전기 레인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캐나다의 날씨는 지금이 한창 더울  때로서 너무 햇빛이 강렬해서 살갗이 타고,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써야 하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가을 날씨같이 선선하다. 그리고 장마가 없는 건조한 기후로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한낮에도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다. 또한 모기와 파리가 거의 없어서 여름을 나기는 참 좋은 곳이다. 토론토는 북위 43.5도에 위치한 고위도 지방이기 때문에(인천이나 서울의 37.5도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날씨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고, 해가 저녁 9시가 되어야 진다. 다시 말해서 여름에는 낮이 무척 길다.

   

 

7월 26일

 오늘 아침에도 내가 운전을 해서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 큰빛교회에 갔다. 교회에서 두아들을 훌륭히 키울 수 있도록 우리 부부에게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 두 아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는 기도도 드렸다. 새벽 기도 후에 우리 부부가 참석하는 "가정교회"의 권사님과 함께 커피전문점에 가서 약 2시간 가량의 담소를 즐겼다. 그분은 25년 전에 캐나다에 이민을 와서 말할 수 없는 고생끝에 지금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고 두 자녀를 훌륭히 키웠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큰아들은 컴퓨터를 전공해서 지금은 대기업에 스카웃 되어 근무하고 있는 유능한 총각이고 딸은 회계사로 교민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두 분은 큰빛교회에서 장로님과 권사님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담담히 말씀하시는 그분이 존경스러웠다.   빵과 곁들인 커피를 맛있게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두 아들의 컴퓨터 학원으로의 '픽업'을 위해서 시내로 나갔다. 두 아들을 컴퓨터 학원에 내려 주고 난 우리는 학원 근처에 있는 커다란 '쇼핑몰'에 가서 물건들을 샀다. 특히 숯불용 '바베큐' 도구를 샀다.

   

  두 아들은 컴퓨터 학원에서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포토 샵' 등을 배우는데 한달 수강료가 600$(50만원)이다. 캐나다는 컴퓨터 산업이 크게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고급 인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으로부터 많은 젊고 유능한 I.T(Information & Technology) 인력을 취업시켰지만 그들은 거의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한다고 한다.

 영어가 안되고 풍습이 다르며,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이곳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70-80% 라고 한다. 이제는 문화라는 지식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때가 된 것이다. 나도 두 아들에게 캐나다의 문화를 위하여 열심히 캐나다 친구들을 사귀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학원 강습이 끝나고 우리 가족은 맛있고 값이 싸다는 중국식 '뷔페'를 찾아 나섰다.

 1인당 7$(6,000원)정도인 '뷔페'에는 많은 동양인, 서양인, 흑인 등 다양한 손님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새우와 홍합, 그리고 생선 종류를 많이 먹었다. 아마도 내가 먹은 새우만 해도 내가 낸 요금보다 더 먹었을 것이다. 두 아들은 면 종류와 라이스 종류를, 아내는 과일 종류를 배부르게 먹고 우리는 행복했다.

 집에 오는 도중에 한국 가게인 "풍년식품"에 들러서 'LA갈비'를 샀다. 이곳의 고기 값은 엄청나게 싸다. 그리고 쌀도 우리나라의 1/3 정도의 가격에 미국의 '칼로스'라는 쌀을 사서 먹을 수 있다. 미국의 쌀은 매우 찰지고 밥맛이 좋다. 이러한 값싼 쌀이 한국에도 몇년 안에 관세없이 들어오는데 80kg 한 가마에 2만원 정도이 우리 농부들은 미국의 쌀과 경쟁이 되지 않아서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다. 현재의 쌀 가격으로 친다면 1/8가격의 미국 쌀과 경쟁을 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어서 빨리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무한 경쟁 시대를 대비하여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시내 곳곳에는 너무나 뚱뚱해서 바라보는 내가 숨이 찰 정도의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들이 더 뚱뚱한 사람이 많다. 한국의 뚱뚱한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무척 위로가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모두 다 날씬하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 남자들은 어디든지 웃통을 벗어버리고 잘도 다니는 것이 신기한 풍경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어서인지 서로 좋으면 어디서든지 껴안고 키스를 하기도 하는 그들을 동방예의지국에서 날아온 나에게는 너무 낯선 풍경이고 어색했다. 날씬하고 인형처럼 예쁜 여자보다는 거의 대부분이 뚱뚱한 사람 일색이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노인들이 많이 돌아 다녔다.  사회복지시설이 완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노인 천국에다 장애인 천국, 여인들 천국, 어린이 천국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지옥"인 나라이다. 남성들은 죽어라 일을 해야 가족들을 부양하고 세금을 내고 노인들을 부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캐나다는 어디든지 짙은 녹색의 숲과 강이 있고 공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새와 다람쥐가 뛰어 노는 자연 그대로의 "환경 캐나다"이다.

 우리 가족은 늦은 저녁에 집에 도착하여 베란다에서 LA갈비 '바베큐'를 즐겼다. 숯불 갈비의 담백한 맛이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7월 27일

 아침 일찍 진지한 가족회의를 열었다. 캐나다의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텍사스로 이주하는 것에 대한 회의였다. 미국 한인 교회에서 세계 선교를 위해 텍사스에 기숙학교를 세웠는데 아내가 그곳 학교에 '카운슬러'로 스카웃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국제 카운슬러" 자격을 갖춘 지성에 20여년의 교직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진지하게 그 문제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눴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응답을 받기로 했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두려움이 없이 담대히 나가기로 했으나 결정을 보류했다. 그리고 내일의 1박 2일의 '인디언 축제 여행' 스케줄을 의논했다.

 
 

7월 28일

 새벽기도후에 교회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미역국을 먹은 우리 가족은 1박 2일의 가족 캠핑을 떠났다. 우리 일행은 한국에서 관광차 온 남매 대학생 둘과 그들의 이모, 그리고 우리 4가족과 관광 '가이드' 이렇게 8명이다. '가이드'인 김집사는 지난 겨울에도 우리들을 '나이아가라' 관광을 안내해 주신 분으로 이번에 새로운 '벤 자동차'를 장만해서 많은 사람이 관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루스 반도' 최북단에 위치한 '토버머리'가 우리의 목적지이다. 'JOY'(예수님과 함께)여행사의 대표이신 김집사의 안내로 9시에 토론토를 출발해서 '휴런호'와 '조지안 베이'의 한가운데 있는 '토버머리 레저타운'으로의 여행길은 장장 4시간이나 소요되는 먼 길이다.

