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느 고양이의 방랑기

hope888 2022. 4. 14. 12:32

 

C시에서

오래전 나는 가난한 어느 집에 얹혀살았다. 주인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잘 건사하는 듯했다. 하루는 직장동료들과 퇴근 후 화투장을 잡았다. 노름이란 본래 물귀신이 끌어당기듯 욕심의 수중으로 자꾸 끌려 들어가는 법, 끝내 빚보증에 휘말리고 카드깡을 하다가 그의 생은 피지도 못하고 박 쪼가리가 되었다.

 

A군에서

나도 별수 없이 길거리 고양이가 되어 헤매고 다녔다. 한 곳을 지나는데 익숙한 냄새가 난다. 후각이 발달하기론 우리만한 짐승도 없을 것이다. 무슨 농기구와 쓰레기 포대가 먼지를 둘러쓰고 너저분하기 그지없는 대문간은 고양이가 숨기에 좋았다. 문간방을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나의 주인 몰락 남(男)이 흐릿하게 엎어진 채 자고 있었다. 본가로 온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어린애 둘 찌그덩한 대문을 밀고 들어선다. 너무 반가워 야오옹 - 인사를 할 뻔했다. 애들은 여섯 살, 네 살, 엄마는 뒤따르지 않았다. 열린 틈으로 재빨리 나가보니 빨간 자동차 한 대가 흰 꼬리를 꼬며 달아난다. 예상되는 바다. 전에는 자동차가 없었는데 무슨 돈으로 샀을까.

다시 들어와 마루 쪽을 보니 고모와 할머니가 애들을 부둥켜안고 운다. 애들은 아예 울음소리를 못 낸다.

목에 걸린 울음이 더 아프게 가슴을 도려낸다는 걸 알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가족이냐!" 애들 할머니는 없는 며느리에게 악을 썼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자기 아들의 수신제가 잘못은 잘 들먹이지 않고 달아난 며느리 책임이 더 크다는 어투다. 분노는 할머니의 일과였다. 정신마저 이상해질까 두려웠다. 애들은 눈치만 늘고 삼촌이나 고모는 시원한 방도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악쓰는 소리, 게으름, 쓰레기장보다 더 악취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방, 나는 다시 방랑의 길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T시에서

밤이 깊어가자 가로등은 고개를 떨구고 꾸벅였다. 이마에 불을 켠 건물로 들어갔다. 매서운 바람이 뺨을 후려쳤지만 따뜻한 느낌이 났다. 인연은 참으로 묘하다. 드디어 한 직원이 출근한다. 안면이 있잖은가. 주말마다 친정에 들러 청소하고 조카들을 돌보던 고모 아닌가. 고모는 무슨 물건이지? 하는 눈치다. 이즈음 나는 지쳐있었고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지저분한 털, 할퀴어진 귀, 진물 고인 눈동자, 비루먹은 고양이를 누가 거들떠볼 것인가.

거기다 어떤 수컷의 발정에 못 이겨 배도 부른 상태였다.

고모는 측은지심을 살짝 비치더니 그냥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퇴근할 때도 “새끼를 가졌잖아~”란 말만 남겼다. 자연은 곁에 다른 생명이 있으면 저절로 온기를 뿜나 보다. 측백의 둥근 지붕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얼어 죽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추워도 해는 뜨고 사람에겐 한쪽의 햇살이 있음을 믿는다. 퇴근길에 나를 오래 생각했는지 자신의 조카들이 눈에 밟혔는지 출근하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아직도 여기 있었어.” “이를 어째!”하고는 부리나케 냉장고에서 먹을거리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고양이에 관한 지식도 없고 싫어하기까지 한다. 알고 보니 그녀 집에는 우리 종족과 견원지간인 진돗개 두 마리가 있었다. 그들은 밭고랑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보면 금방 찢어 죽일 듯 난리난다. 바보 같은 것들 자기들이 펜스라는 철망 안에 갇힌 줄도 모르고, 그리다가 둘이서 한바탕 물어뜯고 싸운다네. 가관이다. 이들을 떼어 내려면 땀깨나 빼야 한다.

그러니 고모가 고양이를 좋아할 리 없다. 소시지와 멸치를 내밀었으나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가게로 달려갔다. 그 후 그녀는 의도치 않은 캣맘이 되었다.

나는 새끼를 낳았다. 그녀가 밥을 주며 “네 새끼는 네가 책임져!" 라고 해서가 아니라 새끼들은 야생으로 키울 것이다. 야생은 반려동물보다 오히려 털이 더 곱고 행동이 날쌔다.

 

새로운 C시에서

아이를 학대하고 버리는 엽기적인 일이 날이면 날마다 뉴스거리로 나온다. 제 자식을 책임지지 못하고, 키우던 고양이도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잽도 안 된다. 밟아 죽이고 물 고문해 죽이고 때려죽이고, 누가 짐승인지 모르겠다. 자존심도 없는 것들, 세렝게티의 얼룩말이나 누들은 악어가 득시글거리는 마라강을 건널 때 새끼들을 가운데로 몰아넣지 않던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다. 배수로 안에서 새끼들이 철망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세상을 보려고 야단이다. 자동차 한 대가 온다. 나는 앞발로 애들을 밀어 넣는다. 자식을 위험으로부터 막기 위한 짐승의 양육법을 사람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의 주인은 신용회복 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는 교회에서 하모니카를 분다나, 온갖 어려움을 딛고 애들은 자기 짝을 만나 미래를 꿈꾸고, 참담한 한 가정사를 털어놓으니 속이 후련하도다. 갸르릉, 갸르릉, 근데 나는 몇 번의 생을 살았기에 양지바른 언덕에 한 무더기 괭이 꽃이 되었을까. (김미연 / 『한국수필』 2022년 4월 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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