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시절
나는 대학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고향 친구들과 군에 입대를 하였다. 4명은 같은 날 입대를 하였고, 두 친구는 우리보다 한달 가량 늦게 입대를 하였다.
나는 대학 시절의 여름 방학 동안 시골에서 같이 입대할 친구들과 술과 닭서리 하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드디어 72년 9월 22일 눈물을 조금 흘리며 머리를 박박 깎아 버리고 우리 넷은 부모님과 고향 어르신들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광주를 거쳐서 논산 연무대에 도착하였다. 약 10여일 동안 대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나는 훈도가 되어 사역병, 취사병, 불침번 등을 내 손으로 계획을 짜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들은 나의 친구들을 제외시키곤 하면서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0월 7일 제 28연대 4중대에 배속 명령을 받아서 군번 12303638의 훈련병이 되었다.
훈련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배고픔이었는데 그 때의 배고픔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가 훈련을 받을 때 추상같은 구타 금지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기 때문에 내무반장과 하사관들은 우리 훈련병들을 아저씨(?)라고 경칭을 써 가며 잘 대해 주었다.
다행히 나는 어떠한 훈련이라 할지라도 즐겁게 잘해 내었고 사격도 옛날부터 공기총을 쏴 본 경험이 풍부한 편이라서 특등 사수가 될 수 있었다.
6주 훈련 마지막에는 측정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다른 소대에까지 불려 가서 남 대신에 총을 쏴 주고 그 대가로 고급 담배와 점심을 대접받기도 했다.
나와 같이 간 동네 친구들은 최전방으로 가게 되었으나, 나는 다행히 후반기 교육을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서 광주에 있는 상무대에서 경포 교육을 받게 되었다. 경포라는 것은 대공포의 하나로서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발칸, 미사일, M - 55, M - 40 등의 중장비를 배우는 것이었다.
경포 교육은 거의 대졸, 대재의 고학력 소지자를 차출하여 교육하는 곳으로 그곳의 군기는 낙엽까지도 직각으로 떨어진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그곳에서 진짜 군대의 매운 맛을 톡톡히 체험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병 시절에는 편했으나 상무대에서의 후반기 교육은 그 엄한 군기 때문에 치르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무반장은 하사 계급장을 단 선임자가 맡았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고 하사라는 계급장이 그렇게 높아 보일 줄은 몰랐다.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번개같이 침구, 옷 등을 정돈하고 연병장에 집합하여 일조 점호를 받고 구보 행진을 하는데 손이 앞사람의 뒤통수까지 올라가야 하고, 군가를 부를 때 목청껏 부르지 않으면 오리 걸음, 낮은 포복, 높은 포복, 원산 폭격 등 20여 가지의 기합들이 우리들을 안달하면서 기다리고 있기 일쑤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사뭇 발악적으로 군가를 부르며 뛰어 다녀야 했다. 세수도 3초 이내에 해 치워야 했고 아침 청소를 한 뒤에는 다시 집합을 하여 머나먼 식당까지 다시금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르고 행진하고 나서 식당 앞에서 30여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동 자세로 서서 기다리는데 엄동 설한의 모진 추위를 견디다 못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단체 기합으로, 군기 없다는 이유로 12월 북풍 한설 몰아치는 식당 앞에서 많은 군인들의 환시리에 주먹 쥐고 엎드려 뻗기를 굵은 왕모래 위에서 해야만 했다.