  

  나는 지난 겨울방학 때 '호스 슈' 스키장에 갈 때 망망대해 같은 설원을 달려 보았는데 이번에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원시림 숲속을 달렸다. 우리는 도심을 벗어나는 '하이웨이'를 타고 북쪽으로 힘차게 올라갔다.

 한참 달리다 '하이웨이'를 벗어나서 짙은 녹색의 대평원을 달렸다.  듬성듬성 노랗게 익은 밀밭과 계속적으로 연결되는 목장들이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목장에는 이번 겨울철을 대비해서 목초를 준비해 놓은, 영화에서 본 둥그렇게 말아 놓은, 어마어마하게 쌓아 놓은 건초 더미들을 바라보면서 달렸다. 목장에는 검은 소, 누런 소, 흰 소와 함께 잘 생긴 말들과 염소들이 함께 어울려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가 간 캠핑장은 '인디언 마을'이 있는 곳으로 오늘 저녁에 인디언 전통 축제가 있다. 이번 여행은 인디언들과 하룻밤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생활상을 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뜻깊은 '가족캠핑'인 것이다. 도중에 '오렌지빌'이라는 곳에서 간단한 요기와 커피를 마신 우리는 옆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가 귓속말로 '인디언'이라고 하니까 내 아들 현규가 인디언이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니까 "First Nations"라고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두 아들로부터 캐나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일행은 또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대학생 남매는 유학 오고 싶어서 캐나다와 미국을 돌아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고 그의 이모는 남편의 직업이 은행원인데, 한국에서의 '비전'이 불투명해서 이민을 생각하여 함께 배낭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과 그들은 좁은 공간인 차 안에서 몇시간을 이야기 하다보니 무척 친해져서 즐겁게 담소하면서 스스럼 없이 서로 여행을 즐겼다.

  끝이 보이지 않게 곧바로 뻗어있는 아스팔트길을 시속 8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많은 차량들의 꽁무니에는 '모터보트'가 달려 있거나 자동차의 지붕 위에 '카누'나 '카약'이 묶여 있거나 했다. 이동식 집이라는 '비-클 하우스' 차량도 많았고 그 차량들 사이에 검정색 가죽 옷으로 차려 입은 멋진 오토바이 족들도 함께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주일에 6일을 죽자 살자 열심히 일해도 여유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항상 삶에 찌들며 살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5일간만 일해도 어떻게 이렇게 여유 있게 생활하는지 그 비법을 알고 싶었고, 속으로 몹시 부러웠다.

  이곳 사람들은 '모터보트'를 가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캐나다에는 어디를 가든지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수많은 물고기들이 그들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4시간의 기나긴 드라이브 후에 우리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인 '토버머리'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 둔 통나무집인 '캐빈' 3개와 '인디언 텐트' 하나에 각각 짐을 풀었다.

 '캐빈'은 처음보는 신기한 인디언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어서 우리들을 섬뜩하게도 했다. 이곳 '토버머리' 일대를 제대로 구경하려면 1주일 정도가 소요될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하룻밤을 같이 하기로 한 인디언 마을 이름은 "Che Mao Zah"라는 곳이다.

   

  그 곳에서  준비해 간 컵라면으로 간단한 요기를 한 후에 캐나다에서 물이 맑기로 유명한 '토버머리' 항구로 구경을 같다.  돛대가 유난히도 높은 수많은 '요트'와 다양한 크기의 '모터보트'들, 그리고 다양한 인종의 관광객들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수영을 할 수 있으며 모래 입자가 섬세하기로 유명하다는 백사장을 밟아보기 위해서 "Dorcas Bay" 해양국립공원에 갔다. 간단한 반바지 차림의 우리들은 세밀한 모래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넓은 백사장을 거닐면서 이국의 정취에 취했다. 날이 차가워서 목욕은 하지 않고 맨발로 호숫가를 거닐면서 만족을 했지만 캐나다인들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추운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백사장 한편에 노랗게 피어있는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면서 예쁘게 피어 있어서 한국에서 온 여대생과 이모되는 사람이 꽃송이를 꺾었다가 공원 관리원에게 혼이 났다. 한참 혼이 날 때 하필이면 경찰들이 순시하기 위해 오는 바람에 두 여자들은 잔뜩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두 아들이 영어를 할줄 모르는 두 여자분들을 위해 통역을 해 주면서 잘못을 인정하고 풀려나면서 몇 개의 꽃송이를 기념으로 받아 든 두 여자는 너무나 놀라고 창피해서인지 차 안에서 통곡을 했다.

 캐나다는 "환경 캐나다"를 목표로 모든 법이 환경 친화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 파괴도 용서를 하지 않는다. 야생화 한 송이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낚시를 할 때에도 허가를 얻어야 하고 하루에 단 두 마리만 가지고 올 수 있도록 엄격하다.   낚싯줄을 강에 던지면 곧바로 올라오는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이지만 말이다.  이곳에서는 낚시의 즐거움만 느끼고 다시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녁에 통나무집 앞의 캠핑장에서 준비해 간 LA 갈비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매우 맛이 있고 운치가 있어서인지 꽃송이 때문에 혼이 난 두 여자들도 즐거워했다. 한쪽에서는 '캠프파이어'가 이글거리고, 우리 주변에서는 '인디언'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신나게 춤을 추며 북소리에 따라  현란하게 몸을 움직이는 춤사위에 우리들은 한껏 기분이 상기되었다. '인디언' 음식도 사서 먹어 보았다. 향료를 전혀 쓰지 않아서 매우 담백한 통밀로 만든 빵과 옥수수, 감자, 그리고 통닭구이 등이 인디언 음식이었다.

