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내성 전쟁 7 - 곰팡이액에서 찾아낸 페니실린

hope888 2022. 5. 31. 10:01

 1945년 12월 11일 스톡홀름에서는 말끔히 면도한 마른 체격의 스코틀랜드인이 연단에 올랐다. 바로 전날 그는 키 큰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를 만났는데, 왕은 그 과학자보다 훨씬 컸다. 알렉산더 플레밍 Alexander Fleming 경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공로로 곧 노벨상을 받을 터였다.

플레밍은 수상 연설을 할 때 하도 나긋나긋 말해서 참석자들이 귀를 쫑긋 세울 정도였다. 연설 말미에 그는 수상 업적이 된 발견물의 한계에 대해 경고했다.

 

페니실린은 사실상 무해한 물질로, 과다 투여로 환자를 중독시킬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과소 투여는 위험합니다. 실험실에서 페니실린에 내성을 띠는 미생물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미생물을 치사 농도 미만에 노출시키면 됩니다. 그런 일은 몸속에서도 더러 일어납니다. 누구나 가게에서 페니실린을 쉽게 구입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무지한 사람이 과소 복용으로 미생물을 치사량 미만의 약에 노출시켜 내성균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다분하지요. 예컨대 이런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아무개 선생이 인두염에 걸렸습니다. 그는 페니실린을 사서 복용합니다. 연쇄구균을 죽이기에 부족하지만 연쇄구균의 페니실린 내성을 키워주기엔 충분할 만큼 말이죠. 그는 그다음에 아내에게 균을 옮깁니다. 아무개 여사는 폐렴에 걸려 페니실린으로 치료받습니다. 연쇄구균이 이제 페니실린에 내성이 있어서 병이 치료되지 않습니다. 아무개 여사는 죽습니다. 아무개 여사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그야 물론 아무개 선생에게 있습니다. 페니실린을 부주의하게 사용해서 미생물의 속성을 변화시켰으니까요.

 

수백만 명에게 영웅으로 존경받는 플레밍은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은 연합국이 전쟁에서 이기는 데도 도움이 되었고 전 세계의 아픈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왔다. 그런데 알렉산더 플레밍 경은 의사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고 질문한 후 이런 답을 내놓았다. 아무개 씨는 페니실린을 부주의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아내를 죽이게 되었다. 교훈은 명확했고, 플레밍은 솔직했다. "페니실린을 사용할 때는 충분히 사용하십시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사연은 우연한 발견이란 개념으로 설명될 때가 많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8년 8월에 플레밍은 허둥지둥 휴가를 갔다. 나중에 본인 주장에 따르면 그는

서두르다 보니 실험실 창문 하나를 열어두고 떠나게 되었다. 창가에는 황색포도알균을 배양중인 페트리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9월 초에 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열린 창문과 페트리 접시를 발견했는데, 접시들은 하나만 빼면 다 괜찮아 보였다. 유독 한 접시만 균류로 오염되었고, 오염된 부분의 세균은 죽어서 고리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균류와 접촉한 세균은 모두 죽어 있었다. 플레밍은 그 균류-플레밍이 추후 논문에서 기술한 바에 따르면 '페니실륨 노타툼'이란 곰팡이에 세균을 죽일 만한 뭔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곰팡이액meould juice' 이 매우 효과적인 항생제가 될 잠재력을 지녔다고 결론지었다.

이 사연은 젊은 과학자들에게 그들이 선택한 직업에 우연과 행운이 필요 불가결함을 알려주기 위해 수없이 이야기되어왔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전부 사실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사연은 플레밍이 자신의 또 다른 발견물인 라이소자임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라이소자임은 콧물에서 계란 흰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생체 물질에 있는 항균성 효소다. 그런데 깜빡하고 열어둔 창문이 두 항생물질의 발견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대 과학 의학사에 밝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플레밍이 자기 사연을 윤색한 이유는 그가 꿈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길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제로는 플레밍이 때때로 부주의했으며 본인 주장만큼 엄격하고 세심한 과학자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플레밍은 균류 둘레에 생긴 고리 모양을 보고 배양접시에 어떤 강력한 물질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플레밍과 믿음직한 동료 스튜어트 크래덕은 곰팡이액의 항균 기능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곰팡이액에는 불순물이 많았는데, 세균을 죽이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하는 페니실린의 농도는 1퍼센트 이하였다. 플레밍은 화학자가 아니었고, 그의 비효과적인 정제 기법 때문에 곰팡이액의 효능은 대체로 신통치 않았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페니실린 정제법이 진전되지 않자 1930년대 중반에 플레밍은 새로운 일로 넘어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첫 발견물인 라이소자임을 연구하는 일로 돌아갔다. 세상도 그랬다. 당시 설파제가 널리 쓰이다 보니, 1929년에 논문으로 발표된 플레밍의 최초 발견은 10년 가까이 잊혔다.

