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

나이듦의 품격 2 - 쇠약

hope888 2022. 4. 18. 09:48

 제 친구 르노어는 매우 성공한 여성입니다. 명민하고 표현력이 뛰어나며, 매력적인 대학교수입니다. 연구 업적이 뛰어나서 여러 곳에서 연구 기금을 받고 국제적인 학술대회에도 초빙을 받고 있습니다.

7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대학교수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이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주중의 며칠은 학교 교정에서 지냅니다. 그러나 목요일에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위해 안식일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약 열두 명에 이르는 그녀의 가족들이 한데 모입니다.

얼마 전에 르노어는 마흔 몇 살쯤 된 딸과 함께 어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종업원이 온통 르노어의 딸에게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르노어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나는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어.”

이런 일이 이번뿐만이 아니라 그전에도 자주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르노어는 슬픈 듯이 말했습니다.

다른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제 친구도 이렇게 점점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노인인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이런 체험을 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해 왔던 일과 업적, 경험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져 갑니다. … 그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이 사라져 갑니다.

육체적인 능력과 매력도 사라집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과정이 서서히 진행됩니다. 제아무리 이런 변화에 저항을 해 보았자 이 과정을 멈출 수 없습니다.

진행을 지연시키려고 갖은 애를 쓰고 싸워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도리안 그레이'가 치른 값을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젊고 잘생긴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도리안 그레이는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하여 영혼을 팔아 자신을 그린 초상화가 자기 대신 놓는 영원한 젊음을 얻었습니다. 이는 외적인 젊음을 간직한 도리안 그레이의 내적인 추악함이 조상화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도리안 그레이가 늙고 추악하게 변해 버린 자신의 초상화를 견디지 못하고 그 초상화를 칼로 찢어 버리자 오히려 진짜 도리안 그레이가 늙고 추악했던 자신의 초상화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죽고, 초상화는 젊었던 도리안 그레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는 과정은 그나마 괜찮은 쇠퇴 과정에 해당됩니다. 이 과정은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다른 쇠퇴 현상들을 미리 일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는 이 과정은 우리가 쇠퇴의 길에 들어섰음을 알려 주는 단계이기 때문에 충분히 당혹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침나절에 동네 식당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대여섯 명의 노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이제 더 이상 노인들은 그들의 직업이나 경력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원은 오래전에 둥지를 떠나버린 자식들하고도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정치나 자녀, 손자 손녀들 이야기, 건강 문제나 스포츠, 날씨와 여행 같은 주제에 국한됩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선거철이거나 근처에서 큰 스포츠 행사가 열리는 경우에는 노인들이 즐겨 가는 카페에서 그들이 많이 모이는 오전 시간에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노인들에게 발언 기회를 주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노인들도 그들이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카페 종업원뿐이지요. 카페 종업원은 노인들의 재치 있는 농담을 받아넘기고, 노인들을 놀리기도 하면서 열심히 커피를 날라다 주지요.

제가 속한 조촐한 남성 단체의 다섯 회원 아무에게나 물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보수가 아주 높은 직업을 가졌었습니다. 두 사람은 내과 의사였고, 나머지는 화학 공학 엔지니어, 중소기업 대표, 그리고 출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옛날이야기입니다. 일단 우리가 경력이라는 열차에서 내려서자 우리의 사업과 전문직은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던지, 어떤 좋은 일을 하였던지, 또 무슨 실수를 하였던지 그것들에 대한 기억은 다 흐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도 그 기억은 희미해져 가지만, 한때 같이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의 책상이나 복도에서 혹은 직원회의에서 머리를 맞대고 기획안이나 사안들을 토의했던 우리 동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시간주에는 술을 사려면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아무도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맥주 캔 여섯 개들이 묶음을 셀프 계산대에서 계산하려고 하면 귀찮은 전자음이 울리면서 종업원이 달려옵니다. 하지만 셀프 계산대에서도 종업원은 저에게 신분증을 보자고 하지 않습니다.

말없이 금전등록기 쪽으로 걸어와서는 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등록기의 확인 단추를 눌러 버립니다.

하긴 제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때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대하거나 원하는 방식대로가 아닙니다. 최근에 와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젊은이들이 자주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라곤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여전히 이런 친절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쁩니다. 하지만 저도 역시 친절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노인들이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합니다.

좋은 짐작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지요. 저도 그랬었지요. 최근에도 누군가가 저에게 자리를 양보했어요. 그런데 그게 말이지요. 제가 16일간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어요. 배낭여행을 하는 동안 저는 꽤 여러 날 동안 굉장히 험준한 곳들을 오르내렸거든요. 그래서 저는 정중하게 자리를 사양했지요. 제게 자리를 양보하려던 여성에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배낭 가득히 짐을 지고 378 킬로미터를 행군하는 여행을 막 마친 사람으로,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용케도 가라앉혔습니다.

듣자하니 어느 나라 군대의 은퇴식은 꽤 흥미롭더군요. 장교의 은퇴식 때 동료 장교가 은퇴하는 장교를 마주 바라보면서 그동안 그가 했던 모든 업적과 수고에 대하여 감사하는 인사를 한대요. 그런 다음 그는 은퇴하는 장교의 멱살을 잡고 흔든 후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한대요.