  배가 부른 우리들은 인디언 전통 축제에 참가했다. 큰 북과 작은 북, 그리고 다양한 인디언 악기들을 치면서 즐거워 했고, 뚱뚱한 '인디언' 여자가 선창하면 따라서 하는 인디언 노래와 춤의 한마당 한 복판에서 우리는 막춤을 추면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들은 모두가 인디언이 된 기분으로 한껏 뛰며, 춤추며 노래 불렀다.

  주변은 마치 곰이 나올 것 같은 적막한 숲속에서 '인디언 텐트'들을 배경으로 힘차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아서,서서 신나게 놀았다. 밤이 깊어가고, 장작불도 사그라질 때 우리들도 지쳐서 하나 둘씩 통나무집과 천막으로 사라졌다.

 잠을 자면서 인디언들에게 다급하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우리 부부는 2인용 캐빈에서 통나무의 은은한 향기와 태고의 숲이 품어내는 신비한 향을 맡으며 우리들의 머리맡에 있는 액자 속의 무섭게 노려보는 '인디언 추장'의 보호 하에 깊은 잠을 잤다.(두 아들이 '인디언 추장' 액자가 무서워서 우리와 방을 바꾸었다.)

   

7월 29일

 오늘은 주일이라서 일찍 일어난 우리 가족은 함께 모여서 가정 예배를 드렸다. 깊은 숲속이라서 교회가 없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두방울 비가 왔다. 우리는 무척 실망했다. 무인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희망으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비가 오면 모든 일정이 취소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토버머리' 항구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행히 비는 개었다.

 우리가 탄 배는 밑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강바닥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물이 맑아서 마치 거울 같이 환하게 밑을 내다 볼 수 있었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배 위에서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니 마치 망망 대해에 온 느낌이었다. 분명히 호수인데도 말이다.

 수평선 위에는 점점이 떠 있는 아름다운 섬들이 많았다. 너무나 경치가 아름다워서 이곳을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무인도 중에서 특히 경치가 아름다운 '플라워포트'라는 곳에 가는 것이다. 여객선이 섬에 접안을 할 수 없어서 '모터보트'로 갈아탔다. 노란 구명 조끼를 입고 엄청나게 흔들리는 조그마한 모터보트를 타는 즐거움은 여행 보너스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무인도에서 우리들은 가지고 간 라면과 갈비를 요리해서 먹었는데 지나가는 캐나디언들이 냄새가 너무 좋다고 한마디씩 주고 받으며 지나갔다. 우리들은 같이 먹자고 권하면 한사코 사양을 하면서 맛있게 먹으라고 하면서 지나갔다.  참으로 유쾌한 사람들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며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우리의 파티장에는 다람쥐와 갈매기도 동참했다. 우리들 주변 가까이 와서 혹시나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바라보는 그들의 눈망울이 예뻤다. 그들은 우리들을 도무지 무서워하지 않았다.

  

   점심 후에 우리들은 원시림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섬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세월의 연륜이 쌓이다 보니 오솔길은 온통 낙엽이 쌓이고 썩어서 마치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한 감촉이 묻어 났다. 하도 신기해서 조금 파보니 낙엽들 속에 부식토들이 검게 변해서 겹겹이 쌓여 있었다. 우리들의 발자국은 마치 발바닥에 스프링을 단 것처럼 푹신푹신해서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여기저기에는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들이 마치 숲속의 요정처럼 자신의 자태를 숨기듯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너무나 숲이 울창하고 고사목들이 많아서 마치 아주 오랜 옛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한참 가다보니 'Flower Pot'가 나왔다. 억겁의 세월을 견디어 오면서 비바람과 폭풍우과 해일 등이 합작으로 만들어 낸 자연의 조각품을 감격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한 송이 꽃같은 형상이라서 이런 이름이 지어졌나 보다.

 

   많은 사진을 찍고, 우리는 수영을 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2시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수영 한번 못하고 '모터보트'를 타고서 유람선에 돌아왔다. 우리가 탄 유람선은 '패덤 파이브' 해양 국립공원을 유람했다. 이곳은 지형이 아름답고 독특하며 19개의 섬이 포함된 수상 공원으로 공원의 경계선 안에 19세기 말 침몰된 것으로 보이는 20여척의 난파선이 물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우리들은 유리로 된 배 밑바닥을 통해서 난파선들을 구경했다. 물이 마치 수정 같이 맑아서 세계의 '스쿠버'들이 한번쯤 꼭 와보고 싶어하는 이곳에는 많은 예비 '스쿠버'들이 '스쿠버' 장비를 매고 강습을 받는 모습이 많이 띄었다. '토버머리' 항구로 돌아오는 유람선상에서 나는 두 아들을 차례 차례로 불러서 아빠로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두 아들은 모두다 다소곳이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나는 두 아들에게 어디에서든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항상 남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해주며 겸손하기를 주문했다.  마지막에는 꼭 껴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축복 기도를 해 주었다.

  

  두아들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유람선 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가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하나님이 축복을 듬뿍 주신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토버머리' 항구에서 우리들은 '브루스' 국립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호수 주변에 끝없이 이어지는 석회암의 풍광들이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곳은 남부 '온타리오'에 남아 있는 원시림 중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조지안 베이' 연안을 따라서 산책을 했다.  호수를 따라서 이어지는 '나이아가라 단층애'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하늘색 물 위로 '패덤파이브' 해상공원의 섬들이 멀리 수평선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달리는 하나의 요트처럼 보여서 보는 이의 마음을 한가롭고 평화스럽게 해 준다.

 

 토론토를 향해서 한참을 달려서 내려오다가 이름이 멋있는 어떤 '베이'에 갔다. 그러나 항구에 식당이 없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항구인데 식당이 하나도 없다니 놀랄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관광지마다의 무질서한 식당을 생각하면서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을 재촉해서 내려오다가 '위아톤'라는 항구에 도착해서 '쇼핑 몰'에서 우리들이 먹고 싶은 음식들을 사서 '위아톤' 항구를 바라보면서 야외 식탁에 앉아서 즉석 '뷔페'식 점심을 풍족하게 먹었다. 점심을 다 먹어 갈 때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산성비가 아니기 때문에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그대로 맞는다고 해서 우리들도 그냥 비를 맞았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에는 수많은 '비-클 하우스'가 있었다.  이러한 이동식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여름이면 경치 좋은 호숫가에서 살고 겨울이면 좀더 따뜻한 남뽁으로 이동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식 '하우스' 옆에는 거의가 '모터보트'도 있었다. 모터보트에는 어김없이 낚시 장비가 되어 있었고......

