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잠비크의 십자성
월드비전의 한팀이 되어 아프리카 모잠비크로 봉사활동을 가게 되었다. 홍콩에서 남아공으로, 말라위로 날아가서 버스로 모잠비크에 들어가야 하는 비행기만 타는 시간이 19시간이 되는 험로다. 저녁에 인천공항을 이륙해서 3시간여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공항에서 약 2시간 정도를 지루하게 기다려서 남아공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한번 이륙하면 논스톱으로 13시간을 비행해야 하는 우리들의 비행기가 이륙 직전에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타이어에서 발생한 연기가 엄청났다. 수 십대의 소방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달려오는 등 무척 당황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기장이 당황스레 빨리 멘트를 해서 어떤 사람은 운항 프로그램이 문제가 있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엔진에 문제가 발생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등 사람마다 해석이 달랐다. 멘트가 나온 후 2시간여 동안을 비행기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는 에어컨도 꺼졌지만, 탑승객들은 불평 없이 조용히 제자리에 앉아서 빨리 고쳐서 다시 비행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수고도 허사가 되어서 300여 명이 넘은 탑승객들은 홍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 날 남아공을 거쳐서 말라위로 날아갔다.
말라위의 카뮤즈 국제공항에는 레이저 검사대가 없어서 승객들의 짐을 일일이 열어보면서 검색했고, 마약 탐지견도 없었다. 공항을 빠져 나온 우리는 미니버스를 탈 수 있었다. 길거리에는 맨발의 주민이 한둘씩 질주하는 자동차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져서 불빛 하나 없는 길을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내 눈에는 목숨을 건 도보여행 같았다. 그들은 왜 그런 위험한 길을 걸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살인적인 속도로 달리는 미니버스에서 우리들은 공포의 40여 분을 떤 다음에 드디어 말라위의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 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니 옛날에 매일 저녁마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던 그때, 매일 볼 수 있었던 거대한 은색의 하천 같은 은하수가 눈앞에 또렷하게 펼쳐졌다. 은하수 주변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랫말에 나오는 십자성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 눈앞에 있을 그 십자성이 나의 아프리카 여행을 축하해 주는것 같았다.
도마뱀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다음에 새벽 4시 30분에 추워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프리카에서 추위에 떨면서 지낸 밤이다. 밖에 나가니 기분 좋은 새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마치 내 고향에 온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 키 정도의 이름도 모르는 잡초가 바싹 마른 들판을 거닐면서 혹시나 맹수가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많은 주민이 머리에 나무, 물동이 등을 이고 돌아다녀서 나도 용기를 내었다.
아침은 구하바 주스, 달걀부침, 바나나, 소시지, 채소, 콩, 볶음밥 등으로 먹었다. 일행 중에 인삼차를 가지고 온 사람이 우리에게 인삼차를 따끈하게 타 주어서 고마웠다. 마을 입구에 유치원 같은 곳이 있어서 가 보았다. 30여 명의 유치원생이 갓난애를 등에 업은 젊은 여자 선생님 한 분에게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교육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놀면서 아이들을 돌봐 주는 것 같았다. 사슴 같은 눈동자라서 슬픔이 느껴지는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다 떨어진 옷과 콧물에 얼룩진 얼굴의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자그마한 손을 잡아주고 마음속으로 격려해줬다. 이 아이들이 제발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 해 주시고, 도중에 죽지 않고 잘 자라서 가난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기도했다. 우리가 그들 곁을 떠나려고 하자 그들은 합창으로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 주면서 춤을 추었다.
멀리에서 일단의 염소 떼와 소 떼들과 함께 두 명의 어린 목동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커다란 장검을 휘두르면서 장애물들을 쳐 내며 짐승들의 길을 만들어 가며 몰아가고 있었다. 건기이며 겨울철이라서 풀이 바짝 말라, 뜯어 먹을 풀이 없는지 짐승들은 매우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한참이나 따라가다가 숲 속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청년을 만났다. 가까이 가서 보니 대학생이었다. 나는 내 신분을 밝히고 공부하고 있는 책도 보고, 그가 쓴 노트도 살펴볼 수 있었다.
노트에는 잘 쓴 영어로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가상해서 내가 아끼던 고급 볼펜으로 그의 노트에 'South Korea' 라고 쓰고, 볼펜을 선물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했다. 비록 작은 성의이지만 그 대학생이 매우 고마워해서 내 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모잠비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말라위 국경선을 통과한 후에 모잠비크 국경선을 지나야 한다. 두 나라의 국경선의 검문소는 1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에 있었다. 두 개의 국경선 검문소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맨발의 아이들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바나나나 땅콩 등을 팔고 있었고, 고구마와 같은 것들을 쌓아놓고 즉석에서 구워 팔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상처투성이의 맨발에 편안한 신발을 신겨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슬리퍼나 신발을 신겨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하겠다.
