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도쿄 중심부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획기적인 세균 감염증 치료법을 찾으려는 범세계적 노력을 기리는 소박한 기념 건물이 있다. 바로 기타자토 대학병원의 고층 건물들 맞은편에 있는 작은 사당이다. 기타자토 의과대학 및 병원은 기타자토 시바사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 겸 세균학자를 기리는 곳이며, 사당 역시 기타자토를 기리는 건물이나 그곳은 코흐의 이름을 더해 기타자토 코흐 사당이라 불린다.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유는 무얼까.
1920년에 지은 기타자토 코흐 사당은 지난 100년간 두 번 이전했다. 어디에 자리하든 그 사당은 명소이며 해마다 5월 27일이면 그곳에서 의식이 거행된다. 추모식은 신도(神道)라는 일본 종교의 전통 제식에 따라 진행되는데, 헌당 후 첫 몇 년간 의식을 집전한 사람은 기타자토 본인이었다.
2019년 여름에 내가 사당을 찾았을 때 들은 바에 따르면, 사당 중심부에는 머리털이 한 묶음 있다고 했다. 그 봉헌물은 죽음을 물리쳤다고 알려진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는 물건으로 바로 독일 미생물학자 로베르트 코흐 Robert Koch의 머리털이었다.
기타자토가 일본에서 전염병학의 선구자로 칭송받으며 명성을 얻었을 때, 그는 자기 업적의 기원이 1886년 코흐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비롯된다고 밝혔다. 그곳에서 기타자토는 독일어 잘하는 일본인에서 코흐 연구실과 베를린 국립위생원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1931년에 기타자토가 죽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기타자토 의견에 공감하면서 코흐 사당을 기타자토 코흐사당으로 개칭했다. 그 이후 사당은 전염병연구소 자리에서 새로 설립된 기타자토 연구소로 이전했다. 그런 다음 제2차 세계대전 중 심한 훼손을 겪고, 한 번 더 장소를 옮겼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세균 감염 및 항균 치료법의 혁신과 발전에도 크나큰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베를린 중심부의 알렉산더 광장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베를린-슈판다우 운하 기슭에는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가 있다. 연구소는 위풍당당한 붉은 벽돌 건물로 봄이면 분홍색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목련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인근 운하는 하펠강에서 슈프레강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그 강기슭에 베를린이 처음 들어섰다.
1900년에 문을 연 코흐 연구소는 일본의 사당처럼 로베르트 코흐의 위상과 세계적 영향력을 반영한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코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큰 세균학자였다. 그는 18세기 말에 도입된 독일 특유의 엄격한 교육 체계를 통해서 공중보건 분야로 진출했다. 1843년에 광산촌의 식구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코흐는 13남매 중 셋째였다. 그는 괴팅겐에서 교육받았는데, 괴팅겐은 1850년대 중반에 자연과학을 공부하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코흐는 의학쪽으로 진로를 바꿔 1866년에 의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코흐가 졸업하고 몇 년 뒤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전쟁을 벌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젊은 코흐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당시 코흐는 최전선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에도 양국 간의 적대감은 코흐의 세계관에 계속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싸움은 프로이센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유럽 곳곳에 영영 아물지 않을 유무형의 상처를 남겼으며 대대적인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전쟁 직후 코흐는 최전선에서 돌아와,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는 볼슈타인에서 시골의사가 되었다. 1860년대 말 볼슈타인은 농촌 마을로, 그곳의 대다수 농부들은 지금 같았으면 생화학 테러와 비밀 실험실의 이미지로 등골이 오싹해질 병 때문에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 병은 바로 탄저병이었다. 1800년대 말에 탄저병은 전쟁이나 테러를 연상시키는 병이 아니라, 가축과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농부들의 크나큰 문젯거리였다. 탄저병은 탄저균이 일으키는 병으로 네 종류가 있다. 가장 치명적인 종류는 호흡기관을 통해 진행되며 몸속에서 세균 포자가 급증한다. 초기에는 감기 같은 증상이 나타나다가 얼마 후 폐와 림프샘 조직이 급속도로 심하게 손상된다. 탄저병에 걸린 뒤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십중팔구는 죽는다.
코흐는 탄저병에 걸린 동물 중 상당수가 급속히 그리고 매우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치명적 감염증의 원인을 어떻게든 밝히기로 했다. 그리고 탄저병의 비밀과 함께 치료법도 찾아내고 싶었다. 다행히 코흐는 의사였을 뿐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났다. 게다가 끈기 있고 주의 깊고 꼼꼼하기도 했다. 코흐는 실험 솜씨가 탁월했고, 그 솜씨는 코흐를 여느 의사와 차별화하는 놀라운 재능이었다. 그는 '나무 가시'라는 원시적 도구를 사용하여 탄저병 걸린 소의 비장 혈액을 건강한 쥐의 꼬리에 주입했는데, 이는 탄저병 원인이 동물 종과 상관없이 동일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시골이란 환경 제약에도 불구하고 코흐는 절차와 측정에 만전을 기했고, 마침내 탄저병의 병원체를 배양하고 식별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코흐는 한 가지 병원체가 동물의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탄저병 발병 사례의 원인임을 입증해 보였다.