  이곳에는 '오토바이' 족들도 많다. 어제 저녁에 우리가 잠을 잔 '캐빈' 옆에는 거대한 '오토바이'를 타고 온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어마어마하게 큰 '모터사이클'이 너무 멋이 있어서 자꾸만 눈이 가는 그런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그들은 '캠프파이어' 곁에서 왼종일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몸에 꼭 끼는 가죽옷을 입고 요란한 헬멧을 눌려 쓴 오토바이 족들이 굉장한 굉음을 뒤로하고 힘차게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잠깐 동안의 소나기가 멈추고 다시금 햇빛이 찬란하게 온 대지에 골고루 쏟아 부었다.  

 토론토에 가까이 오니까 차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후에 일행 한사람이 추워해서 아내는 집에 데리고 와서 두툼한 '재킷'을 빌려 주었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난 후에 우리는 부랴부랴 가정 예배에 참석했다. 25년전에 이민와서 정착해서 살고 있는 정장로님 댁에 방문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 맛있는 불고기로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성경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정 예배에는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 최전도사 부부와 우리 4가족, 그리고 아내의 대학교 동창생인 김집사님과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하기 위해 잠시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할아버지 등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서로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기도가 끝난 후 우리가 사가지고 간 수박으로 '디저트'를 먹고나서 지하에 있는 '칵테일' 바로 내려갔다. 그곳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도록 한껏 멋을 내서 꾸민 자그마한 술집이었지만 장로님이  이 집을 사서 '커피 룸'으로 개조했던 것이다. 은은한 조명아래에서 맛있는 커피를 들면서 우리들의 고민거리인 미국 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장로님 부부는 미국 행을 반대했다. 미국은 서울 인심이라면 캐나다는 대전 인심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의 차이점을 이야기 해 주었다. 우리 부부가 모르는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깊은 고민에 빠져 버렸다. 우리가 내려야 할 결정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을 받기로 했다.

오늘은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 날이다.

   

7월 30일

 5시에 기상해서 새벽 기도에 갔다. 이곳은 5시 30분부터 새벽 기도가 시작된다. 새벽 기도에서 우리 부부는 우리의 미국 행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어 보았다. 이때 내 마음에는 하나님께서는 캐나다에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 와서 미국 행을 고집했던 현규를 설득했다. 대행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서 현규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아내가 두 아들을 컴퓨터 학원에 '픽업'해 주고 나는 집에 남아서 여행기를 쓰거나 TV를 보면서 소일했다.

 

 

7월 31일

 오늘 새벽 기도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마 5;5)의 말씀으로 강론을 들었다.

애통하는 자는 정적인 면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지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것도 배웠다.

 집에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우리집 주변의 공원을 산책했다. 이곳의 공원은 다 '테마'가 있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바라다 보이는 공원은 갈매기들이 가끔 휴식을 취하는 잔디 축구장겸 시민 휴식 공간이고 그 옆 공원은 '스포츠 공원'으로 '라이트' 시설이 완비된 4면의 테니스 코트장과 그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공원이다. 그 공원을 따라서 연결된 새로운 공원은 거대한 원시림이 우거진 산림욕을 하는 공원이다. 자그마한 하천을 따라서 끝없이 펼쳐지는 원시림은 금방이라도 곰이 나타날 것 같이 그윽한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곳의 지표면은 편마암 층이라서 꼭 톱으로 바위를 반듯하게 켜켜이 켜 놓은 것 같이 아름답게 정돈된 납작한 바위들로 되어 있는 하천길을 따라서 명경지수와 같은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강가 주변에는 억겁의 세월의 누더기를 둘러 쓴 고목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길을 따라서 휘파람새와 함께 휘파람으로 합창을 하며 즐겁게 산책을 했다.

  

  공원 옆에 멋있는 집들이 있어서 구경을 했다.  개인 테니스장 겸 농구장이 있고, 그 위에는 풀장이 있으며 수영장에 붙어 있는 뜀틀에서는 자연 폭포 같은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고, 수영장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동화 속의 집 같은 대 저택 앞에는 파란 잔디밭에서 청솔모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우리 가족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탄 나는 조금 겁이 났지만 잠시 후 안정이 되었다. 나이아가라로 가는 길은 안내판이 잘 갖추어져서 어렵지 않게 찾아 갈 수 있었다. 토론토에서 약 106km의 거리에 있는 나이아가라는 시간으로는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우리가족은 지난 겨울 나이아가라를 구경한 경험이 있지만 여름철의 나이아가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웅장한 규모에 다시 한번 감격을 했지만 두 아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30여분을 더 기다려서 탄 유람선은 미국 폭포와 캐나다 폭포를 따라서 운행했다. 우리들은 비옷을 입고서 물보라를 뒤집어쓰면서 구경했다. 온 몸이 흠뻑 젖는 것도 불구하고 연신 감탄사와 함께 '셔터'를 눌러댔다. 이제야 두 아들도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마치 우뢰가 치는 것 같은 엄청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는 느낌은 정말로 대단했다.

    

 '안개호'에서 하선한 우리 가족은 폭포 횟집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은 비교적 위치가 좋아서 손님이 많았다.  나이아가라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무척 많다. 명실 상부하게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것이 또다시 실감되었다. '토버머리'를 관광할 때에도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으니 말이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후 우리들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환상적인 야경을 보기 위해 파란 잔디밭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들은 벤치와 풀밭에 앉아서 인생 이야기와 성경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두 아들에게 아빠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심심해지면 지나다니는 관광객들을 구경했다. 인도인과 유대인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또한 미국 국기를 단 관광 버스들이 나이아가라 강을 연결한 '레인보우' 다리를 건너서 이곳 캐나다 땅까지 왔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들 중에는 한국인이 꼭 몇 명씩 끼어 있었다.

