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미국과 캐나다 여행

hope888 2014. 2. 23. 20:45

 

미국과 캐나다 여행

 

  


 

2012년 1월 13일(금)

 

  아침 일찍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게 된 것은 많은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대단한 설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특별 새벽기도를 하러 가고 나는 이른 시간이라서 텅 빈 지하철을 이용해서 편안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영하의 매서운 날씨이지만 공항 안에는 많은 인파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활기찬 인생들이 인천 공항에 가득하다.  자동 출입국 심사 등록을 일행들과 함께 받았다. 나는 지난 여름 방학 때 모잠비크를 여행할 때 받아서 사용했지만 이번에 다시 받게 되었다. 미국을 가려면 전자여권이 필요해서 얼마 전에 새롭게 전자 여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공무로 여행을 하므로 많은 부분을 공무 수행에 할당해야 하지만 틈틈이 관광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총 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을 입국할 때에는 2008년부터 무비자 입국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한결 편하고 쉬운 미국 입국이 될 것이다.  출발 72시간 전에 전자여행 허가인 ‘esta'를 승인받으면 된다.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하여 뉴욕에 있는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기까지는 무려 13시간 40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이다.  지난여름에 봉사활동을 했던 아프리카 모잠비크 여행은 무려 19시간이라는 비행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도 어렵지는 않았다.  나와 함께 자리에 앉게 된 김 장학사와 이 주무관과 함께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지루한 줄 모르고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기나긴 비행 중에 내 옆의 김 장학사가 눈이 아프다고 호소해서 나는 긴급 처방으로 이침(耳針)을 활용해서 눈 주위의 청명, 어요, 승읍, 두광명 등에 시침을 해 줬다. 한숨 잠이 들었던 김 장학사는 눈이 한결 좋아졌다고 감사해 했다.  지난 모잠비크 여행에서도 내가 일행들의 주치의 노릇을 톡톡히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내가 이침을 준비한 것이 도움을 줄 것이다.

  

  기내식으로는 양식으로 광어, 한식으로는 쌈밥이 나왔는데 나는 비행기 안에서 먹는 쌈밥이 별미 같아서 주문했는데, 기대했던 것과 같이 독특한 맛이 있었다. 싱싱한 상추쌈에 고추장을 곁들여서 먹는 쌈밥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10여 년간을 가까이서 교육감님을 모시고 있는 이 주무관이 옆에 앉아서 교육감님의 건강 비결을 이야기해주었는데, 반신욕과 러닝머신 등으로 건강을 열심히 챙기신단다.  나는 이 주무관에게 교육감님이 이번 여행 중에 혹시나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면 치료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 기내식으로는 간단한 해물과 밥을 먹었다. 기나긴 여행 중에 나는 좌석 앞에 있는 TV로 3편의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틈틈이 잠을 자기도 하고, 두 개의 신문을 다 읽었고, 성경의 창세기를 읽었다.  



  

   13시간 40여 분 만에 구름이 낀 영상 6도의 포근한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안착했다.  뉴욕시는 맨해튼·브루클린·퀸스·브롱크스·스태튼아일랜드(옛 이름은 리치먼드) 등 5개 자치구로 되어 있는데, 이 자치구들은 모두 허드슨 강이 대서양의 어퍼뉴욕 만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점 가까이에 있다. 북쪽으로 웨스트체스터군, 동쪽으로 롱아일랜드의 나소군 만이 육지 쪽 경계를 이룬다. 그 외의 지역은 롱아일랜드 해협, 대서양, 허드슨 강, 그리고 온갖 유형의 만·해협·개울로 둘러싸여 선적과 휴양에 이용될 수 있는 연안의 길이가 930km나 된다.  

  

뉴욕시 인구는 1,35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맨해튼에만 600여 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맨해튼은 허드슨 강이 옆으로 흐르기 때문에 매일 바람이 불기 때문에매연이 없는 깨끗한 거리라고 한다. 맨해튼은 맨해튼 섬을 중심으로 본토의 마블힐 구역에 걸쳐 있으며, 이스트 강의 여러 작은 섬을 포함한다.

  

  서쪽으로 허드슨 강, 북동쪽으로 할렘 강과 스파이튼다이빌 강, 동쪽으로 이스트 강, 남쪽으로 어퍼뉴욕 만과 접한다. 맨해튼은 종종 뉴욕 시와 같은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1609년 영국인 허드슨이 뉴욕만에 도달하여 맨해튼을 탐험하였고,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가 교역의 거점으로 개설하였다. 1626년 네덜란드 신대륙 식민지의 초대 총독이었던 페테르 미노이트가 원주민인 인디언으로부터 맨해튼 섬을 사들여 뉴암스테르담(뉴앰스터댐)이라 명명하였다. 1653년 시가 되었으며 1664년에 영국령이 되었다.

  

    1825년 이리운하의 개통과 함께 급속하게 발전하여 1898년 뉴욕시의 5개 자치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시가는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로 구획되고, 브로드웨이가 대각선을 이루며 통하고 있다. 북동부는 흑인 거주지구로 알려진 할렘이며, 여기서부터 할렘 강을 사이에 두고 브롱크스 구가 이어진다. 맨해튼 섬 남쪽 3㎞ 지점의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증권거래소가 있는 월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등 상업중심지의 마천루군, 예술가가 많은 그리니치 빌리지, 센트럴파크,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본부 외에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 컬럼비아대학교, 그 밖에 여러 문화·교육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공항에서 반갑게 마중 나온 장 가이드를 만났다.

  

    장 가이드는 오늘부터 내일까지 우리들을 도와줄 것이다.  일행은 장 가이드의 차로 맨해튼으로 들어갔다.  고색창연한 다리를 건너서 맨해튼으로 들어갔다. 뉴욕 시내에는 엘로캡이라는 택시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록펠러 센터는 미드타운의 중심에 있으며 19개의 빌딩으로 이루어진 복합단지로서 로워플라자 주변에는 세계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실외 아이스링크는 록펠러 센터의 트레이드 마크로서 많은 뉴요커들이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무척 바람이 세차게 불고 영하의 추위였지만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여행의 인증 샷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로위플라자 뒤로는 70층 높이의 GE 건물이 있다. 그리고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은 6천여 석 좌석을 갖춘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실외 극장이 있다.

  

   장소를 옮겨서 맨해튼의 가장 번화가에서 우리는 더욱더 환상적인 거리 모습에 흠뻑 빠졌다. 가장 번화가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삼성 로고가 반짝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젊은 아가씨가 매우 추운 날씨에도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 모델이 되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직업도 참으로 다양하다.