아침 식사를 주는데 그 양이 고양이 눈물 만큼이어서 후딱 먹어 치우고 부리나케 세면장에 달려가서 얼음을 깨고 맨 손으로 식기를 씻는데, 매일 매일 기합을 받은 손이라서 손등에는 모두다 모래들이 깊이 파고들어 곪아서 부풀대로 부풀어서 놀짱하게 고름이 괴어 있는 손으로 기름기 있는 식기를 수세미나 비누 하나 없이 맨 손으로 수십 번 씻고 씻어서 식기 검사를 하는 기간 요원들에게 가지고 가면 식기에 기름기가 남아 있다고, 군기가 빠졌다고 주먹과 발이 사정없이 면상으로 날아 온 다음에는 식기를 입에 물고 식기 반납이 끝날 때까지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비상 수단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씻고 또 씻은 다음 눈물과 콧물이 얼룩진 조그마한 손수건으로 식기를 반들반들하게 닦아서 가까스로 반납하고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집합하여 학과 출장을 하여 병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다시 저녁 때가 되면 조금 자유 시간을 주면 어디가 덧나는 우리 내무반장은 우리와 철천지 원수 사이인 모양으로 내무반에 꼼짝도 못하게 앉혀 놓고 기합 주고, 겁주고, 관물 정돈시키고, 암기 사항을 외우도록 명령하며 도통 정신없이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10여분간의 휴식 시간이면 배가 고파서 팥 빵 20여 개나 사서 동료들 몰래 먹어 치우기 위해 변소 칸으로 들어가 앉아 부리나케 먹어 버리고는 시치밀 뚝 떼고 내무반에 들어와서 또 정신 교육을 정신없이 받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점호를 치는데, 취침하기 전의 점호가 하루 일과 중 가장 괴로운 시간이며 공포의 시간이었다.
점호가 시작되면 내무반장은 곡괭이 5파운드 짜리 몽둥이를 꺼내 들고 내무반 바닥을 한번 딱 치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모두는 얼굴이 삽시간에 ‘데드 마스크’가 되어 버렸다.
악의 화신(?)인 내무반장은 점호 점검시 한 두명씩 지정하여 ‘엎드려 뻗혀’를 시켜 놓고 몽둥이를 날리면 마치 개구리를 회초리로 한대 딱 갈기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쭉 뻗으며 바르르 떤 다음 고꾸라지는 모습들을 매일 매일 보면서 우리들은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토요일만 되면 우리는 내무반장에게 외출을 무사히 잘 다녀오시라고 돈을 상납하지 않으면 ‘깍지 끼고 침상에 발 올려’ 라는 무지무지하게 괴로운 벌을 내리기 때문에 우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상납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5주의 지옥 훈련을 마치고 졸업을 할 때 나는 당당히 1등 상인 소장 상을 받는 영광을 가졌다.
그때 기간 요원들은 나를 그곳 부대에 남기려고 압력을 넣기도 하고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나는 한사코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모두 거절해 버리고 103 보충대를 거쳐서 원주에 있는 121 고사포 부대에 배속되었다.
103 보충대에 있을 때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전쟁이 끝나서 바로 귀국한 「물 병장」들이 많았다.
대대 본부에 배속되어 군인 트럭에 실려 갈 때 원주에서 계속 북쪽으로 한정없이 올라가는 바람에 우리 모두는 최전방까지 가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원주와 횡성간의 비행장 앞에 위치하여 섬강을 바라보면서 비행장을 보호하는 부대가 나의 근무지였다.
맨 처음 부대에 들어가니 여러 가지 모양의 북한 비행기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고 화목한 느낌이었다.
나는 안심이 되어 이곳에서 제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사장에 가서 저녁을 먹기 위하여 잔뜩 긴장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중·고참들이 다가와서 잘들 왔다고 격려해 주어서 더욱 좋았고, 카투사보다도 더 편한 곳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저녁을 먹고 내무반 한쪽에 꼼짝 않고 앉아 있으려니까 고참들이 한사람씩 신고식을 시켰다.
그 때 내무반장이 나를 지적하면서 사회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하기에 나도 긍정의 표시를 했다. 사실 나는 내무반장을 꿈속에서조차 본 경험이 없지만 말이다.
대대 본부에서 타 소대로 배속되기를 기다리는데 나는 그곳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왜냐하면 후반기 교육에서 최우수상을 획득했고 착실한 용모(?)와 대학 재학생이고 신체 건강하며 운전 면허나 주산 등 자격증이 많은 일류 사병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인사 과장이 부르고 그 다음은 정보 과장이, 이런 식으로 수송부까지 불려 가서, 같이 근무하자는 것을 거절하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고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모두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거절했다. 대대 본부에 남으면 괴롭고 다른 포대로 배속되면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고참들의 말만 믿었기 때문이다.