  

  우리는 잔디밭을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하고 엎드려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청솔모, 다람쥐와 까마귀, 그리고 갈매기들과도 함께 놀기도 했다. 동물들은 도무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갈매기들과 다람쥐들이 먹이를 달라고 우리들을 쫓아 다녔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우리들은 자연 속에서 행복했다.

 우리 가족은 미국 행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캐나다에 남을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의논했다. 나이아가라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만장일치로 캐나다에 남기로 결정을 보았다.

  저녁 9시가 되어서 나이아가라 폭포는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시시때때로 색깔이 변하는 "조명등"의 조작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는 변신을 끊임없이 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그 모습을 바꿀 때마다 환성과 한숨으로 화답을 했다.

  실컷 구경을 한 우리 가족은 늦은 11시경에 나이아가라를 출발해서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는 정말로 즐거웠다. 그리고 우리들의 걸음 하나 하나 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8월 1일

  오늘 새벽 기도의 제목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이다. 나는 하나님께 내 머리털보다 더 많은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십사고 참회하며 기도드리고, 나에게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집에서 여행기를 어느 정도 컴퓨터에 입력한 뒤에  두 아들의 컴퓨터 학원으로의 '픽업'을 하는 중에 중국식 '뷔페'에 들렀다. 오붓한 외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값싸고 맛이 있다는 '뷔페'식당을 찾아서 고속도로를 타고 30여분이나 달렸다. 1인당 7.50$로서 엊그제의 '뷔페'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다양한 음식과 정갈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곳에서도 한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나는 새우 요리 같은 해산물을 많이 먹었다.

 두 아들이 컴퓨터 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배우는 2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즐거운 쇼핑을 하였다. 이곳의 '쇼핑몰'은 한국의 'E-마트' 같은 곳으로 그 규모가 우리나라보다 더 크다.

   

   이곳에서의 운전은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기 때문에 조금 불편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곳의 차들은 시동을 거는 순간에 전조등이 켜진다. 그러므로 모든 차량이 밤낮으로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 진풍경이 벌어지는데 낮에도 전조등을 켜고 달리면 교통사고가 현저히 줄어든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는 도입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이곳에서 운전을 하면서 가금씩 전조등을 켜지 않고 운행하는 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 차량보다는 눈에 빨리 띄지 않았다. 그리고 방향 지시등이 우리나라는 노란색 일색이지만 이곳의 차량은 거의 대부분이 빨간색이라서 브레이크등과 구별이 쉽지 않아서 아쉬웠다. 또한 좌회전 신호가 별로 없기 때문에 좌회전은 '비보호좌회전'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인지 모든 도로에는 안전 지대가 도로 한복판에 다 있다. 이 안전 지대는 우리나라의 중앙선 구실을 하는 곳이다. 좌회전을 하는 차는 일단 안전지대에 진입해서 조심조심 오른쪽으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좌회전 신호가 없어서 신호 체계가 우리나라보다 빠르게 변하지만 그 대신 모든 차량 운전자들은 잔뜩 긴장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직진을 하는 차량의 운전자라 해도 죄회전 신호로 대기하고 있던 차가 언제 뛰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 교통 체제인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피곤한 교통 체제이다. 나는 한국의 교통 체제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통 안내판이 너무나 작아서 야간이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시원한 교통 안내판이 그립다.

   

  저녁에 수요 예배에 갔다. 먼저 해외 단기 선교를 다녀온 사람들의 간증이 이어졌다. 중앙 아시아로의 집중적인 단기 선교 활동을 '큰빛교회'는 계속하고 있다. 선교 활동을 하고 돌아 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간증했다. 그리고 어린 청소년 14명으로 구성된 선교팀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의 선교 활동을 떠나고 또 한 팀은 '인디언'들을 선교하기 위해 떠난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두 팀에게 뜨거운 기도로 힘을 보태 주었다. 설교는 캐나다 2세인 젊은 '죤 전도사'가 자신의 헌혈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기도를 하고 계실 때 사탄이 예수를 시험하는 장면의 대목을 가지고 멋진 설교를 했다. 그는 캐나다 2세이지만 한국어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당연히 영어는 '오리지널'이고....., 신실한 전도사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이다.

 저녁은 아내가 만들어 준 닭고기 요리로 맛있게 먹었다.

    

8월 2일

  오늘의 새벽 예배는 "고난의 영광"(고후 4:17)에 대한 강해였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독서 및 영어 공부를 했다. 잠시 후 두 아들의 컴퓨터 학원 '픽업'을 위해 '하이웨이'를 달리게 되었다. 아직까지 아내는 '하이웨이'를 겁이나서 달리지 못하고 시내의 도로만 다녔다고 해서 아내에게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하여 '하이웨이'를 달려 보도록 권했다. 나는 조수석에 앉고 두 아들은 뒷좌석에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아내에게 '하이웨이'로 진입하는 요령과 함께 여러 가지의 안전 수칙을 일러 주면서 '하이웨이'로 들어갔다. 두 아들은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엄마의 운전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고백을 했지만 아내는 7년이라는 운전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서 '하이웨이'를 잘 탔다. 무사히 학원에 도착해서 두 아들을 내려 주고 우리 부부는 학원 옆에 있는 공원에 앉아서 독서와 영어 공부, 그리고 캐나디언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캐나디언들은 점심 식사를 '햄버거'나 바나나 등으로 공원의 벤치에 삼삼오오 앉아서 즐거운 담소와 함께 간단하게 마치고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다가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도로 공사의 인부들도 집에서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 등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을 보았다.