  

버스 안에서 보았지만 어떤 사람은 팬티 아래로 바지를 내려 입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는 골반바지라고 해서 젊은이들 사이에 잠시 유행한 바 있지만, 이곳은 더 심하게도 팬티 밑에 바지를 입고 있으니 어떻게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저들 나름의 유행이겠지만 보기가 좋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께서도 제발 그렇게 입지 말라고 사정할 정도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관람했다. 규모가 무척 컸다. 이집트 미라가 많은 이집트관, 일본관 한국관, 중국관, 르네상스관 등 나라마다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그룹별로 구름처럼 모여서 진지하게 메모를 하기도 하고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등 진지한 태도들이 보기 좋았다.  한국관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서 뉴요커들에게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뽐내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특히 고려청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조각품, 유화, 건축물, 각종 악기 등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타의 머리 부분이 세 개나 함께 붙어 있는 것도 보았다.

  

  한겨울이지만 너무나 다양하고 잘 전시된 박물관을 쉴 틈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즐겁게 하다 보니 이마에 땀이 날 정도였다.

  

아쉬운 시간이 흘러서 박물관을 떠난 후에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뉴욕의 맨해튼을 벗어날 수 있는 1934년에 완공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지 워싱톤 다리를 건넌 후 조금 한적한 뉴저지의 크라운 프라자 호텔에 투숙했다.

  

  자동 로밍이 된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호텔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인천은 한밤중이라서 곧바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넓은 호텔 방에서 혼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간단히 씻은 다음에 교육감님을 모시고 맛있는 와인과 소중히 가지고 간 소주로 우리들의 여행이 안전하고 유익한 시간으로 가득 차기를 기원하면서 건배를 했다.  교육감님의 뛰어난 기억력에 감탄하면서 인천교육의 산 역사이신 교육감님의 인천교육의 아스라이 잊혀가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내 방 앞의 복도에는 5명의 흑인 아이들이 엎드려서 자기들끼리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한 가족인데 자기 방에서 공부하다가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자유분방한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주 귀여운 소녀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반갑게 눈높이를 맞추고 악수를 해줬다. 잠자리에 들어서 피곤하여 잠이 들었으나 시차 관계로 새벽 한 시경에 눈이 떠졌다. 한국은 오후 2시경이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1/14(토)

  모닝콜로 일어났다. 한결 몸과 마음이 가뿐했다. 생기가 도는 아침이다.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과일류와 망고 주스, 오렌지 주스, 빵, 달걀 등을 먹었다. 소시지와 햄 등은 매우 짰다.  이곳 음식은 비교적 짜다.  

  

잠시 후에 장 가이드의 차로 고색창연한 다리를 건너서 맨해튼으로 들어갔다.  맨해튼으로 가는 길에는 2차 세계대전에 위용을 자랑하던 항공모함과 잠수함, 콩코드 비행기 등이 관광객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주변의 도로에는 뉴요커들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 월가를 지나가는데 지난 10여 년 전에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린 현장을 보게 되었다.

  

    현재에는 6개의 빌딩이 다시 지어지고 있었다. 작은 건물 한 동은 벌써 완공되었는데 그때 희생된 2,976명의 이름이 동판으로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도 12명이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그때의 잔해들을 치우지 않고 전시하여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토요일이라서 어제의 맨해튼 거리와는 딴판이다. 차들이 별로 없었고, 사람들도 적었다. 날씨는 영상의 날씨이지만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부는 날씨에다 잔설이 가끔씩 내리는 그런 날이다.  월가의 상징이라는 황소 동상에서 잠시 내린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사진을 찍었다.  

  

황소의 중요 부분을 만져야 황금이 굴러들어 온다고 하는데 황소의 엉덩이 부분은 접근을 막아서 아쉽게도 만져 보지 못했다. 그 대신 수많은 사람의 손때가 묻어서 반짝거리는 것을 사진에 담을 수는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황소 동상의 그곳을 만지며 경제적 자유를 꿈꾸었으리라.....

  

  부자가 되면 참으로 많은 점에서 좋을 것 같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자유, 선택의 자유, 남의 행복도 보살펴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유 등이 있을 것 같다.  나도 재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세계를 누비며 남을 마음껏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퍼스트 클래스 사람들의 여유로움과 특전이 항상 부러웠다. 나도 퍼스트 클래스 사람이 되어서 그런 특권을 누리고 싶다. 좁디좁은 이코노미석의 자리가 아닌 침대처럼 누워서 여행할 수 있는 그런 대우를 받으며 여행도 하고 싶은 것이다.

  

  월가를 벗어나서 브루클린 다리 밑에서 수상 택시를 탔다. 한 시간 동안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고 추웠다.

   배 안에서 인천시 교육청 ICT 담당 장학관과 일행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 선구적인 ICT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보다 이틀 전에 뉴욕에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였다.
  

  비록 차가운 날씨이지만 멋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은 우리는 용감하게 선상으로 올라가서 얼어 버린 손가락을 입으로 호호 불면서 사진을 찍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미국과의 화합을 위해 선물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가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을 한 시간가량 관람하고 한국식당에서 뷔페식으로 먹었다. 나는 주로 회 종류를 마음껏 먹었고, 맛조개와 백합 등도 너무나 싱싱해서 회로 먹었다.  후식도 대게 한 마리를 먹었다. 내 입이 호사를 마음껏 누린 시간이었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후에 캐나다로 가기 위해서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가까이에 있는 버펄로 공항까지 델타항공으로 가게 되었다. 케네디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하는데 개인 소화물 한 개에 25$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가이드가 7개의 소화물이기 때문에 25달러 곱하기 7개면 175$이므로 한꺼번에 계산하겠다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미국의 교육은 산수 시간에 구구단을 배우지 않아서 계산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웠다. 공항 직원은 한 사람씩 25달러를 내면서 계산하자고 해서 갑갑했다.  인천국제공항이 6년 연속 최우수 공항이 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빨리빨리 문화”로 신속하고 빈틈없는 업무 처리 능력과 웬만한 것은 계산기가 필요 없이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우리들의 계산능력과 따뜻한 “정 문화”로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 등이 겸비된 우수한 인력과 “은근과 끈기”로 뚤뚤 뭉쳐진 한민족의 우수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검색을 받으러 가려고 할 때에 살펴보니 김 장학사가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는 몹시 걱정했다. 납치되었는지, 아니면 길을 잃었는지, 온갖 나쁜 상상을 하면서 걱정을 했는데 한참 만에 나타났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니 배탈이 나서 잠시 다녀오려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미안하게 되었단다.  탑승을 위한 절차를 밟는 데에서도 온몸 투시경을 통과해야 하며, 구두와 허리 벨트까지 벗고 맨발로 검사받는 등 너무나 엄격한 검색에 혀를 내둘렀다.