모두다 나를 욕심 내었지만 과장들 중에서도 가장 선임자인 본부 포대장이 나를 기어이 자기 휘하인 포대 본부에 배속시키고 말았다.
맨 처음 상면하여 나의 주산 실력을 묻기에 주산 1급이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대대 본부 선임하사가 1종계를 보면 좋겠다고 말을 하였다. 1종계란 모든 군인들의 식생활을 총괄하는 직책으로서 군대 보직 중 특급이라는 말을 해 주었기에 나는 분초 생활의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1종계의 책임자가 제대해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이등병인 나는 그 날부터 본부 요원 500여명의 식생활에 대한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1종계의 일이란 아주 커다란 창고의 책임자인데, 그 창고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곳으로서 먹는 것으로는 없는 것이 없는 곳이다.
나는 매일 매일 한번씩 식수 인원에 따라 쌀, 보리, 된장, 간장, 식유, 멸치, 고춧가루, 고기 등을 배분하여 취사병들에게 내 주면 취사병들은 내가 내 준 재료를 이용하여 맛있게 식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닌게 아니라 군대에서 제일 좋은 직책 중 하나였다.
고참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소령까지도 나에게 부탁할 때 사정 조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만약 명령 조로 나에게 부탁을 하면 재고가 부족하다고 거절해 버리기 때문에 나에게는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대란 먹는 것에 대해서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장교라 하더라도 일종계에게는 약자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군대 생활 중 1종계라는 직책 때문에 재미있는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개 사병인 주제에 장교들과 어울리며 숫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더구나 대대장까지도 나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다. 심지어는 군대 짠밥 찌꺼기로 돼지들을 키웠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새끼를 낳게 되었을 때 돼지 당번이 따로 있었지만 나에게 산파 노릇을 하도록 대대장의 특명이 내려올 정도의 신임이었다.
한마디로 제 121 고사포 부대의 제일의 일군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군대 생활을 한 것이다.
나는 한번도 돼지 새끼를 받아 본 경험도 없었고 본 일도 없었지만 군대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특수한 곳이라서 할 수 없이 의무실의 가운을 걸치고 수술용 메스며 장갑,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조수를 대동하고 왕진하여 산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돈 공에게 조심 조심 접근하여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돈 공이 갑자기 “꽥!”하면서 힘을 주기에 나도 모르게 수술용 고무장갑을 낀 손을 돈 공의 엉덩이 부분에 갔다 댔더니 따뜻하고 미끄러운 것이 손 안으로 뚝 떨어졌다. 나는 빨리 손을 써서 수술용 실로 태를 잡아매고 탯줄을 가위로 잘라 내고 나서 조수에게 탈지면을 이용하여 돼지 새끼를 깨끗이 닦아 내도록 하고 또 다시 나는 다른 새끼를 기다리곤 하였다. 그 때 돼지가 새끼를 순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대대장이 거창한 수술실(?)로 거동하셨으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피투성이의 손으로 갓 태어난 새끼들을 받아 태를 자르고 하다가 7번째 돼지 새끼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사지를 벌벌 떨며 곧 숨을 멈추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경련을 일으키기에 나도 모르게 피투성이의 돼지 새끼를 내 입으로 인공 호흡을 시켜서 가까스로 살려 냈다.
그 광경을 우연히 보시게 된 대대장은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게 좋아하시면서 가셨다는 말을 포대장님으로부터 들었다.
돼지 새끼는 총 12마리를 낳았다.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지만 보람을 느끼며 내무반에 들어와서 푹 잤다.
그 다음날 조회 석상에서 대대장은 인공호흡으로 돼지 새끼를 살려 내는 광경을 설명하시면서 침이 마르게 나를 칭찬해 주셨다. 500여명의 장병들 앞에서 대단한 칭찬을 받으니 나는 오죽 기분이 좋았을 것인가?