1930년대 말에 페니실린 발견 장소인 런던 성모병원에서 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나타났다. 옥스퍼드대학교 윌리엄 던 병리학스쿨 소속 연구팀이었다. 연구원 중에는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 라는 로즈 장학생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병리학자가 있었는데 얼마 전 학과장으로 임명된 터였다. 그의 곁에는 뛰어난 화학자 언스트 보리스 체인Ernst Boris Chain이 있었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인인 체인은 런던 유대인 망명자 위원회의 후원을 받았다. 또 다른 연구원으로 노먼 히틀 리가 있었다. 그는 생화학을 전공했으나 실험기구를 고안하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연유로 연구팀이 플레밍의 논문에 주목했는가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가장 신빙성 있는 이유로 연구원들이 이미 라이소자임을 연구하던 중이었다는 점을 꼽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플레밍 논문을 모두 살펴보게 되었을 공산이 크다. 또 다른 가설에서는 플레밍 제자였던 셰필드대학교 병리학 교수 세실 조지 페인Ceil George Paine이 플로리에게 페니실린에 관해 이야기했으리라고 본다. 플로리는 1932~1935년에 셰필드대학교 교수였는데, 당시 페인은 이미 페니실린에 관심이 있었다. 게다가 페인이 어린아이들의 눈병을 치료하려고 미정제 페니실린을 사용했을지 모른다는 증거도 있다.

플로리는 1935년에 옥스퍼드대학교로 적을 옮겼는데, 그 무렵 던 병리학 스쿨은 라이소자임 등의 천연 항균성 화합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연구팀은 페니실린을 안정화하고 충분히 추출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인이 보기에 페니실린의 수율이 낮은 원인이 분자 구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체인에 따르면 문제는 체인의 생각이 정말 옳다면 쉽게 개선 가능한 요인에서 비롯했다. 체인은 영국 화학자들의 기술 부족이 문제라고 확신했다. 플로리는 체인에게 다른 사람들, 특히 영국 화학자들이 못 한 일을 해냄으로써 그 주장을 입증해보라며 도발했다. 체인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 일에 착수하면서 현명하게도 히틀리에게 도움을 구했다.

히틀리는 체인이나 플로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다. 그는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재료로 기구를 고안했고, 연구팀이 순도 높은 페니실린을 얻기 위해 힘든 실험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플로리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리는 직감에 따라 에테르로 곰팡이액을 추출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그의 직감은 옳았다.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이제 수율이 높아지면서 동물 실험에 사용할 만한 양의 페니실린이 만들어졌다. 자부심, 도전정신, 독창성, 직감을 좇는 단호한 의지가 통한 결과였다. 히틀리는 정제 페니실린을 플로리와 체인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그 물질의 효능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

1940년 5월 25일에 플로리는 실험을 시작했다. 쥐 여덟 마리를 두 집단으로 나눠 네 마리는 대조군으로 두고 네 마리에게는 정제 페니실린을 투여했다. 그리고 여덟 마리 모두를 화농성연쇄구균으로 감염시켰다. 대조군 쥐 네 마리는 곧바로 죽었으나 실험군 네 마리는 살아남았다. 히틀리는 새벽 3시 45분까지 연구실에서 실험 과정을 지켜본 후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페니실린이 실제로 중요한 듯이 보인다." 이는 절제된 표현이었다.

옥스퍼드에서 연구 활동이 이어지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면서 부상병 수가 증가했다. 연구팀은 쥐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 귀중한 약과 관련된 현장의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던 스쿨의 성과에 주목하는 중, 1940년 9월 2일에 연구팀은 스코틀랜드 말씨를 쓰는 중년 남자가 실험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알렉산더 플레밍이었다. 플레밍은 체인에게 자신의 '오래전 페니실린'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플레밍은 던 스쿨의 연구 현황도 궁금했겠지만, 자신의 공로를 정당히 평가받는 일에도 신경 썼을 공산이 컸다.