그 시점까지 코흐는 급성장 중이던 전염병학 분야에서 거의 무명이었다. 하지만 코흐는 세균학자 페르디난트 콘Ferdinand Cohn과 아는 사이였다. 유대인인 콘은 브레슬라우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독일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때문에 거기서 박사 과정을 밟지 못했다. 그래서 더 국제적인 베를린으로 가서 열아홉 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참 얄궂은 반전이 있었다. 콘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브레슬라우에서 박사과정생이 되진 못했지만, 그 학교의 교수가 되는 데는 학칙상 문제가 없었다. 그는 1849년에 브레슬라우대학교로 돌아가서 은퇴일까지 그곳에 적을 두었는데, 그동안 그가 개발한 체계적 세균 분류법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분류 법의 중대한 전신이 되었다. 1860년대 말에 콘은 미생물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혔다.
1876년 4월 22일에 코흐는 콘에게 편지를 써서 탄저병 병원체의 생활환life cycle을 모두 발견했다고 알렸다. 콘은 의심과 함께 호기심도 일어 코흐를 브레슬라우에 초청하여 그의 주장을 들어보기로 했다. 사흘에 걸쳐 코흐는 콘과 콘의 동료들에게 아주 단순한 기구로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코흐 주장에 따르면 탄저병의 실제 원인은 세균으로 이들은 건강한 동물의 몸속에서도 자란다. 그러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세균은 포자를 만들어 휴면상태로 지내다가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증식했다.
콘은 납득했고, 코흐는 1876년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코흐가 곧바로 명성을 얻은 까닭은 탄저균 생활환을 알아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생물설을 강하게 옹호했다. 미생물설은 질병이 독특한 미생물, 즉 병원체에 기인한다는 이론이었다. 세상의 온갖 병을 일으키는 원인은 나쁜 공기가 아니라 독특한 미생물이라는 이야기였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균에서 비롯한 질병은 미신적 해결법과 민간요법 말고 과학적 치료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코흐는 미생물설을 옹호하려고 네 가지 가설을 세웠는데, 이는 지금 코흐의 가설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가설에서 코흐는 병에 걸린 모든 생물체에 병원체가 존재해야 하며, 병에 걸린 숙주에서 병원체를 분리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 세균성 병원체 때문에 병에 걸렸을 경우 환자의 몸에 병원균이 물리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의사가 감염자에게서 병원균을 분리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가장 심오한 세 번째 가설에서 코흐는 병에 걸린 동물로부터 분리한 순수 배양 병원체를 건강하나 감염 가능한 다른 동물에게 주입했을 때 같은 병이 발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순수 배양 병원체가 다른 동물 몸에서 병을 일으키는 경우, 병원체를 병에 걸린 동물에서 다시 분리한 다음 그 병원체가 원래 병원체와 동일함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볼슈타인에서 지역 의사로 일하며 틈틈이 연구하던 코흐는 탄저병과 관련한 발견에 힘입어 학계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1880년에 베를린 국립위생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1885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교 위생연구소의 첫 정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891년에는 프로이센 왕립 전염병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코흐는 1904년까지 그곳의 소장으로 있었다. 그 기간에 코흐 연구소는 근대 미생물학 분야에서 성과를 가장 많이 내놓는 곳으로 꼽혔다. 코흐 연구팀은 다달이 과학적 진보를 이루었으며, 결핵과 콜레라의 병원체를 밝히는 등 당대의 최대 난제 가운데 일부를 해결했다.
코흐 연구팀은 특출한 학생, 인턴, 객원연구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중에는 기타자토도 있었다. 기타자토는 파상풍을 일으키는 세균을 발견한 연구진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리고 코흐 연구소에 있던 율리우스 페트리 Julius Petri는 세균을 연구하는 모든 실험실에서 지금까지도 쓰이는 간편한 페트리 접시를 고안해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겼다. 하지만 코흐 후배 가운데 가장 특출한 사람은 파울 에를리히였다.
에를리히는 갖가지 혈액 세포의 특정 성분에 붙는 매우 특수한 전문 착색제를 개발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러다 1891년에 베를린의 로베르트 코흐 연구팀에 합류했다. 거기서 코흐와 5년간 함께한 후 1896년에 신설한 혈청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그는 1870년대부터 면역계를 연구해온 터였다. 마르부르크대학교 위생학 교수 에밀 폰 베링 Emil von Behring과 공동으로 면역계를 연구하던 중에 에를리히는 특정 미생물을 접한 환자의 몸에서 면역력이 생기는 원리를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면역 세포에서 분비되는 특수분자가 병원 미생물을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을 연구하게 되었다.