  

    미국은 9.11태러 이후 테러공격의 주요 대상인 공항, 항만, 대도시 공공시설, 주요 정부청사 등을 출입시에는 각종 보안 및 검색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만다행으로 아무란 사고없이 델타항공에 탑승했다. 한 시간 40여 분 만에 버펄로 나이아가라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려고 하는 데 일행 중 한 사람의 짐이 나오지 않아서 당황했다.

  

   지난 6개월 전에 말라위와 모잠비크로 여행하는 도중에 남아공 항공으로부터 우리들의 짐을 3일 만에 되돌려 받은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걱정되었다. 한참 만에 다행히 델타항공 사무소에 가서 분실되었던 짐을 찾았다. 운반 도중에 가방 하나가 떨어졌다고 한다. 최고의 선진국인 미국 공항에서도 이런 실수가 벌어지고 있다.

  

  30여 분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이곳에서는 황 가이드가 중국인이 운전하는 15인승 봉고차로 우리를 안내했다. 캐나다에는 여행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가이드가 직접 운전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로 이동하는 도중에 눈길을 만났는데, 이런 눈과 영하의 날씨가 모처럼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토론토는 추운 날씨와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인데도 미국 뉴욕처럼 지금까지 딱 한 번 눈이 오고 나서 계속 가물었다가 며칠 전에 눈이 조금 올 정도로 이상 기후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지구의 이상 기후가 지구 곳곳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느낌이다.

  

   버펄로 공항을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를 눈길을 헤치며 달려서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의 레인보우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캐나다 입국장에서 간단한 절차를 마친 일행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며 “나이야 가라!”라고 크게 외치며 젊음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공항에서 짐 때문에 지체되어서 너무 늦게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한 관계로 아쉽게도 폭포 근방의 한국식당에서 쇠고기 볶음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는 개인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여름철과 겨울철로 두 번 구경한 경험이 있어서 덜 아쉬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눈길을 조심해서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려서 캐나다 토론토 시내에 들어왔다.

  

  토론토는 내 아내와 두 아들이 5년 정도를 살았던 곳이고 나는 일 년이면 두 번씩 방문했던 그리운 도시이다. 노스욕에 있는 로보텔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 밤에도 나 혼자서 한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밤 9시경에 교육감님이 머무시는 방에 모여서 간단한 회식을 했다.  각자의 방에 들어갈 때에는 두 개씩의 컵라면을 배급받았다.   내 휴대폰은 미국에서는 자동 로밍이 되지 않았지만 토론토에서는 소통이 되어서 카카오톡으로 아내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1/15(일)

   오늘도 바쁜 일정이 준비되어 있다.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서 큐티로 하루를 시작했다. 혼자서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호 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침은 로보텔 식당에서 호텔식인 양식으로 먹었다. 과일 위주의 음식을 먹었다. 우유, 치즈 등은 먹지 않았지만, 요구르트는 한 개를 먹었다. 건강을 위해서 나는 우유 제품은 먹지 않는다. 

  

   밖의 온도는 영하 10도라고 한다. 맹추위를 뚫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캐나다 토론토의 상징인 CN 타워를 방문했다. CBC 방송국 송신탑인 CN 타워는 높이가 525미터로서 바람이 불면 좌우로 1.5미터 씩 움직이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매우 빠른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데 58초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토론토 시내를 두루 구경했다. 토론토는 세계 7대 금융도시이다. 77층의 가장 높은 빌딩은 은행이다. 토론토에서 높은 빌딩은 은행이 아니면 호텔이고 나머지는 2층 정도의 주택들이 숲 속에 숨어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겨울에만 주택들이 보일 정도로 완전히 숲 속의 도시가 토론토이다.

  

   CN 타워에서 내려다보는 시내의 아름다운 모습들 위로 많은 경비행기가 떠서 우리처럼 토론토 시내를 관광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경비행기를 타는 것이 하나의 인기 있는 취미생활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6개월 정도의 비행 훈련만 하면 비행사 자격증을 딸 수 있고 경비행기도 대여해 준다고 한다. 한쪽에는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그곳에서 모두 힘차게 뛰어 보았다. 만약 깨어지면 죽음이다. 어떤 할머니는 그 유리판에 올라가자마자 기절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가이드가 말해 주었다.  어떤 캐나디안 꼬마들은 엎드려서 밑을 내려다보거나 뛰어다니며 서로 장난을 치는 등 귀엽게 놀았다.

  

   CN 타워를 뒤로하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을 구경했다. 수많은 유물을 보면서 인간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점심은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퓨전 중국식의 음식을 먹었다. 여행의 묘미를 느끼는 다양한 요리들, 이름도 모르는 각종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몇 번 들어도 외울 수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다. 템프니스 챠우면이라는 것만 겨우 외웠다.  잠시 숙소로 되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공식 방문 코스인 캐나디안 컨넥션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최 측에서는 우리들의 편의를 위해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로보텔에 회담장을 만들었다. Canadian Connection 사장님은 한국 부인과 오순도순 살고 있는 쉐인 피니씨이다.
  

  캐나디안 컨넥션은 인천시교육청에 원어민 교사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선발해서 교육한 다음에 인천시 교육청으로 보내주는 인력회사이다. 그들은 교사 선발 과정 중의 하나인 인터뷰 장면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원어민교사를 희망하는 교사들의 이력서를 보았다.  7명의 이력서를 보았는데 이곳에서 대단히 훌륭한 인재들이 인천시 원어민 교사를 희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려운 질문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웃으면서 조리 있게 답변을 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런 인재들이 인천 학생들의 영어를 담당한다면 더욱더 영어 교육이 활성화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잠시 객실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캐니디안 컨넥션 회사 임원들과 함께 공식 만찬장에 나갔다. 토론토 전통식당이라는 곳에서 함께 한 자리에서 우리는 유쾌한 농담을 하면서 다양한 전통 음식을 먹었다.  나는 화순에서 원어민 교사를 했다고 하는 여로라 프링글씨와 함께 옆자리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몇 년 전에 토론토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인디언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토버머리를 여행했다고 했더니 부러워하면서 나에게 다이빙을 하는지를 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다이빙하기 좋은 천국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어로 통하지 않으면 손짓, 몸짓으로 대화를 이어 나라 수 있었다. 즐겁게 만찬을 마친 후 호텔에서 전 교장 선생님과 룸메이트가 되어서 외롭지 않았다.  

1/16(월)

  오늘은 세 번의 공식 일정이 있는 날이라서 조금 일찍 일어났다. 아내와 카카오톡으로 대화했다. 내가 지하철의 마지막 종점 부근인 노스욕에서 사흘 동안 잠을 자게 된다고 했더니 자기도 노스욕에 가고 싶다고 답했다. 아내는 이곳에서 3년을  살았기 때문에 친구도 많고 추억도 많을 것이다. 나는 사진을 많이 찍어 가지고 가겠다고 달랬다.