 2시간의 공부를 마친 두 아들을 태우고 다시 한번 아내가 '하이웨이'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제 더 이상 '하이웨이'를 겁내지 않겠지.....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 부부는 우리 아파트 옆으로 흐르는 '험버강'을 따라서 산책길에 나섰다. 약 4시간의 거리를 서서히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산책길에서 '롤러브레이드'를 타는 사람,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 자동차 '캠핑'을 즐기는 부부, 가족끼리 '바베큐 파티'를 하는 가족, 강아지와 함께 여유있게 산책을 하는 늙은 부부, 기러기 떼와 어울려 뛰어 노는 어린 아이와 그의 엄마들이 한데 어울려서 한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가끔씩 '험버강'가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서 상류 댐으로  올라가려는 물고기들의 힘찬 도약으로 은빛의 반짝 거림을 우리 부부는 즐기며 휴식을 취하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이 상쾌한 산책이었다.

 

8월 3일

 새벽 기도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교회에 갈 때에는 아내가 운전하고 돌아 올 때에는 내가 운전을 했다. 아내가 운전을 할 때에는 나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의 생소한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의 골프 연습장은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시간당 사용료가 20$(18,000원)이고 야외에서 연습을 한다. 푸른 잔디밭에다 실제로 50미터, 100미터, 150미터, 200미터, 250미터의 팻말을 박아 놓은 곳이 골프 연습장이다.  나는 그 많은 골프 공을 어떻게 줍나 하고 걱정을 했지만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골프공만을 줍는 차가 있어서 '필드'로 운전을 하고 가기만 하면 그 자동차가 골프 공들을 다 모아 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골프 연습장은 마치 닭장 같은 좁은 그물 속에서 연습을 하는데 이곳의 풀밭은 너무나 넓고 많아서인지 골프 연습장이 그대로 필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골프는 대중화가 되어 있어서 오히려 테니스를 즐기는 것 보다 더 비용이 적게 든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험버강가'로 산책을 나섰다. 이번에는 '험버강' 위쪽으로 올라갔다.  석양의 아름다운 황혼 빛을 반짝이면서 반사해 내는 험버강에 어미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는 물오리 새끼들의 행복함을 우리는 열심히 눈으로 뒤쫓았다. 이곳 캐나다는 자연 속의 나라이다. 쇠기러기 떼가 하늘 가득히 날아 올라서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8월 4일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캐나다 사람들이 가장 부담이 없는 날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내년이면 토요일을 휴일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는데.......

  오늘의 새벽 기도는 1시간이 늦은 6:30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평상시의 두배 이상의 신자들이 새벽 기도에 참여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마 5:10)에 대한 강론이 매우 좋았다. 나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신실한 믿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새벽 기도 후 교회에서 콩나물 국밥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식사 제공은 많은 '가정교회'에서 돌아가면서 봉사하는 것이다. 나도 지난 겨울에 국밥을 나르고 설거지를 했었다.

  

  집에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수의 '에세이' 영어 학원에 '픽업'하였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온 영어 선생님도 보였다. 그리고 어린 초등학생도 부모님과 함께 공부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2시간의 기다리는 시간 동안 옆의 공원에서 나는 영어 공부를, 아내는 독서를 했다. 집에 돌아오니 현규는 그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서 놀고 있었다. 아내는 맛있는 '스파게티'로 그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 주었다.

  

8월 5일

 오늘은 주일이다. 현규가 교회에서 '드럼'으로 찬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남보다 조금 일찍 큰빛교회에 갔다. 그곳에서 두 아들은 청소년부로 가고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커피와 빵을 나누면서 교제를 했다. 12시 예배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했다.

 내일은 '토론토' 시민의 날이라서 황금연휴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했다. 이곳의 한국교민들은 믿음이 매우 깊은 모양이다.

 오후에는 최전도사님 집에 방문해서 인근의 공원에서 테니스를 함께 치고 수영을 즐겼다.  캐나다에는 공원마다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구비되어 있고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가 있어서 좋다.

   

  전도사님 집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발코니에서 새벽 2시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국의 밤을 즐겼다. 전도사님 집에 잠시 기거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왔다. 가정 예배에서 한번 뵌 할아버지로서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우리들과 잠시 이야기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방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분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분은 몸이 매우 불편하시다. 30여전부터 미국에서 살면서 알 수 없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그분이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은 영구 귀국을 해서 한국 땅에 자신의 몸을 묻고 싶어서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분은 20여년전에 200만$의 행운의 복권 당첨자였다고 한다.

  

   그 복권의 당첨 행운이 오히려 그분의 인생을 비참하게 바꾸어 놓은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이야. 복권 당첨금을 노리던 괴한에게 사랑하는 부인이 권총 살해되었고 돈 때문에 두 아들과 서로 원수가 되어 버리는 등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그보다 더한 불행은 지금도 그분은 매일 매일 다시 한번의 일확천금의 꿈을 꾸면서 복권 판매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매일 매일 몇백만원씩의 돈을 복권에 탕진하고 있어서 지금은 남아있는 돈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은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더구나 두 자식이 완전히 모른 채 하기 때문에 지금은 늙은 몸으로 홀로, 외롭게 복권 가게에서 소일을 하고 있는 그분이 처지가 눈물이 날 정도로 불쌍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들은 참으로 땀을 흘리지 않은 돈은 사악한 악마와 같이 사람을 완전히 파멸한다는 것을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각성해야 할 것이다. 

 

8월 6일

 오늘은 공휴일이지만 새벽기도는 계속되었다. 오늘의 강해는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기를 기도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여행기를 컴퓨터로 타이핑을 했다. 독서와 영어 공부를 하며 하루 종일 집에서 소일했다. 저녁에 우리 가족은 최전도사님 내외를 우리 집으로 초청했다. 아내의 특별 메뉴인 우거지 갈비탕으로 대접했다. 어제 밤에 다 못한 이민에 대한 이야기를 밤늦도록 이야기하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전도사님이 현재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내년에 생태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참고하라고 내가 쓴 석사 논문인 "성경적 효를 통한 생태계 위기극복 방안"이라는 책을 드렸더니 매우 좋아했다.

 

8월 7일

 새벽 기도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라는 강론을 들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현명한 처세술은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스데반, 바울' 등이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자의 모델이고 가장 온유한 자의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며칠 후면 내가 귀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아내의 차를 점검하기로 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한국 사람이 정성스럽게 아내의 차를 정비해 주었다.  

