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성경 말씀 일백육십 개의 소절을 정확하게 외우면서 살아온 지가 이십 년이 넘었음을 세상 밖으로 감히 고백해본다.
아침에 눈이 떠지면 하루를 허락받는 감사기도를 올리는데 중언부언하기 전에 성경 말씀 암송으로 먼저 기도를 시작하였다. 백육십 개의 말씀의 양이 많아서 요일별로 일곱 등분해 놓고 아침 기도마다 정성껏 암송하여 올린 뒤 하루 회개의 내용과 소원은 암송 뒤로 미루었고 저녁 감사기도 드릴 때는 내일 치의 말씀을 예습 삼아 암송으로 아뢰고 있어 그렇게 이십 년이 흐르니 기도문 내용은 물론이고 말씀의 주소까지(예를 들면 이사야 38장 17절의 말씀이라는) 정확하게 아뢸 수 있어 날마다 여간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늘 사용하던 단어들도 잊어가고 친근한 사람들의 이름마저 점점 잊어가고 있어 쓸쓸해지고 있었는데 암송하는 말씀만은 이십 년 동안 성경책을 펴지 않고도 아침저녁으로 정확하게 외워 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이십 년 동안 말씀을 암송하여 올리면서 살았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입술에 올라오는 암송 말씀 모두를 믿고 행하도록 피난처가 되게 해주고 구원의 길이 되게 해주고 은혜의 길로 이르도록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이었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해 4월 28일 어려운 병이 터져서 입원하여 4개월이 넘도록 사경을 헤매었다. 다시 찾아오면 죽는다는 뇌경색이 오 년 만에 다시 찾아와서 의료진도 재활담당자들도 내가 늙고 유난히 약하여 나을 수 있는 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원하여 옷을 갈아입다가 심한 재채기가 튀어나와 방바닥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가 쭈그러지고 그렇지 않아도 탈이 많은 배 속의 장기들이 충격을 받고는 밥을 한술도 먹을 수 없어 이십 일 동안 다시 입원하여 꼼짝없이 드러누워 죽 두 숟갈씩만 받아먹고 대소변도 받아내야 하는 참담한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네가 강물을 건널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요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불꽃이 너를 감히 태우지도 못하리니” 내 안에 있던 말씀들이 나를 살게 해주고 있었던가 보았다. 심한 겁쟁이였던 내가 지금도 감히 두려운 물 가운데로 두려운 불 가운데로 나아가고 아니 당당히 이겨내면서 건너가고 있었다. 감격하며 수시로 울었다.
남편 이호선 장로가 성도님들 앞에서 성경 암송하였던 꿈같은 장면이 왜 갑자기 떠오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십 년도 훨씬 전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보이지도 않는 주님의 존재를 믿고 의지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쉰 살이 넘어 늦게야 주님 영접한 남편은 아내 때문에 억지로 참석한 예배 시간 긴 기도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찬송가의 겹쳐진 곳을 일일이 펼치면서 지루한 긴 시간을 때우곤 했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무릎 꿇고 세례 받더니 성경책 겉가죽이 하얗게 벗겨지도록 쓰다듬으면서 말씀을 읽기 시작하더니 한글과 일본어로 십 년에 걸쳐 필사를 하면서 귀한 구절은 찾아 다시 암송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교회의 중앙에 서서 저렇게 성도님들을 성경 암송으로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남편 따라 성경 구절을 찾아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이십 년 전 일이었다.
참 그날은 제일 앞자리였던 내 자리에 감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제일 뒷자리에 서 있었다. 아들이 팔 년째 사법시험에 또 떨어졌다는 소식을 어제 저녁 늦게 듣고 부끄러워서 앞자리에 감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내 새끼 어찌할거나,’ 상한 마음 어디 둘 데도 없었다. 그때에 뜻밖에 나온 기도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 아들이 천 명의 합격생 속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어도 이호선 장로가 저렇게 서서 귀한 말씀을 성도님들 앞에서 암송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일 것인데 그 어려운 일을 먼저 허락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불쑥 나온 내 눈물의 기도를 지상에서 올라오는 모든 소리를 놓치지 않고 다 들으시는 주님은 들으셨던가 보았다. 다음 해에 아들을 천 명의 합격생 속에 넣어 주셨고 두려움 없이 물속도 걷고 불 속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약한 나를 과분하게도 이 나이까지 이르도록 아직도 살게 해 주신 것을 보면 아침저녁으로 외워 올리는 나의 기도를 매우 기뻐하시며 듣고 계셨던가 보았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뻤다. (국명자 / 『한국수필』 2022년 5월 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