  

  아내는 날씨가 추우냐고 물어 와서 나는 영하 3도의 날씨에 잔설만 가끔 날리는 그런 날씨라고 했더니 아내는 ‘토론토의 1월 날씨치고는 너무나 좋은 날씨이므로 당신의 생애 최고의 날들이 되기를 빈다.’고 축복해주었다. 아내는 또 나이아가라 폭포는 구경했느냐고 물어서 나는 근방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지나가기만 했다고 답했더니 나이아가라 폭포는 겨울 관광이 최고인데 아쉬웠겠다고 나 대신 안타까워했다.

  

    어제저녁과 마찬가지로 호텔에서 아침을 과일 종류로 간단히 먹고, 서둘러서 공식 일정의 장소인 미시사가로 이동을 했다. 월요일 아침이라서 극심한 차량 정체 현상에 조금 고생을 했다. 버스 안에서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는데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 길을 달리기도 했다.

  

  조금 늦게 가톨릭 초등학교에 도착한 우리를 더플린 교육청 교육감과 교육장, 학교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4세부터 14세까지 공부를 하는 이 학교는 학생 수가 350명인데, 실력이 뛰어난 좋은 명문학교라고 한다. 친절하고 자상한 브리핑을 젊은 교장 선생님이 해 주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학교의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한참 겨울 방학 중이지만 이곳은 겨울 방학이 짧아서 벌써 개학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의 교육 받고 있는 모습과 그들의 관현악단의 시범 연주 등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힘찬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열과 성의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이 고마웠다. 초등학교를 떠나서 가톨릭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열쇠뭉치를 들고 다니면서 직접 문을 열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2,3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인문계와 실업계가 함께있는 종합학교로서 규모가 큰 학교이다.

 

      우리는 수업하는 모습도 보고 사진도 찍으며 열심히 무언가를 배우고 가겠다고 노력했다. 과학 수업을 참관할 때 소의 허파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고서 담배를 피우지 않은 허파의 건강한 모습을 관찰하게 하는 생생한 현장 실습과 담배의 해독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다른 선생님이 돼지 새끼를 해부하는 수업도 보여 주었다.
  

   실질적인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열정이 눈에 띄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수업을 하는 모습들을 참관했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그들과 우리나라 고교생들의 치열한 입시 경쟁 수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한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에 TESOL 대학원 연수생들이 캐나다에 입국해서 공부 중인 토론토 연수 센터에 갔다. 인천 초중등 교사 18명이 일주일 전부터 와서 연수 중인 곳이다.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위로해줬다.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 즉석 교육감님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그들과 헤어진 후에 바삐 더플린 필 교육청에 갔다. 그곳의 교육감님과 두 명의 부교육감, 그리고 한 명의 교육장이 배석했고 우리 쪽에서는 인천시 교육감과 세 명의 교장 선생님과 장학사, 과장, 주무관 등이 배석해서 정식 의례를 마치고 두 교육청 간의 MOU를 체결했다. (MOU란 국가 간에 합의한 내용이나 조약 본문에 사용된 용어의 개념들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당사국 간의 외국교섭 결과 서로 양해되고 합의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문서로서 양해각서라고도 함)

  

   성공적인 MOU를 체결한 다음에 필 교육청에서 준비한 만찬장에 가서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만찬을 즐겼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LA 쇠고기를 먹었고 호박 수프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미시사가에서 근 한 시간을 달려서 노스욕 로보텔에 돌아왔다. 토론토를 떠나는 마지막 날 밤이라서 일행들은 즐거운 파티를 열어서 토론토의 밤을 즐겼다.

1/17(화)

  모닝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밖에는 비가 온다. 토론토의 한 겨울에 비가 오다니 기상이변도 보통 기상이변이 아니다. 온도는 영상 3도이다. 비에 잔설이 녹아내린다. 호텔식으로 먹는데 과일 종류를 주로 먹었다. 달걀, 요구르트, 빵 종류를 배부르게 먹었다. 나는 평소에는 아침밥을 먹지 않는데 여행을 와서는 이렇게 잘 먹고 있으니 아마도 체중이 불어났을 것이다. 호텔에 있는 체중계는 파운드로만 표시되어 있어서 올라가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아내가 처방해 준 비타민과 미네랄을 꼭꼭 챙겨서 먹고 있으며 비타민 C는 생각날 때마다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아내에게 오늘 일정을 카카오톡으로 알려주었더니 토론토에 사는 아내의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 요즈음 갱년기로 몹시 고생한다고 한다. 혹시나 나를 만나러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

  

   아침 9시경에 비가 내리는 토론토 시내를 구경하면서 부호들이 사는 지역을 구경했다. 마치 왕궁 같은 집들에서 77명의 거부가 살고 있었다. 최근에 한 채의 집이 매매되었는데 그 집에는 저택 안에 가족용 극장도 있더라고 토론토 신문에 났단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그들의 생활상이다.   토론토의 신청사와 구청사를 구경하고 양조타운도 구경했다. 그리고 우산을 쓰고 토론토 대학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구경했다.

  

  토론토 대학은 1827년 영국 국왕의 특허장에 의하여 영국국교회(성공회) 계통의 킹스칼리지로 설립되었다. 1850년 종교적·정치적 논쟁으로 비종파 학교가 되면서 토론토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 조지 캠퍼스, UTM(University of Toronto at Missisauga), UTSC(University of Toronto at Scarorough) 등 세 개의 캠퍼스가 있다. 토론토대학은 토론토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 응용과학·공학부, 건축·조경·디자인학부, 문리학부, 생애교육학부, 치의학부, 삼림학부, 정보과학부, 법학부, 음악학부, 의학부, 간호학부, 약학부, 체육·보건학부, 사회사업학부 등의 학부 및 대학원과 조셉 로트맨 경영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40개의 부속도서관에는 730여만 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도서와 약 340만 점의 마이크로폼 자료가 소장되어 있으며, 4,000종의 정기간행물이 비치되어 있다. 부설시설로는 학습자료센터와 미술관·라디오방송국·천문대 등이 있다.   대학 재학생은 4만 3,000명(남학생 1만 8,800명, 여학생 2만 4,200명)이며, 대학원 재학생은 1만 500명(남학생 4,900명, 여학생 5,600명), 교수는 2,937명,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14명이다. 학부 재학생의 94%가 온타리오주 출신이다.   교내에 밴드·체스·합창·댄스·드라마·영화·동성애·오페라·사진·학생자치 등 200개의 동아리가 활동 중이며, 인기 있는 교내 행사로는 토론토대학의 날과 연극제, 계절마다 열리는 축제 등이 있다. 토론토 상업지구에 있는 메인 캠퍼스 외에 교외에 세 곳의 캠퍼스가 더 있다. 얼마 전 세계 대학 평가에서 토론토 대학은 24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명성이 있는 대학교이다.  우리는 세계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열심히 공부하는 토론토 대학에서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거부의 집이라는 카사로마를 방문했다. 소유주였던 HENRY MILL PELLATT경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발전사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재정업자이자, 경영자, 장군이었다.