 점심때에는 김집사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대접했다. 오후에는 우리집의 에어컨을 내가 직접 수리하고 에어컨에서 흘러내린 물로 나무로 된 바닥이 잘못된 것을 말끔하게 수리했다. 커튼도 고쳤다. 오늘은 집 안팎으로 고치고 수리하는데  바빴다.

 저녁 늦게 최전도사님 부부와 우리는 멋있는 공원의 잔디밭에 앉아서 한국에서 가지고 간 라면으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8월 8일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라는 강론에 이어서 기도를 했다. 아침에는 해물탕으로 맛있게 먹었다. 캐나다의 물고기라서인지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아내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고 두 아들과 나는 각자 공부를 했다.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여행기를 쓰고 독서 삼매에 빠졌다.

 저녁에는 아내와 저녁 수요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린 후 교회 옆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여러 집사님들이 나의 귀국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들은 내가 귀국을 해서도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주었다. 

 

8월 9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라는 강론을 듣고 새벽 기도를 했다. 긍휼이라는 말은 'Merciful' 이다. "자비, 연민, 동정, 인정, 은혜, 행운" 등으로 해석되는 긍휼은 우리 모두 가져야 할 보물이다. 나는 하나님께 만사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오늘은 36도 넘는 무더운 날이다. 우리 가족은 무더위를 뚫고 컴퓨터 학원에 두 아들을 '픽업'해 주고 두 시간 동안 시내 관광을 한 다음 '미시사가'까지 가서 영어 '에세이'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너무나 햇빛이 강렬하기 때문에 잔디들이 말라죽고 있었다.  토론토 기상대에서는 25년만의 폭염이라고 발표했다. 집에 돌아오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우리들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저녁에 감자탕을 끓여서 아파트 16층에 사시는 부부를 저녁에 초대했다.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캐나다에 온 이웃이다. 그는 한국에서 직업 군인으로 근무를 하다가 정년을 하고서 곧바로 이민온 사람이었다. 이민온 지 만 1년이 되어 가는 그는 두 아들, 큰 형님 아들, 아내와 함께 이곳에 적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시간이 나는 데로 아이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여행도 가기도 하면서 이곳의 생활을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현재는 이민 업무, 영어 번역, 컴퓨터 조립 등을 주업으로 하는 회사를 창업 준비중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만사가 잘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8월 10일

  "오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마 5:9)의 말씀을 가지고 강해를 들었다. 나는 어디에서든지 화평케 하는 자는 되고 불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내는 아르바이트를 가고 나는 집에서 두 아들과 집에서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저녁 9시경에 우리는 토론토의 부자 동네를 구경하기 위해서 드라이브를 했다. 참으로 왕같이 살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어마어마하게 꾸민 집에는 담장이 없었다. 그들의 집 앞에는 어김없이 농구 골대가 세워져 있고 최고급 승용차가 두 대 정도 있고 모터보트가 있으며, 옆에는 이동식 집이 있었다. 담이 없는 대신에 각종 진귀한 나무들이 멋진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몇몇 사람들은 요란한 담장과 최첨단 무인 카메라까지 설치하고 보초병까지 세워 두고도 불안해 하며 사는 현실과 비교가 되어 서글펐다.

 가는 곳마다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궁전 같은 집들이 있었다. 특히 온타리오호수 주변의 집들이 가장 멋이 있었다.

   

 

 8월 11일

 오늘은 새벽 기도가 6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토요일은 공휴일이기 때문에 다른 날 보다 한시간 가량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새벽 기도를 하러 나왔다.  오늘의 말씀은 제 9복인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라는 사도행전(20: 35)의 말씀으로 강해를 듣고 기도했다. 나는 베푸는 자의 행복을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아침밥으로 교회에서 제공하는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항구로 드라이브를 갔다. 마치 바다와 같이 드넓은 '온타리오' 호수 위로 미끄러지듯 서서히 움직이는 요트가 한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고 굉음을 토하면서 힘차게 내닫는 '모터보트'와 마치 달리기 경주라도 하는 듯이 나란히 줄을 지어서 수면 위로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물오리 떼들의 일사 불란한 비상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한가로워졌다. 온타리오 호수의 물이 오염되었다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깨끗했다.  이 나라의 무궁한 수자원과 지하자원, 그리고 각종 환경이 하나님께서 이곳에 너무나 많은 혜택을 준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손을 마주 잡고 아름다운 호숫가를 거닐었다. 수많은 새들과 제비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호수 물과 하늘색이 똑같은 '온타리오' 호수 위로 크고 작은 배들이 분주히 오고가고,  맑은 하늘에는 관광객을 가득 실은 프로펠라 비행기들이 마치 잠자리 같이 날아 다녔다.

 

   오늘 저녁 가정교회에 가지고 갈 음식 재료를 장만 할 겸 '가라지 세일'을 구경 할 겸 시내로 나왔다. '가라지 세일'을 한다는 안내문을 찾아서 여러 곳에 가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소니 카세트' 한 개에 1$(850원), 농구공 한 개에 1$, 이런 식으로 물건들을 샀다. 이곳 사람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검소하다. 절대로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깨끗하게 빨고 수선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싸게 물건을 파는 것이다. 이런 생활 패턴은 자연을 저절로 사랑하게 하고 자원을 아끼며 더불어 살아가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길러 주는 것이다. 어떤 나이 어린 소녀는 자신이 가지고 놀던 각종 인형을 깨끗하게 빨아서 팔고 있었다.

 어떤 '가라지 세일'을 하는 사람이 우리 부부를 보고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걸었다. 우리는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분은 임상 심리학 박사로서 의사이고 한국에서는 대학교에 출강을 하는 교수였다. 나는 그분에게 우리를 한국사람으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중국사람, 일본 사람과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조건 동양인이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을 때 반응을 보면 구별이 된다고 했다. 참으로 현명한 방법 같았다.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의학박사요 대학교수라는 신분이지만 청바지에 '샌들'을 신은 소박한 옷을 입고서 자신과 가족들이 쓰던 물건들을 팔고 있는 그 분이 존경스러웠다. 우리나라의 체면 문화를 그분이 최일선에서 깨부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체면 문화를 다시 한번 제고해볼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는 새벽 기도를 갈 때에 많은 사람들이 '샌들'을 신고 오기 때문에 나도 용기를 내어서 '샌들'을 신고 교회에 다녔다. 처음에는 '넥타이'를 매고 교회에 갔는데 지금은 맨발에 '샌들'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많이 변한 내 모습이다.

