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향긋한 추억

hope888 2022. 5. 3. 09:24

 

 

무심결에 골목길을 돌다가 발길이 잡혔다. 코에 익은 냄새가 덫인 듯싶다. 코를 씰룩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골목 어귀 작은 식당 안 형광 불빛 아래 네댓 명의 남자가 원탁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았다.

지글거리는 불판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따라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골목길에 퍼진다.

요즘은 흔한 장면인데 왜 그때마다 발길이 잡힐까. 반백년도 더 지난 예전의 향긋한 그 냄새가 영혼 깊은 곳에서 아린 추억을 소환하기 때문이리라.

고교 3년 동안의 자취생활은 내 생애 가장 슬펐던 시절이었지 싶다. 그 중에서도 1학년 2학기 한겨울 이야기다. 진주농고 경내 탱자나무 울타리 옆방마다 작은 부엌이 딸린 여섯 칸의 블록 집이었다. 동쪽에는 남강 백사장과 경계를 이룬 울창한 숲이 길게 가려있어 음침하기까지 한 달동네.

주인 없는 집에는 동병상련의 자취생들만 우글됐다. 그 집에 합천 출신 반 친구와 둘이서 방 한 칸에 세 들었다.

지지리도 가난하기는 둘 다 비슷했나보다. 매월 쌀 한 말과 통나무 한 묶음,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반찬단지와 된장 단지 하나, 간장 한 병을 낑낑대며 메고 왔다. 백리길 버스에서 짐짝 취급을 당하고 차장의 눈치를 받아도 싫은 내색 한번 못했다.

통나무를 성냥개비처럼 잘게 짜개서 작은 화덕에 불 피워 냄비 밥을 지어 먹었다. 한 달 동안 먹어야 할 반찬이지만 미리 거덜 나기 일쑤였다.

반찬도 모자란 데다 한 끼 한 홉 밥으로는 늘 허기졌다. 오전 수업 2시간을 마치기 바쁘게 도시락을 까먹어야 우선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 점심시간에는 잔디밭에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야 할 줄 알면서…….

벽돌집이라 찬바람은 들락날락하고 북풍에 댓잎 부대끼는 소리는 살을 에듯 스산하게 들렸다. 이불이라고 가져온 것은 어린애 포대기같이 작았다.

친구 것은 냉돌 위에 요로 깔고 내 것은 이불로 덮고 둘이서 부둥켜안고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웅크려 잠을 잤다. 뒷날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펴지지 않아 한참 동안 허리 펴는 운동부터 해야만 했다.

그 당시 두어 살 위인 고향 선배가 시내 모모 고급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밤 열 시쯤 손님이 다 가고 나면 따끈따끈한 넓은 방에 혼자 잔다며 추위에 떠는 나의 형편을 불쌍히 여겼던지 와서 함께 자자고 했다. 어두운 밤에 강바람을 맞으며 남강 다리를 건너 밤 열시쯤에 그 식당에 갔다. 손님이 늦게 가는 날은 방안의 동정을 살피며 골목에서 덜덜 떨면서 서성이기도 했었지.

방에 들어서면 따끈따끈한 온기에 금방 몸이 녹는 한편 코도 따라서 흥분한다. 방 가득히 저려있는 고기 구운 고소한 냄새가 눈치도 없이 자취생의 소화기관을 뒤흔든다. 구경도 못 해본 요리였지만, 그 냄새는 나의 오장육부에 깊숙이 파고들어 영혼에까지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잊고 지내던 냄새였는데 언젠가부터 불고기 식당 앞을 지나칠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냄새에 발길이 묶여 그 시절을 소환하곤 했다.

빵집 앞을 지날 때 마른침을 삼켜보지 않은 자가 배고픈 서러움을 어찌 알며 풀떼기와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경험 없이 보릿고개 이야기를 어이 말하리오. 일 년 내내 불 한 번 지피지 못한 냉돌방에서 동지섣달 겨울밤을 지새우며, 찬바람에 댓잎 부대끼는 소리에 살을 에듯 아파보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설움을 이해하리까. 빈 반찬통과 말라붙은 간장병을 바라보며 소금으로 밥을 옴질거려 보지 않고 처량했던 자취생의 아픔을 어찌 설명하리오. 허기진 배를 안고 길을 갈 때 마른침을 삼키게 했던 풀빵 냄새, 어스름이 해 질 무렵 마을 어귀 들어서면 집집이 풍기는 밥 익어가는 냄새, 불판 위에 지글거리며 고기 익어가는 향긋한 냄새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추위에 떨며 서럽게 살아왔던 일들이 그때는 아픔이요 슬픔이었지만, 돌아보니 모두가 추억이 되었구나.

다달이 내는 월사금 4,900환을 3년 동안 면제받는 장학생이란 자부심 하나로 고생을 샀던 셈이다. 그 보람이 헛되지 않아 우리는 지금 나름대로 노년을 즐기며 살고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 했었지.

그 친구는 예비역 육군 대령으로 제대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다. 한학에 심취하여 한시 작가 활동으로 노년을 즐기며 종종 안부 전화로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지낸다.

"지난 일 추억하며 우리 건강하게 즐겁게 사세나." (정동호 / 『한국수필』 2022년 5월 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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