  

   유명한 건축가였던 E.J. Lennox를 만나고 난 후 그는 토론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성을 짓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191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00명을 동원하여 공사했는데 3년에 걸쳐서 완공을 하였고 3백 5십만 달러라는 거액이 투자되었다.

  

   헨리경과 부인 마리는 카사로마에서 행복한 삶을 누려왔으나 무리한 공사비와 투자 탓에 10년도 채 못 되어 재정파탄을 맞게 되어 이 성을 포기하게 되었다. 1936년 이후로 카사로마는 토론토시의 소유가 되었고 KIWANIS CLUB에 의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98개의 방이 있는 대저택에 들어가서 그들의 생활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치 임금처럼 생활했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침실과 화려한 거실 및 실내 정원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양한 방들을 구경했다. 그렇게 많은 방들 중의 하나도 정성을 들이지 않은 방은 없었다. 각기 방들의 활용 면에서나 용도 면에서 뛰어난 세련미로 꾸며져 있었다. 눈 요기를 실컷 한 카사로마를 아쉬운 발걸음으로 빠져 나왔다.

  

   점심은 공항 부근의 더플린 서울관이라는 한국식당에서 토론토 정 총영사님의 초대로 이루어진 만찬장에서 배부르게 먹었다. 나는 회덮밥을 주문해서 먹었다. 고등어구이, 만둣국 등이 있어서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해서 배부르게 먹었다. 정 총영사님의 늦둥이를 키우는 재미 등으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점심을 함께한 필 교육청 소속의 한국계 직원인 켄코시는 토론토 큰빛교회 집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큰빛교회의 임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이야기했더니 몹시 반가워했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후원하고 있는 홍 선교사님 근황을 이야기해줬다. 즐거운 점심시간을 마치고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토론토 공항 안에 미국 땅이 있는 것이다. 티케팅을 토론토 땅에서 한 다음에 짐을 가지고 몇 미터 걸어 들어가면 미국 땅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입국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유나이티드 항공기를 타기 전에 벌써 미국에 입국한 것이다. 검색은 이곳도 철저했다. 구두도 벗고 수하물을 철저히 검색한 다음에 탑승하려고 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연착이 되었다.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기행문을 작성하며 기다렸다.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기까지 두 시간 반을 기다렸다. 안개는 날이 서서히 저물 무렵에 사라진 것이다. 토론토 공항을 이륙한 다음에 두 시간가량을 비행 한 끝에  덴버 공항에 도착했다. 덴버는 몹시 추웠다. 덴버는 해발 1,6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 시가지가 있어서 겨울철이 되면 눈이 많이 내리고 춥다. 덴버는 농업·목축업·상업이 발달하고, 부근 지역의 상업·공업 중심지이자 대륙횡단철도·고속도로·항공로의 요지이고 공업도 발달한 도시이다.

  

    북위 40° 가까운 고지대이므로 기후가 온난하고 건조하며, 로키산맥 관광의 한 중심지이고 겨울에는 부근 산에서 스키를 많이 탄다. 교육·문화시설도 풍부하여 덴버대학교(1864)·레지스대학(1888)·콜로라도여자대학(1909)·메트로폴리탄대학(1963) 등이 있다. 시립공원과 로키산맥에 펼쳐진 덴버 산악공원은 이곳의 자랑거리이다.
  우리는 곧바로 덴버 공항에서 바삐 서둘러서 코디로 가는 비행기를 가까스로 갈아탈 수 있었다. 우리들의 소화물은 항공사 측에서 코디행 비행기에 옮길 시간이 없었다. 다시금 덴버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한 시간 만에 무사히 와이오밍주 파크 카운티에 있는 코디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일루션의 할러데이 사장님과 박 이사님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짐은 당연히 도착하지 못해서 코디 공항측에서 준 간단한 세면도구 한 개씩을 받아 들고 박 이사님의 차로 영하의 날씨를 뚫고서 눈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하면서 코디 호텔로 갔다.

  

   우리는 비행기를 계속 타고 온 관계로 저녁을 먹지 못해서 호텔로 들어오기 전에 밤 10경에 햄버거와 감자튀김 등을 드라이브 인으로 음식을 시켜서 호텔에 들어왔다. 고색창연한 시설이 마음을 끌었다. 인디언 노래가 잔잔히 깔리고 인디언풍의 장식들이 많이 있는 식당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과 콜라를 마시며 간단히 저녁을 대신했다. 호텔은 단단한 나무로 장식하고, 각종 사진과 사냥 도구 등으로 내부를 색다르게 꾸민 고급 호텔에서 이틀 밤을 자게 된다.

  

  숙소를 배정받았는데 내 파트너는 김교장선생님이다. 피곤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다.

1/18(수)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깬 나는 큐티를 하고 성경을 통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은 어제저녁 늦게 햄버거 등을 먹었던 식당에 다시 가서 과일종류와 달걀 등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중년의 사나이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중국인이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말했다. 코디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관광객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곳이라서 주변의 산들은 모두 다 민둥산이고 겨울철이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되기 때문에 이런 엄동설한에 동양인들이 많이 와서 이상한 모양이다.  이곳은 동양인 중 중국인과 일본인이 몇 명 살고 있어서 중국식당과 일본식당이 있다. 한국인은 공식 방문할 예정인 화상교육센터인 일루션의 박 이사님 가정 5식구가 유일하다. 와이오밍 주의 코디는 아주 작은 도시로 인구는 약 1만 명 정도이다.

  

    William Cody(1846-1917, 별명 Buffalo Bill)는 옛날 Pony Express Rider(말에 의한 속달우편배달부)로 시작하여, 미국의 남북전쟁, 그리고 후에는 인디언과의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철도회사에 들소 또는 buffalo 고기를 공급하는데 매우 유능하다 하여 별명이 "Buffalo Bill"이 되었다. 또 "Wild West Show"를 시작하여 근대판 로데오를 시작했다. 후에는 정치적 수완으로 현재의 Cody, Wyoming에 댐을 세우고, 철도를 들여오고, 그곳을 개척하는데 힘을 써서 ‘코디’라는 도시로 명명되었다.     현재에도 이곳에서는 미국 전역에서 온 카우보이들이 로데오 경기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아침을 먹은 일행은 공식 방문지인 와이오밍주의 원격화상 교육 센터인 일류션을 방문했다. 일루션의 사장 일행의 환대를 받으며 그곳의 상황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와이오밍 주 상공회의소 의장과 인천시 교육감과의 MOU를 공식 절차에 따라 체결했다.