 

  우리 부부는 '가리지 세일'에서 튼튼한 철제 의자 3개(개당 2$), 카세트 라디오 2개(개당 1$), 아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헌옷 한 벌(4$), 각종 쟁반세트(1$) 들을 사서 의기 양양하게 집으로 돌아 왔다.

  저녁에 가정 교회에 갈 때 아내는 맛있게 '샐러드' 한 쟁반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 정 장로님 내외는 내가 곧 귀국하게 된다고 이별 파티로 갈비 '바베큐'를 해 주셨다. '하우스' 뒷뜰에는 '체리'나무, 사과나무, 뽕나무 등과 함께 파란 잔디밭이 있었다. 정성어린 '바베큐' 요리와 더불어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각종 음식을 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옆집에는 500년 된 거대한 나무를 최근에 잘라냈다고 한다. 나무가 너무 커서 윗 부분부터 조금씩 조금씩 가루로 만들어서 베어 냈는데 덤프 트럭 3대 분의 나무 가루를 실어 냈고 경비로 3,000$이나 들었다고 했다. 그 나무 가루들은 퇴비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그 옆집의 여자는 한국인(발레리나)이고 남편은 캐나디언이라고 했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나서 그들의 금슬을 물어 보았다.  장로님은 국제 결혼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서로의 문화적 갈등 때문에 늙어서 몹시 외로워한다고 한다. 젊어서는 정렬로,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의 외로움과 문화적 갈등을 이겨낼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사랑보다는 현실이 만만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시댁 식구들을 만나더라도 언어의 장벽 때문에 깊은 정을 나눌 수가 없어서 친척들을 점점 멀리하게 되고, 그렇게 되다보니 서로간의 갈등이 생기고 하는 등 점점 악순환이 되풀이 되면서 헤어지는 부부가 많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이민 1세는 고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민 온 사람들을 총칭하고, 1.5세는 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졸업한 사람들이며, 이민 2세는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나온 사람들을 말한다고 한다.

 

  장로님의 두 자녀들은 이민 2세이고 이민의 목적은 자녀 교육 때문에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25년 전에 2살과 3살의 어린 자녀를 이끌고 젊은 부부가 무작정 이곳에 이민을 올 당시에는 총 재산이 1,300$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근 한달 동안 무려 360여 곳에 각종 회사 등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직장을 구할 때까지 중국인의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으며, 그것도 여의치 못해서 한국인들의 빈민촌에서도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직장을 구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지금은 세탁소를 운영하고 집도 사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는 고생담을 들었다. 다행히 두 자녀들은 잘 자라 주어서 첫째는 지금 회계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는 캐나다 유수의 컴퓨터 관련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도 국제 결혼이 아니라 한국인과 결혼을 시켰다고 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먼저 믿는 자와 나중 믿는 자'에 대한 말씀을 공부했다.

 그들은 내가 이틀 후에 귀국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국으로의 선교 활동을 떠나는 심정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해 주었다. 가정교회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한국을 아니 인천을 복음화하기 위한 소명을 띤 "선교사"가 되어 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해 주었다. 나도 진정한 선교사가 되리라는 다짐을 했다.

  장로님 부부는 이민 25년 동안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을 때의 마음자세"에 대해서 뜨거운 간증을 해 주어서 우리 모두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생각하고 대해 주라는 지상 명령을 내리시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교만하고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게 하기가 심히 어렵다. 나도 장로님처럼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 주고 오로지 그 사람의 장점만을 말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늦은 밤까지 기나긴 이야기를 하고 헤어질 때 장로님 부부는 나에게 선물까지 챙겨 주셨다. 그 따뜻한 마음씨에 감사했다.

 

 

8월 12일

 오늘은 주일이라서 새벽 기도가 없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여행기를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예배하러 갔다. 오늘의 설교 말씀은 "돈을 잘 쓰는 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세상적으로 돈을 모아보았자 모두다 헛된 것이고 오로지 하나님 말씀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설교였다.  성경 속의 어리석은 부자를 예화로 들면서 새벽기도때의 말씀과 연결해서 말씀해 주셨다. 내가 현재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주시기만 하시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삶이 기독교인의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배웠다.

  집에 돌아오는 중에 '제임스 가든'에 들러서 온 가족의 사진을 찍었다. 내일이면 귀국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지고 올 짐들을 준비하면서 바쁘게 보냈다.

  

8월 13일

 오늘은 귀국하는 날이다.  두 아들의 컴퓨터 학원으로의 '픽업'을 해 주고 우리 부부는 학원 옆에 있는 공동 묘지에 가서 2시간 동안 공동 묘지를 구경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무덤 앞에서 늙으신, 몸이 몹시 불편하신 할머니가 노구를 끌고  먼저 가신 할아버지 무덤을 예쁜 꽃으로 가꾸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먼저 죽은 아내를 떠올리기 위해서 아내의 무덤 옆의 벤치에 앉아서 상념에 젖어 있는 모습도 보았다. 어떤 젊은이는 공동 묘지에서 조깅을 하기도 했다.

 이곳은 공동 묘지 주변의 주택들이 오히려 값이 더 나간다고 한다. 조용하고 주변 경관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저녁에는 전도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서 감자탕을 끓여서 대접했다.

 저녁 11시경에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여행은 21일간의 캐나다 여행이었다. 캐나다에서 매일 새벽기도를 하러 교회에 갔었고, 수요예배와 가정예배에도 열심히 참여해서 나의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된 아주 뜻깊은 여행이었다. 끝.   

 

 http://w1.hompy.com/hope888/ed09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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