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은 그리움이다

hope888 2022. 5. 3. 09:10

 

  

하늘이 눈부시다. 짙게 익은 봄볕이 연두 바람으로 지기 시작한 꽃잎들을 하얗게 날린다. 나는 기어코 차창을 열고 날리는 꽃눈을 얼굴로 맞는다. 근사한 화보 속 한 장면처럼 머리카락을 날리며 샛길로 벗어나 작은 도랑을 따라 구불구불 휘어진 논둑길을 운전면허시험 보듯 조심조심 지나 숲길로 들어서는 언덕길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열자마자 민들레 홀씨들을 달고 날아오르는 함박웃음으로 몽글몽글 들러붙는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오른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비꽃들이 봉분 위에 햇볕을 쬐며 보랏빛 자리를 깔았다. 아직은 봄볕이긴 하지만 뜨거워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호미를 든다. 나름 화려해진 봉분 위와 주변의 보랏빛 거둬낸다. 매번 별 효과는 없으나 이나마 하지 않으면 튀어 나가는 씨를 감당할 수 없다. 듬성듬성 꼽사리 낀 망초 싹까지 뽑아 둑 아래로 던져버리고 나니, 제 모습을 찾은 봉분 위의 잔디가 금방 더 파랗게 생기가 난 것 같다.

산소 앞 잔디밭에 앉아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며 모자를 벗어 부채질로 땀을 말린다. 구불구불 나누어진 논밭들이 제법 푸른빛을 띤다. 멀리 맞은편 안개가 덜 걷힌 듯 산이 햇빛에 잠겨있다. 몇 겹의 산을 둘러치고 농담을 달리한 한 폭, 산수화를 그렸다. 뼈대를 드러내고 하늘을 채우던 산 날망의 여백이 연둣빛 붓질 속으로 사라졌다. 저마다 다른 물감의 색들을 다 쏟아 부어 넘치도록 채워진 아름다움. 그 속에 출렁대는 여름의 초록 떨림과, 넘쳐나는 분홍빛 꿈들이 톡톡 튀어 오른다. 인생을 포용하며 내려앉는 삶의 지혜를 담은 꽃잎들의 화려한 춤사위가 보인다. 끝없는 욕심으로 이기적이고 오만했던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던 겨울을 거두고 왕성한 자신감과 새로 태어나게 하는 봄은 화려한 설렘이다.

햇볕에 송홧가루를 노랗게 익히고 있는 새 솔잎의 설렘 가득한 초록빛 그늘로 들어선다. 솔잎 쌓인 비탈길로 미끄러지던 분홍빛 실바람이 나를 잡는다. '아, 진달래다! 여태껏 응달에 숨어 용케도 기다려 준 얇은 꽃잎 속에 코를 박고 날 듯 말 듯 여린 향내 속에서 잃어버린 기억 속 봄을 찾아 나선다. 빛바랜 기억 속에서 우리네 봄은 언제나 한 아름 품 안에 안겨 웃던 분홍빛 진달래를 불러낸다. 한 송이씩 입속에서 보랏빛 봄 냄새로 문드러지던 길게 내민 열 개의 수술 중 가장 길게 뻗어 나온 빨간 암술을 조심스럽게 힘을 얹어 뽑아낸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한번 훑어내곤 서로 얽어 조심조심 당긴다. '땅!' 입 총소리로 시작된 꽃술 싸움, 숨죽인 아이들 눈이 한 곳에 모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잡아당긴다. 성질 급한 복순이가 힘을 주며 제힘에 끊겨 나간다. '어? 아이고! 와아 아쉬움의 손사래와 어깨 으쓱한 함성이 분홍빛 웃음소리에 범벅이 된다. 끝은 언제나 엄마가 꽃을 만든다. 엄마의 고운 손가락들이 바삐 움직이며 익반죽 된 찹쌀가루를 새알처럼 동그랗게 굴리다 납작 눌러 둥그렇게 모양을 잡는다. 엎어놓은 넓은 솥뚜껑 위의 기름이 자작자작 내 나는 연기 위에 고소함을 얹는다. 그 옆에 쭈그리고 앉은 나는 올해도 화덕 속으로 묵은 솔잎 대신 그리움을 한 줌씩 밀어 넣는다. 그리고 단발머리 소녀가 되어 노래를 부른다.

 

진달래 꽃 피는 봄이 오면은 나는야 언니하고 화전놀이 간다.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를 깔고 진달래 꽃전을 같이 지진다.

 

노래 속 달님처럼 둥그런 꽃이 익어간다. 하얀 달님 위에 올라앉은 분홍빛 진달래꽃이 활짝 웃는다. 꽃전을 후후 불며 먹던 그 맛이 입에 고인다. 송홧가루보다 더 구수한 그리움이 쌓인다.

조심조심 꽃잎을 딴다. 그리움을 딴다. 한 송이, 또 한 송아, 손수건 위에 그리움이 붉게 쌓인다. 그리움을 여며 들고 산에서 내려온다.

산비탈 다랑이 밭 가득한 복사꽃 위에 설렘이 흐드러지게 내려앉는다.

분홍빛 그리움이 깔린다. 뻐꾸기가 화전 대신 그리움을 조른다.

여러 빛깔로 설레게 하는 봄은 세월의 두께 따라 자꾸만 짙어져 가는 그리움이다. (정지연 / 『한국수필』 2022년 5월 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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