  

    MOU는 화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원격 화상교육 센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유럽 등에도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24시간 화상을 통해서 영어 교육을 하는 곳이다. 방법은 일대일, 단체, 컴퓨터를 통한 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간으로 영어 교육을 하는 장소이다.  일루션에서 손님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독일에서 MOU를 체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사장님의 유창한 영어와 한국말로 다양한 시설들을 소개해 주어서 잘 살펴볼 수 있었다. 이곳 사장님인 할러데이 씨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 통신에서 한국 생활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을 잘했다. 공식 일정을 마친 일행은 일루션의 박 이사님의 부인께서 다섯째를 낳다가 아프게 되었다는대, 아픈 몸을 이끌고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김밥과 삶은 달걀 등을 박 이사님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먹으며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유황 온천을 찾아서 두 시간가량 차로 이동했다.   와이오밍 주 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 곳이라서 민둥산에 오묘조묘한 산자락 등이 마치 황무한 달나라에 온 느낌이 들었다. 달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할 때 이곳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와이오밍 주는 미국  51개 주 중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곳이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고산지대라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한 여름철이라고 해도 가까스로 생존하는 누런 풀들을 뜯어 먹도록 방목하는 목축업이 주요 산업인 곳이다.  

  

   온천으로 출발할 때에는 눈발이 날려서  일루션 사장님이 눈길에 안전한 사륜 구동의 자기 차를 우리에게 빌려 주어서 감사했다. 잠시 후에는 날씨가 매우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온천 가까이에 ‘윈드리버캐니언’이라는 협곡을 먼저 관광했다.

  

   수많은 억겁의 세월 동안에 바람의 힘으로 깎아지고 닳아서 오묘하게 변해버린 협곡들의 바위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랜드캐니언에 온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가 장관을 이루는 ‘바람의 강 골짜기’를 감탄을 연발하며 두루 구경했다.

  

  온천욕을 하게 되었다. 수영장처럼 넓은 온천탕으로 남녀 혼탕이다. 일행은 반바지를 빌려 입고 탕에 들어갔다. 유황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마치 수영장처럼 드넓은 온천탕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오늘이 주중이라서 손님이 없다고 한다. 탕 안에서 모처럼 수영도 하고, 농구도 했으며 물 미끄럼도 여러 번 탔다. 처음에 물 미끄럼을 탈 때에는 너무 빨리 내려와서 옆으로 떨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착수하는 과정에서 온천물을 잔뜩 먹기도 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발로 내려오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착수할 때에도 물을 먹지 않게 되었다.

  

   사우나 시설도 좋았다. 밖에는 영하의 매서운 날씨이지만 야외 온천도 경험해 보고 싶어서 용감하게 문을 열고 밖에 나섰다가 매서운 바람에 떠밀려 다시 실내 탕으로 돌아오기를 여러 번 한 다음에 드디어 야외 온천탕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야외 온천탕에서 수영도 하고 느긋하게 하늘과 주변 경치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시간 이상을 유황냄새가 물씬 풍기는 온천탕에서는 늘씬한 비키니 아가씨의 몸매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손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었다. 어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보청기를 사용하시지만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관계로 나는 거의 고함을 지르는 수준으로 이야기했는데 가까스로 알아들은 할아버지가 이상한 질문을 해서 당황했다. 내가 공무로 코디에 온 한국의 중등 교장이라고 했더니 할아버지께서는 미국에 입국할 때 어려움이 없었느냐고 했다. 나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북한사람이라고 들은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큰 소리로 나는 남한사람이라고 재차 말했지만 거듭 해서 미국에서 어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노인은 남한 사람보다는 북한 사람과 더 친한 모양이다. 나는 남한과 미국은 훌륭한 우방 국가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해 주었지만 씁쓸했다.

  

   지난 여름 방학 때에는 아프리카의 말라위와 모잠비크에 가서도 남한보다는 북한을 더 잘 알고 호감을 가진 젊은 청년들을 만나서 당황했었는데 이곳 미국에서도 그런 꼴을 당하다니, 우리나라의 국력 신장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온천욕을 만족스럽게 끝내고 다시금 코디로 돌아왔다. 길 중간마다 100여 명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조그마한 마을들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로 8시간이 걸리는 덴버로 가든지 한 시간 거리인 코디로 가야 한다고 한다. 다양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덴버로 가는데, 이틀이나 걸린다고 한다.  따로 떨어져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로 목장 일을 하는 사람들로서 소와 말을 기르며 살고 있었는데 무척 외롭게 보였다.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목축업도 어려운 일일 것 같다. 한 여름철이 되면 알팔파를 심은 밭만 초록 색깔이고 나머지 풀들은 누렇게 시들은 풀들이란다. 다행히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는 관계로 식수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자녀를 많이 낳는다.  일루션 사장인 할러데이 씨는 5명의 딸이 있고 부사장도 4명의 자녀가 있으며, 한국인인 박 이사님도 4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이다.  저녁은 일루션사장님의 초대로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만찬 시간이 남아서 우리는 코디 시내에 있는 월마트에 갔다. 물건들이 산더미같이 쎃여 있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물건들이 없어서 아무도 사지 않았다. 월마트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삼성과 엘지의 전자제품들이 진열되어 인기 있게 팔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이웃 나라의 전자 제품이 우리나라의 전자제품에 모두 다 밀리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잔설이 분분히 날리는 영하 13도의 코디 시내를 관광하다가 코디 식당에서 만찬을 가졌다. 만찬은 맨 처음 식욕을 당기게 한다는 의미의 에피타이저를 먼저 먹는다.  간단한 수프나 야채 샐러드, 음료 등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메인 메뉴가 나오는데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한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버팔로 요리를 시켰다. 나는 버팔로라는 야생 소고기를 중간 정도로 익혀서 먹었다. 다른 일행은 해산물 요리, 쇠고기 요리 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켜서 배부르게 먹었다. 너무나 음식들이 푸짐하게 나와서 다 먹지 못할 정도의 양들이었다. 미국사람들은 덩치가 커서 음식도 많이 나오나 보다. 모두들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내 옆의 박 이사님은 해산물 요리를 시켰는데 나에게 새우 등 해산물을 나누어 주어서 나도 버팔로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배부르게 먹은 우리는 호텔에서 덴버비행장에서 오지 못했던 우리들의 짐을 기다렸는데 오후에 벌써 와 있었다. 각자 짐을 찾아서 행복했다. 집을 열어 보니 검색대에서 강제로 열어서 보았다는 메모용지가 발견되었으나 짐에는 이상이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우리는 교육감님 방에 모여서 미국과 캐나다의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친 마지막 밤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내 룸메이트는 김 교장 선생님이다.