던 스쿨 연구팀은 페니실린이 치료제로서 가치 있음을 실증하기 위해 어서 인체 실험 결과를 내놓아야 했다. 그 신약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많았지만, 영국 제약회사들의 상업적 관심은 전무했다. 페니실린 자체와 그 약의 효능 및 순도에 대해 알려진 게 너무 없어서 제약회사들이 선뜻 나서지 않고 있었다. 후원과 자금을 끌어 모으려면 연구팀은 페니실린을 더 많이 만들어야 했고, 그러자면 전례없는 규모로 작동할 더 효과적인 장비를 갖춰야 했다. 언제나 독창적이며 혁신적인 히틀리는 더욱 효율 좋은 장치를 고안해, 성인에게 투여해도 될 만큼 순도 높은 페니실린을 충분히 만들어냈다. 드디어 세상 사람들에게 페니실린의 진가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인간 감염증에 대한 페니실린의 치유력을 처음 시험한 대상은 옥스퍼드 경찰관 앨버트 알렉산더 Albert Alexander 였다. 알렉산더는 누런 고름이 나오는 감염증에 걸렸다. 설파제를 공격적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주 사이 감염은 폐까지 진행되었다. 1941년 2월 12일에 그는 새로 정제된 페니실린을 투여받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알렉산더는 얼굴이 부어오르고 상처가 깊이 감염된 상태였으나, 정맥주사를 맞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증상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열이 내리면서 몸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그는 똑바로 앉아서 식사도 했다. 주사 맞기 하루 전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알렉산더는 체구가 큰 성인 남자여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페니실린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게다가 히틀리 연구팀이 만든 페니실린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었다. 순도가 5퍼센트에 불과하다 보니 알렉산더에게 필요한 양은 던 스쿨 연구팀의 비축분보다 많았다. 히틀리 연구팀이 급히 약을 더 많이 만들었으나 앨버트 알렉산더는 1941년 3월 15일에 죽고 말았다. 알렉산더 죽음은 특효약을 기대한 모든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래도 상황을 낙관할 만한 이유는 남아 있었다. 그 약은 효과가 있었다. 양이 충분하지 않았을 뿐이다. 해결 과제는 생산량 증가였다.

기존 방법으로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던 스쿨 연구팀은 페니실린을 고작 그램 단위가 아니라 킬로그램 단위로 생산해내야 하며 더 높은 순도를 달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대로 정제하려면 정부나 사기업의 투자가 필요했다.

1941년 3월경에 영국은 나치 독일의 총공세에 홀로 맞서고 있었다. 이미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터라, 영국에는 던 스쿨 연구팀을 도와줄 만한 기업이나 기관이 한 곳도 없었다. 연구팀은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플로리와 히틀리는 10년 넘게 플로리를 후원해온 록펠러 재단의 도움으로 1941년 7월 2일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페니실린 연구를 함께할 동업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플로리는 먼저 뉴헤이븐에 가서 예일대학교 생리학 교수인 친구 존 풀턴 John Fullton을 만났다. 풀턴이 플로리를 처음 만난 때는 둘 다 로즈 장학생이던 1920년대 초였다.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얼마나 친했냐면 전쟁 중에 플로리가 자식들을 미국으로 보내 풀턴에게 맡겼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풀턴은 플로리 부탁을 들어주었다. 풀턴의 연줄로 플로리는 과학을 국가 안보에 활용하는 일을 맡은 전미연구평의회National Research Council 의 고위 임원을 소개받았다. 그 덕분에 플로리와 히틀리는 시카고 근교의 피오리아에 가서 미 농무부 산하 북부지역연구소 Northern Regional Research Labs의 연구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북부지역연구소는 이미 페니실린의 수율과 순도를 높이는 작업에 착수했고, 최상의 푸른곰팡이 Penicillium 공급원을 찾으려고 세계 도처에 요청을 보낸 터였다. 그런데 최상의 샘플은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까운 교외의 농산물 직판장에서 발견되었다. 북부지역연구소에서 일하는 세균학자 메리 헌트 Mary Hunt가 상한 멜론을 한 통 샀는데, 바로 그 멜론이 최상의 푸른곰팡이를 만들어냈다. 북부지역연구소의 다른 과학자들은 그 곰팡이를 배양하는 데 이상적인 조건을 찾는 일과 수율을 높일 장치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저예산으로 실험을 수행하는 던 스쿨과 달리 북부지역연구소는 자원이 무척 풍부했다. 그곳에서 생산해내는 페니실린 양은 던 스쿨 연구원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매우 많았다. 하지만 전쟁 중인 유럽 곳곳의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1941년 8월에 플로리는 히틀리를 피오리아에 남겨 두고 동쪽의 필라델피아로 가서 앨프리드 뉴턴 리처즈Afred Newron Richarch 란 옛 동료를 만났다. 리처즈는 이제 미 과학연구개발국 산하의 의학연구위원회CMR 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다. 과학연구개발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 명령에 따라 창립된 기관으로, 국방과 관련된 과학 · 의료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지원받고 있었다. 플로리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리처즈는 정부가 페니실린 생산을 지원하도록 당국에 권고하겠다고 약속했다.