본부 요원 중 가장 고참인 목수 일을 하는 중졸 출신의 윤 병장과 취사장의 고 병장은 우리 본부 요원을 심심하면(?) 변소 뒤나 취사장 뒤, 아니면 목공실로 집합시켜 개 패듯 두들겨 패곤 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몽둥이를 인정 사정없이 내려쳤다.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할 때 본부 중고참에게서 저녁 먹고 몇 시까지 어디어디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면 우리 졸병들은 아침 밥맛까지 싹없어지고 하루 내내 불안과 공포로 떨면서 생활하다 보면, 속도 모르는 우리 포대장은 어디 아프냐고 묻지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이란·······
저녁에 몽둥이를 들고 집합하면 엉덩이가 내 엉덩이가 아닐 때까지 얻어맞고 헤어지곤 하였는데 아마도 학력 콤플렉스가 제일 컸던 모양이다.
나는 하도 고참들이 귀찮게 하기에 속으로 제발 저 고참 녀석들을 어떤 귀신이라도 좋으니 잡아가 주소서 ! 하고 빌기도 했었다.
그 기도가 효력을 발휘했던지 목공인 윤 병장은 섬강에서 물놀이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 뒤부터는 윤 병장은 착하게 변해서 우리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나도 중고참이 되었다. 내 직속 고참은 문 병장으로 우리들을 형제같이 대해 주었으며 한번도 우리 본부 요원들을 집합시켜서 몽둥이를 든 일이 없었다.
그 대신 내무반장이 가끔씩 단체 기합을 주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포대장이 우리 사병들을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 포대장도 고졸 출신으로 우리들에게 대학교의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젠 요령이 늘어 내무반에서 몽둥이 타작의 징조가 보이면 나하고 친한 주임 상사님께 부탁을 드려서 섬강에 같이 낚시를 가 버리거나 외출증을 몰래 끊어 부대 밖으로 나가서 인근 주막에서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내무반이 조용해질 때에야 슬그머니 술병 하나를 차고 내무반에 기어 들어가서 내무반장에게 상납하기도 하고, 아예 1종 창고에 들어가서 불까지 끄고 쌀 가마니 더미 위에 벌렁 누워서 식용유에 건빵을 찍어 먹으며 목이 막히면 가끔씩 사탕을 먹는 등 시간을 보내며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군대 생활을 하다 보면 느는 것이 요령인가 한다.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병장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포대장은 1종계 조수 한 명도 주지 않으면서 나에게 “PX”까지 겸임하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1종 창고와 “PX"에는 비밀(?)이 많은 부서이기 때문이다.
“PX"에는 당구대가 있어서 장교들과 당구를 치며 아예 내무반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군대는 검열이 매우 많아서 검열 준비를 하다 보면 제대할 때가 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이다. 검열 준비를 아무런 하자 없이 완전 무결하게 준비하여 검열을 받곤 하였기 때문에 많은 장병들은 나를 더욱 더 인정하여 주었다.
그런데 “PX"에서 조그마한 도난 사고가 며칠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나는 콜롬보 형사가 되어 동기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1주일만에 그 좀도둑을 잡을 수 있었다. 범인은 서울 모 고교의 교장 선생님 아들이었다. 군것질이 심한 그 졸병은 집에서 보내 준 돈을 다 써 버리고 나면 “PX" 열쇠를 내 호주머니에서 몰래 빼내어서 한 밤중에 아무도 몰래 가끔씩 과자 등을 꺼내 먹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하여 변상하는 선에서 일을 끝내고 나니 속이 시원하였다.
나는 군대 생활 3년 생활을 인생 30년과 동일시하고 싶은 심정이다. 왜냐하면 군대 생활이란 인간 이하의 신분에서 대통령의 신분까지 두루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나이라면 꼭 한번은 군대를 다녀올 만한 곳이라고 권하고 싶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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