1/19(목)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국을 떠나기 전의 공식 일정인 고등학교 방문을 위한 준비로 양복을 다리미로 다리고 바지를 다리는 등 분주하게 아침을 보냈다. 큐티도 하고 미국 TV의 일기 예보도 보면서 아침밥 먹을 시간을 기다렸다.

    

   다행히 눈이 그치고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맑은 푸른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호텔식으로 과일과 빵 종류, 커피로 아침을 먹고 잔설이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으로 갔다. 바위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환상적이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지만 날씨는 차갑지 않았다. 햇빛이 나기 시작하자 영하 17도의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다. 영상의 날씨로 급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격의 눈빛으로 감상했다. 많은 사진을 찍고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을 뒤로하고 공식행사가 있는 코디 고등학교로 가다가 아름다운 모습의 코디 댐에 잠시 내려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코디 고등학교에서 일루션 사장님과 함께 코디고교 교장 선생님을 만났다. 600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코디 유일의 고등학교로서 종합고등학교라고 한다. 시설을 두루 살펴보는데 시골치고는 비교적 좋은 시설이었다. 1,000여 석의 규모가 큰 공연장도 있었다. 이 학교는 브라스밴드가 유명하다고 한다.
  

   학교장과 부교장이 열쇠뭉치를 가지고 다니며 직접 안내를 해줬다. 일행은 수학 시간과 과학 시간, 직업 교육 시간 등을 참관했다. 특히 목공실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보안경을 쓰고 각자 열심히 작품들을 만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외에는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도 이제는 어떤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한 시간 정도의 수업 참관 등을 마치고 코디 공항에서 솔트레이크시티를 거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게 되었다.

  

    코디 공항에서 솔트레이크시티로 가는 델타 항공기를 기다리며 햄버거를 먹었다.   나는 햄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먹어 보니 먹을만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자주 먹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도 검색대에서 구두까지 벗고 철저한 검색을 받았다. 국내를 여행하는데도 이렇게 고생스러우니 우리나라가 참으로 좋은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테러 걱정이 없는 나라, 서로 믿고 사는 나라, 정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륙 후 약 한 시간가량의 비행 끝에 솔트레이크시티공항에 도착했다. 솔트레이크시티공항은 미국 전역을 갈 수 있는 허브 공항이다. 솔트레이크시티는 눈이 폭풍우처럼 많이 내린다고 한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유타 주의 주도로서 그레이트솔트호의 남동 연안 근처, 해발고도 1,330m에 있다. 1847년 브리검 영이 모르몬교의 본거지로서 건설하였으며 독자적인 시정을 시행하여 ‘뉴예루살렘’ 또는 ‘성인의 도시’라 하였고, 정부와의 사이에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모르몬 교회가 있는 템플스퀘어는 관광지로 유명하며, 화강암의 교회·시계탑·시청청사 등의 옛 건축물이 남아 있고, 모르몬교의 본부가 있다.  산업은 광업 외에 금속·기계·전자기기·식품가공·정유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또, 개척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철도·고속도로·항공로 등 교통망이 발달하였으며, 농축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유타대학교·웨스트민스터대학교 등을 비롯하여 많은 교육기관과 미술관·도서관이 있으며, 관현악단과 오페라단도 조직되어 있다. 또한 2002년에는 제19회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다. 일행은 LA로 가는델타 항공기로 갈아타고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을 이륙했다.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서 LA까지는 2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솔트레이크시티 기온이 영하 17도였는데 2시간 정도의 비행 후에 도착한 LA 기온은 영상 20도 정도로 급변했다. 무려 37도 차이가 났다.

  

    공항에서 짐을 찾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가이드의 차에 우리들의 짐을 싣고서 앞으로 한국으로 갈 6시간 동안을 알차게 관광하게 되었다. LA 주변에는 남한 땅과 비슷한 크기의 모하비 사막이 있어서 사막기후라고 한다. 한 여름철에는 영상 40도 정도까지 올라가지만, 습도가 낮고 찜통더위는 없어서 견딜 만하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한겨울이지만 모하비 사막의 고온 건조한 바람 때문에  해양성 우기로 비가 와야 하지만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LA 카운티는 미국을 대표하는 대도시이며 주변의 패서디나·컬버시티·잉글우드·샌타모니카·롱비치 등의 위성도시를 포함한 인구는 1,200만을 넘어서 뉴욕 지역 다음으로 큰 미국 제2의 거대한 대도시권을 형성한다. 시가지는 북부의 샌게이브리얼산맥의 남쪽 사면에서 서부와 남부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펼쳐져 있다. 도로는 대개 정연한 바둑판 모양을 이루나, 시가지의 급속한 확장에 따르는 자동차의 급증으로 오래된 시가지는 가로의 재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디언의 촌락이 산재하던 이곳에 백인이 정착하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로, 1781년에 주민 44명으로 된 에스파냐 사람의 거리가 탄생하였으며, 에스파냐·멕시코의 지배에 있는 동안 거리는 서서히 동·서·남으로 확장되어 나가, 방목지역의 중심상업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1846년 미국 해군에 의해 점령되어 미국령이 된 당시의 인구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농업의 발전을 발판으로 착실한 도시발전이 시작되고, 다시 1891년의 석유분출을 계기로 20세기에 들어서자 대규모의 유전개발, 1914년의 파나마운하의 개통과 샌피드로만의 축항에 의한 해운의 발달,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의 발전, 교통로의 확충에 의한 관광·휴양객의 증가, 감귤류의 재배와 그 가공업의 발달 및 기계·화학·항공기·자동차 산업 등으로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캘리포니아는 전 지역에 걸쳐 일반적으로 농업이 경제의 주체가 되어왔고, 따라서 각종 곡물·축산물·채소류 와 오렌지·레몬을 중심으로 한 감귤류의 시장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 왔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급속한 공업화의 추세로 농업의 쇠퇴가 현저하다. 석유를 중심으로 한 공업원료 획득이 쉽고 1936년 완성된 후버댐의 수자원을 이용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정밀기계·섬유·금속·석유관련산업·화학·식품가공·제강·인쇄 등 각종 공업에 더하여 컴퓨터·통신기·전자산업 및 우주항공산업이 중요한 경제적 지주이다. 각종 공업제품과 석유·농산물 등은 샌피드로만의 로스앤젤레스항을 통해 선적되며, 특히 남아메리카 및 태평양 경제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수출입액에 있어서, 로스앤젤레스항과 롱비치항의 액수를 합치면, 태평양연안에서는 샌프란시스코를 능가하여 가장 많다. 로스앤젤레스항은 어항·군항으로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또 전국에서 철도·하이웨이·항공로가 집중하여, 육상·항공교통에 있어서도 태평양연안 남부지역의 중심지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아름다운 해안풍경을 포함한 풍부한 자연의 경승지로서 관광지로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으며, 수많은 오락·행락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비롯한 약 10개의 주요 대학 및 자연역사 박물관·미술박물관·경기장 등이 있고, 뮤직센터를 본거지로 하는 로스앤젤레스필하모니관현악단이 있다.