에를리히는 면역학 분야를 발전시키면서 면역 세포가 외래 분자와 미생물을 인식하는 원리를 규명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단지 면역계 연구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미생물을 표적으로 삼는 특이 요법을 개발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었다.
명석한 에를리히는 앞서 면역계 연구에 주력했을 때도 착색제 연구 성과에서 착안하여, 서로 전혀 관련 없게 보이는 두 분야를 접목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착색제가 세포의 특정 성분에 붙어 그 성분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면, 세포 특정 성분에 붙는 치료제 분자도 존재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분자가 세포의 주요 부분을 마비시킬 순 없을까? 에를리히는 그런 과정이 진행 가능하다면 특수 분자를 만들어 병원체를 죽이는 일도 가능하리라고 주장했다. 에를리히는 옳았다. 그가 세운 가설도 옳았고 그가 추정한 '자물쇠 열쇠' 메커니즘도 옳았다. 에를리히는 작은 약 분자가 세포에 들어가 표적과 결합하여 세포 기능을 마비시키거나 세포를 아예 죽여버리는 일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에를리히에게 큰 기회가 찾아온 때는 매독을 연구할 때였다. 그때 에를리히는 606번째 화합물(나중에 살바르산으로 시판된 매독 치료제)이 병원체만 공격하고 나머지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에를리히는 그의 화합물을 '마법 탄환'이라 불렀다. 마법 탄환이라는 표현은 주문을 제대로 걸면 총알이 특정인을 맞히게 된다는 오래된 미신에서 유래했다. 에를리히가 주로 코흐 연구소를 비롯해 독일의 여러 연구소에서 일하며 쌓은 선구적 업적은 화학요법 시대를 열었다. 그 시대에는 약이 특정 세포만 표적으로 삼고 나머지 세포는 해치지 않는 일이 가능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로베르트 코흐는 크게 성공한 과학자이지만, 연구부정행위로도 유명하다. 그런 부정행위는 과학의 불완전함은 물론 과학 산업계 고위층의 불완전함도 말해준다. 코흐처럼 복잡한 성격의 인물이 저지른 잘못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었고 과학 발전에 차질을 빚었다. 이를테면 코흐는 투베르쿨린 tuberculin이란 결핵 백신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백신은 효과가 없었다. 코흐와 그의 지지자들은 환자들이 너무 위중해 어떤 백신도 소용없었다고 주장하며 나쁜 결과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사실 코흐는 백신을 어떻게 만드는지 전혀 몰랐고, 코흐의 백신은 피접종자들에게 해로워서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코흐는 자신이 개발한 백신이 기니피그에게 아주 효과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 백신으로 치료한 기니피그를 증거로 제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단 한 마리도 내놓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더 나쁜 일이 벌어졌다. 1906년에 코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수면병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용감히 여행길에 올랐다. 감염된 체체파리에게 물리면 옮는 수면병은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죽음을 초래한다. 수면병은 식민지 무역 활성화에 꼭 필요한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아프리카의 유럽인 식민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코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가서 수면병 치료제로 아톡실을 추천했다. 아톡실의 초기 동물 실험 결과는 고무적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톡실에는 비소가 많이 들어 있었다. 고명한 코흐는 그 사실을 무시하며 독일 정부를 등에 업고 아톡실 치료를 감행했다. 아톡실은 값이 싸고 열대 지방에서도 잘 변질되지 않아 최상의 약이었다. 하지만 수면병을 치료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톡실을 복용한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은 눈이 완전히 멀어버렸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코흐는 고집을 부리며 결과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톡실의 효능을 믿었다. 생체 내 실험 결과가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아톡실이 수면병에 듣지 않는 이유가 투여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주민에게 투여하는 아톡실 양을 두 배로 늘리라고 권고했다. 동아프리카 지역의 임상 시험을 담당한 독일 당국은 그런 권고사항을 받아들여 빅토리아호 주변 지역에서 아톡실 투여량을 늘렸다. 그 결정은 현지 주민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독일 의사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꼼꼼한 과학자는 수많은 독일인에게 존경받다 보니 생전에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저지른 잘못 가운데 상당수는 사후에 알려졌다. 새로운 고위험 요법을 사용할 때 윤리적인 면을 따지는 제도적 규칙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터였다. 코흐가 공중보건 분야에서 저지른 잘못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잊혔다. 코흐 유골은 한 박물관 1층의, 색색 대리석으로 장식한 큰 방에 안치되어 있고 그 박물관은 전염병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코흐 연구소와 연결되어 있다.
코흐 유골이 안치된 묘에서 남서쪽으로 1,0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명성, 업적, 세계적 영향력 면에서 코흐와 맞먹는 사람의 무덤이 있다. 튀니스에서 테헤란, 상하이에서 상파울루, 부쿠레슈티(루마니아 수도)에서 방기(중앙아프리카 수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설립된 그의 이름이 붙은 연구소들은 그의 유산을 보여주는 증거다. (무하마드 H. 자만 / 『내성 전쟁』 / 7분의 언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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