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hope888 2022. 5. 9. 09:41

 

 아들이 제주도에 새로 마련한 집터를 보여 주었을 때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은 돌이었다. 수석(水石)이나 정원용 예쁜 돌이 아니었다.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별도 보고 달도 보고 차도 마실 수 있는 반석(石)이었다. 나는 그런 넓적한 돌 하나를 아들의 새집 마당 한 귀퉁이에 놓아주고 싶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반석은 나의 머릿속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어딜 가나 그 지역의 돌을 기웃거렸다. 매화를 보러 가도, 억새를 보러 가도 마지막에는 결국 돌을 찾게 되었다. 일행들도 저절로 “선생님, 저기 돌 있네요.”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선배네 친정에서는 어린 시절 소꿉 놀던 오래된 돌에 눈이 갔다. 느티나무와 더불어 6·25전쟁을 견딘 그 돌은 크기가 어린아이 침대만 해서 어른 네댓 명이 삼겹살도 넉넉히 구워 먹을 만했다. 선배는 거기서 꽃잎을 찧으며 동네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했다고 했다.

제2석굴암이 있는 한마을은 어떻던가, 폐교가 된 초등학교는 소나무가 울창했다. 연못에 연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는데, 못 가에 널찍한 돌이 하나 있었다. 그 학교 출신인 일행 중 한 사람은 추억에 젖어, 생태학습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이 돌 위에 앉아 연꽃 이야기를 해 주었지요. 연꽃은 흙탕물에 살아도 절대로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돌은 정말 믿음직하고 음전했다. 아이들이 흙발로 무수히 오르내렸을 텐데도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마음이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부여의 농가에서 본 돌은 소박하고 아늑했다. 낙화암 가는 길에 집이 하도 예뻐서 차를 잠깐 세웠는데, 마당의 장독들이 옹기종기 햇빛을 이고 반들거렸다. 그 앞에 놓인 커다란 돌 하나, 호마이카 밥상만 한 널찍한 돌 위에는 놀랍게도 빨간 고추가 널려 있었다. 감동이었다. 돌 위에서 고추가 익어가다니!

나는 그 집 주부가 궁금해졌다. 무명옷을 입은 오십 대의 여인을 상상했지만 뜻밖에도 팔순을 넘긴 할머니가 나왔다. 미숫가루와 복숭아까지 얻어먹고는 고추가 널린 돌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들이라는 남자가 나오길래 저런 돌은 얼마면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문중 산을 정리하다 가져온 것이라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머릿속에 돌의 값이 들어온 것은, 이제 나는 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문화재 친정도 없고, 폐교된 초등학교도 없으며, 정리할 문중 산도 없기 때문이었다.

"모르긴 하지만 저런 돌은 꽤 비쌀걸요, 선생님, 포기하시지요. 돈도 없으면서.”

같이 간 일행들이 일제히 나의 무모함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자기 같으면 집 짓는데 돌보다는 현금을 찬조하는 게 낫겠다는 사람도 있고 집을 되팔 때는 돌은 제값을 못 받게 될 거라고도 했다. 별 보고 달 보고 차 마시기에는 가볍고 예쁘고 앙증맞은 나무 평상도 얼마나 많은데 무겁기만 하고 경제성도 없는 돌에 집착하느냐고 나무라기도 했다. 급소는 다른 데 있었다. 설사 마음에 드는 돌을 구입한들 그것을 어떻게 제주도까지 운반하느냐는 것이었다. 비행기로 배로 공항에서는 어떻게 하고 선착장에서는?

나는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아들네 돌은 결국 제주에서 해결하는 걸로 정리가 되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돌 해프닝 제2막이 올랐다. 나의 돌 짝사랑은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수면 위로만 올라오지 않았을 뿐 의식 밑바닥, 해저 깊은 곳에서는 은밀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새벽 운동 후 집으로 걸어오는데 대학병원을 낀 작은 호텔 하나가 눈에 띄었다. 큰길 가였다. 뭇 사람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큼지막한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예전에 못 보던 돌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난데없이 돌 하나가 턱 하니 놓여 있는 것이었다. 던져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물이 좋았다.

나는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것은 분명 임자 없는 돌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나처럼 한때는 열렬히 욕망했다가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으리라 짐작되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인연이란 것이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지난번 나를 비난했던 주범들 서너 명에게 전화를 했다. 한걸음에 달려 온 그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선생님도 참! 이게 어떻게 버려진 돌입니까? 호텔 장식용 돌이구만요“

"돌에도 품격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호텔에 걸맞은 돌이군요."

"잘 생겼다! 이건 부여 돌보다 훨씬 비싸겠는데요, 최소 천만 원은 할 것 같습니다!"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웃음을 억지로 참는 빛이 역력했다.

이에 어쭙잖게 돌에 꽂혀 있는 내 모습이 아직 젊은 그들 눈에는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우리 중 가장 무단하고, 말이 없는 일행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런데요. 선생님~ “

그는 팔을 뻗어 돌을 한 번 조용히 쓰다듬었다.

"제주도는 포기하셨고~. 그럼 이 큰 돌은 어디에다 두시려고요? 아파트 거실요? 안방요?"

팝콘이 터지듯 웃음이 빵 터졌다. 중년의 남지들이 한꺼번에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일행들에게 눈을 흘기며 호텔로 몰고 가 커피를 샀다. 누군가가 '내년쯤에는 제주도 새집 마당 돌덩어리에 앉아 커피 마시게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박기옥 / 『한국수필』 2022년 5월 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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