  

   태평양의 현관 구실을 하고 있는 만큼, 한국·중국·일본·필리핀 등 동양계 이민들이 많고, 과거 에스파냐·멕시코령이었기 때문에 멕시코인·흑인의 인구 비율도 높아, 인종 문제에 기인하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대책의 하나로, 시가지 재개발에 의한 거주환경의 개선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교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우정의 종(鐘)’을 기증한 바 있다. 북서부의 할리우드·베벌리 힐스에는 광대한 영화 스튜디오가 있고, 영화배우와 유명인사들의 고급 주택가로도 유명하며, 영화산업이 쇠퇴하여가는 오늘날에도 할리우드의 선셋 거리·할리우드 거리 등의 환락가는 여전히 몰락하지 않고 있다.

  

    시(市) 북동부의 윌슨산(1,740m)에는 지름 254cm의 천체망원경으로 유명한 윌슨산 천문대가 있고, 남쪽 40km 지점의 애너하임에는 디즈니랜드가 있다. 또한, 1984년에는 제23회 하계올림픽을 개최하였다. 1967년 12월 한국의 부산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카운티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광역시와 비슷한 개념으로 LA 카운티에는 시장이 없고 네 명의 슈퍼바이저가 선출되면 카운티 정부와 여러 개의 시들의 관계를 조정해 준다고 한다. 규모가 큰 LA 시에는 수도국과 전신국 등이 있지만, 산타모니카 시에는 그런 작은 부서가 없어서 그런 일들을 큰 도시에 위임해 주는 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LA 카운티 면적이 서울시 두 배의 면적이다. LA시에는 인구가 400만 명이 살고 있다.  싼타 모니카 시에도 독립적으로 시장이 있고 따로 시정이 운영되는 지방자치이다.

  

   LA에서 맨 처음 가 본 곳은 낙조가 유명하다는 샌타모니카 해안을 찾아갔다. 해안을 찾아가다가 보면 인공으로 판 베니스 비치라는 운하가 있는데, 운하 주변에는 20세기 초에 건축업자가 줄줄이 집을 지어서 아주 비싸게 건물을 팔았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다워서 지금도 그곳의 건물은 값이 비싸기로 유명하단다.  이곳의 낙조가 유명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연이 심하기 때문이란다. 미세 먼지들 때문에 난반사 탓에 특유한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이룬다고 한다.

  

  아름다운 낙조를 구경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운집한 가운데 우리도 어린아이들처럼 흥분해서 사진도 찍고 환호성을 질러 보기도 했다.   아름다운 낙조를 본 후에 LA 카운티에서 부자들이 사는 곳을 찾아갔다. 샌타모니카 시에는 11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가로수가 밴자민이다. 화분에서 자주 본 조그마한 고무나무가 아니라 엄청나고 우람하게 큰 가로수들이다.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무척 잘 자란다고 한다. 100년 정도 된 야자수들과 밴자민들이 함께 가로수 역할을 한다. 샌타모니카에는 밤늦게도 활동을 하는데 비교적 치안이 잘 되어 있어서 밤 문화가 발달해 있다고 한다.

  

   길에 Xing 이라는 글자가 많이 눈에 띄는데 보행자들이 지나다니니까 운전자는 보행자들을 조심하라는 표시이다.   저택들은 건평 200여평, 대지 500평 정도로 앞뒤로 드넓은 정원이 있는 저택으로 약 100억 이상의 값으로 거래된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UCLA 대학교를 구경했다. 이 대학교에는 아시아계가 약 43%나 된다고 한다.

  

    UCLA는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를 의미하는데 학생 수가 3만 8천여 명이고 학부가 2/3이고 대학원 이상이  1/3이라고 한다. UC 계열의 대학교인 유씨 버클리, 유씨 얼바인, 유씨 샌타버바라 등에도 많은 아시안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할리우드를 동서로 관통하는 선셋거리는 살인을 저지르고 미쳐버린 한 무성 영화 여배우를 그린 1950년 작 미국의 흑백영화 ‘선셋대로(Sunset Boulevard)의 주 무대이며, 환락가로 유명한 선셋 거리를 먼저 관광했다. 선셋스트립의 식당에서 유명한 영화배우와 결혼한 한국 여성도 이곳 식당에서 만났다고 한다. 선셋의 식당에서는 자주 유명한 배우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휘황찬란한 식당가를 차로 지나가면서 구경했다. 선셋대로의 서쪽에는 베벌리 힐스와 연결되는데 부호나 영화배우가 많이 사는 고급주택지이다.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영화촬영소가 설립되면서 발전하였다. 미국의 주요 영화회사에 대한 중앙배역사무소와 영화박물관 등이 있어 미국 영화계의 총본산 구실을 한다.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이라고 불리는 19년에 건설된 유명한 야외극장과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연극 원형극장, 콘크리트 앞뜰에 많은 배우의 손바닥 또는 발바닥 도장이 찍혀있는 중국극장 등이 있다.  

  

     중국 극장 주변에 도착해서 유명한 배우의 손도장, 발도장을 보려고 가는데 마침 'Under world'라는 영화의 시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이 저마다 티켓을 들고서 질서 있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틈을 비켜 지나가서 손도장, 발도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코닥극장이라는 중국극장 안에 들어가서 할리우드 영화 시상식 때 주연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올라가는 계단을 주연 배우 같은 들뜬 마음으로, 비록 레드카펫이 깔리지 않았지만, 천천히 손을 흔들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며 만장의 박수를 받는 기분을 느껴 보았다.

  

   할리우드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장소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사람 구경도 실컷 한 다음에 공항으로 이동해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아시아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만 미터의 상공을 맞바람을 맞으며 우리들의 비행기는 시속 850킬로 미터로 순항했다. 가끔 난기류를 만나서 기체가 요동을 치기도 했지만 13시간 동안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은 가장 춥다는 날씨로 영하 13도를 나타내었다.  33도의 급변한 기후와 14시간이라는 시차 적응에 며릴 동안은 고생을 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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