“이제 이곳에서의 당신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가서 또 다른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는 뜻이지요. 이런 송별 예식이 갖는 힘과 진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 About Schimdt」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워렌 슈미트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보험 계리사로서 평생을 일했던 직장을 은퇴할때 동료들과 소박한 감사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동료들은 그에게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 라며 초대를 하였습니다. 은퇴를 하고 나서 완전한 허탈감에 빠진 슈미트는 혹시라도 후임자가 업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을지 모르므로 그것에 답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후임자는 그를 보고 무척 난감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당신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 후임자는 물어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슈미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랐어요. 불쌍한 슈미트는 더이상 그곳에 속하지 않았건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지요. 그는 자신의 경력을 적절하게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조용한 자포자기' 의 삶을 살면서 은퇴하고 난 후에는 함께할 동료를 찾는 일이나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슈미

트는 소로가 말한 이런 사람의 원형에 해당되는 인물입니다. 지금 슈미트가 겪은 일은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난관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슈미트의 이야기는 또 다른 종류의 쇠퇴인 '목적의 축소'에 대해 말해 줍니다. 이제는 직장이라는 조직과 그에 따라오는 책임은 사라졌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조직과 책임의 부담을 내려놓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우리가 헌신했던 일과 사명의 바탕이 되었던 목적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자원봉사나 사회봉사 활동, 여행이나 취미 생활, 독서를 통하여 새로운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추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능력이나 관심사, 갈망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내적인 삶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저도 출판일에서 은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직장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25년 이상을 함께 일했던 동료 직원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직업 덕분에 감사하게도 함께 일할 수 있었던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도 보고 싶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발전시키고 그것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내어 놓는 과정을 돕거나 지켜보는 일만큼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향상시키는 일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슈미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가 사라지게 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은퇴한 사람을 송별하는 자리는 직장 동료들과 고용주가 은퇴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행운을 빌어 주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들의 선의가 정점에 이른 자리지요.

그래서 은퇴하는 사람은 그들의 호의를 보고 “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면 은퇴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가지기 쉽지요.

저의 은퇴식 때 “저희를 보러 와 주세요.” 라고 했던 직장 동료들의 초대에 응하기까지 저는 일곱 달을 기다렸습니다. 은퇴한 직장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 이전의 직장 동료들은 정중하고 따뜻하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멋진 귀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달라진 환경과 업무의 개선을 위해 이루어진 변화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누군가 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준 셈이 되었고, 이곳에서의 저의 때는 끝났다는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곱 달 전에 이 문을 나설 때는 그것을 머리로 알았다면 이제는 마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직업이나 경력의 문이 닫힐 때 정체성의 전환을 용이하게 하려면 다른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두려울 시기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직장에 다닐 때만큼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결국 우리는 분주함의 폭정과 성과라는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 기분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대부분의 시기를 관리자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의 성과나 직원들의 성과가 중요하고, 철저하지만 효과적인 시스템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장과 번영을 이루어 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에 속한 것들입니다. 저는 이제 이 모든 것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이후의 삶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저는 한 은퇴한 지인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더 이상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적어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여섯 달이 걸렸어요."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많은 것들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은퇴한 후에도 안락하게 살면서 재정 불안을 겪지 않도록 적절한 노후 계획을 마련하고 재정적인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무척 강조합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노후 계획에 대한 조언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년기에 대한 정서적인 준비나 영적인 준비에 대한 조언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각 사람의 체험은 고유합니다. 사람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조건이나 정서적인 조건, 경제적인 조건들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노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와 ‘데이지꽃을 더 많이 따는 일'("데이지꽃을 더 많이 따리라 Pick up More Daisies" 는 제목의 사는 컨터키주의 루이스빌에 사는 85세의 여성 나딘 스테어의 작품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이 됩니다. 인생의 오랜 체험을 통해 익혀 온 기존의 삶의 기술들을 계속 발휘함으로써 그 기술이 주는 혜택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발견하기 위한 내적인 여정을 시작하고, 이 여정의 곳곳에서 마주치게 될 뜻밖의 기쁨을 만끽할 것인가?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직장에 다닐 때 완벽한 여가를 꿈꾸곤 했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에 완벽한 여가를 갖게 되자 십중팔구 그것이 우리가 바라던 것과 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은퇴자들이 하듯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두 배로 늘어났지만 그것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비교적 건강하다면 사실 우리에게는 많은 문들이 열려 있습니다. 바쁜 직장 생활 때문에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개인적인 관심거리들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여가와 취미의 문도 열려 있습니다. 필요NEEDS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문도 열려 있습니다. 이 문은 다른 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어 주는 문입니다. 은퇴자들이 보람 있는 기회들과 함께 자주 이야기하는 주제는 돌려주는 것입니다.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경험도 있으며 아직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연령대에 있는 은퇴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바를 기꺼이 사회를 위하여 내어 준다면 그것은 우리 공동체를 위한 귀중한 자산이 됩니다.

행복하게도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사는 세대에 속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기대수명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삶의 단계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유년기와 사춘기, 청년기와 중년기를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앞서 경험하였던 삶의 단계들과는 달리 그다음에 이어질 새로운 시기가 없습니다.

오직 죽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살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 수만큼 늙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젊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라는 재촉을 받습니다. (프랭크 커닝햄 / 『나이듦의 품격』 / 생활성서). 끝.

 

'행복한 삶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믿는 힘  (0) 2022.04.22
노자 - 위무위 爲無爲  (0) 2022.04.21
멀고도 가까운 일본  (0) 2015.06.15
미국과 캐나다 여행  (0) 2015.06.15
캐나다 여름 여행  (0) 201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