1941년 9월에 플로리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리처즈는 페니실린 프로젝트에 재정을 지원하도록 로비 활동을 계속했다. 리처즈와 그의 상관 버니바 부시 Vannovar Bush가 힘쓴 덕분에 1941년 10월 과학연구개발국과 사기업 대표들의 모임이 마련되었다. 그 회의에는 의학연구위원회 및 과학연구개발국의 구성원과 제약회사 화이자, 머크Merck, 레딜Lalarle의 주요 임원 등이 참석했다. 최대 현안은 페니실린이었지만, 재정지원과 관련된 결정은 없었다.

다음 회의는 12월에 열기로 했다. 그 무렵 미국의 참전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기습함에 따라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 참가를 선언했다.

 

과학연구개발국은 일본이 공격한 지 열흘 만에 회의를 열었다. 이제 회의 목적은 던 스쿨 연구팀을 돕는 게 아니라, 연합군이 감염증으로 죽지 않도록 막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러기 위한 최선책은 순도 높은 페니실린의 신속한 대량 생산이었다. 미국 정부의 지원, 대형 제약회사들의 관심, 농무부의 자원 덕분에 페니실린 생산의 무게중심은 영국에서 서쪽의 미국으로 이동했다. 특허 등록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플로리, 히틀리, 체인은 소외당했다. 그런 특허에서는 제품 자체보다 발효법과 정제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더 난처한 문제는 농무부 산하 북부지역연구소의 미생물학자 앤드루 모이어 Andrew Moyer가 페니실린 생산용 발효법의 개발자로서 특허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노먼 히틀리는 피오리아에서 모이어와 긴밀히 협력해 그 발효법을 연구했지만 특허증 어디에도 이름이 실리지 않았다.

미 정부의 지원, 미 농무부의 전문성, 제약회사들의 투자에 힘입어 페니실린은 이전엔 상상도 못 했던 속도로 생산되었다. 수백만 달러가 연구 후원금으로 여러 대학에 유입되었고, 수천만 달러가 여러 제약회사에서 연구와 생산에 투자되었다. 신축 페니실린 공장 열여섯 곳이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대규모 조세 감면 조치 덕분에 제약회사들은 거액 투자에 따르는 손실 위험에서 자유로웠다.

미국은 투자금과 전문 지식의 수준이 상당하고 산업 시설이 당장 공격받을 위험이 없다 보니 금세 영국보다 성큼 앞서나갔다.

1944년경에 미국 페니실린 생산량은 영국보다 40배 더 많았다.

그 약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미국 제약 산업의 미래도 바꿔놓았다.

페니실린은 수많은 사람에게 구세주로 여겨졌다. 임상 시험을 거쳐 전장에서 사용한 결과 뛰어난 효능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오남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혁신을 촉발한 곰팡이액의 발견자 플레밍은 노벨상 수상 직후, 유창한 언변으로 경각심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 무렵 냉전시대의 문턱에서 소련은 그 약을 발견한 사람이 실은 소련 과학자라고 주장했다. (무하마드 H. 자만 / 『내성 전쟁』 / 7분의 언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