날씨가 15도 정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차가운 날씨에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남루한 단벌옷에 몸을 떠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고급 차에 밍크코트를 입고 멋진 부츠를 신고 활보하는 사람도 있었다. 빈부의 격차를 실감할 수 있는 국경선이다.
국경 수비대가 일일이 여권 번호와 비자 번호를 써넣으면서 출입국을 통제하다 보니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두 곳의 검문소를 거쳐서 입국한 우리는 모잠비크에서 대기 중인 두 대의 지프에 나누어 타고 '도무에' ADP로 향했다.
비포장도로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모잠비크 ‘테테’ 지역의 월드비전 스태프들이 또 다른 지프를 타고 나타났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동행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테테지역의 월드비전 사업체의 책임자들로서 각 지역에서 우리를 대접할 음식들을 만들어서 나타난 것이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하염없이 달렸다. 먼지가 얼마나 날리던지 평생 마실 먼지를 그날 하루 만에 다 마신다고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먼지 속을 견뎠다. 지프에는 우리의 몸을 지탱해 줄 손잡이도 없었다. 비포장도로를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는데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온몸이 아팠다. 우리는 그 길을‘마사지 로드’라고 명명했다. 얼마나 흔들리고 요동치는지 위장병은 낫고 허리 병은 도지게 되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3 시간을 시달리면서 달리는데, 걸어 다니는 주민은 온통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다. 그래도 그들은 원망스런 눈으로 먼지를 만들어 내는 우리 차를 노려보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탄 차는 지붕이라도 있지만, 주민이 탄 차는 지붕이 없는 트럭에 가득 탄 사람들이 교통사고라도 나면 얼마나 크게 다칠까 걱정스러웠다.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남부에 있는 나라로서 인구는 약 2천1백만 명에 면적은 무려 80만 1천 ㎢로서 우리나라보다 8배 이상이나 더 큰 나라이다. 수도는‘마푸토’이고 대통령 중심제이며, 기대 수명은 41.4세이며 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은 12.2%로서 심각한 수준이다.
점심을 먹은 후에 옆에 있는 도무에 보육원을 방문했다. 70여 명의 고아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낯선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특히 3명의 갓난애는 보모들 품에서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그들의 엄마들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고 한다.
인천 학생들이 지원해 주고 있는 성금은 이곳 아이들의 식비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 운영 악화로 아이들에게 매일 3끼씩 제공하던 식사를 한 끼로 줄였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들은 우리를 환영하는 인사말과 함께 학생들이 배워온 춤 솜씨, 노래 솜씨를 보여주었다. 힘차고 활기있게 춤을 추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모잠비크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보육원을 나와서 우리는 또다시 먼지투성이의 길을 3시간가량을 더 달렸다. 지금보다 더 오지에 있는 지에데 초등학교에 갔다.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에 몇 년 전에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교실 두 동을 중축해 주고 교장 숙소 및 가구를 지원함으로 학령기 아동들의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한 결과로 도무에 지역의 지역사회, 특히 아동들의 풍성한 삶에 기여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벌써 주민이 구름같이 모여서 우리를 환영하는 춤을 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였다. 우리를 열렬히 환영해 주어서 지금까지의 고난의 행군(?)이 즐거움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부하는 칠판은 벽의 한가운데에 검정페인트를 칠한 어설픈 칠판이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곳이며, 의자의 등받이가 각도가 맞지 않아서 내가 앉아 보니 너무나 불편했지만, 그들에게는 비를 피할 수 있고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가면 춤'을 보여 주는 등 그들 나름대로 우리를 대접하려고 열심이었다. 특히 주민들은 흥겨운 춤을 추며 계속해서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지역 주민이 다 나서서 우리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우리의 조그마한 도움이 그들에게는 무척 고마운 것이라서 그런 환영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의 취약 가정을 방문했다. 주민들도 학생들도 거의 다 따라왔다. 지난번 우기 때에 집이 반파되어서 천막 같은 것으로 허물어진 한쪽 집을 가리고서 가까스로 생활하고 있는 가정이었다.
무너져 내린 비좁은 집에서 12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집 앞에 새로운 집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주민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서 가지고 간 선물을 그 가족에게 전달해 주며 격려했다.
열렬한 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우리는 또다시 먼지투성이의 비포장도로를 3시간 정도를 달려서 오후 7시에 국경선에 도착했다. 힘겨운 일정이었지만 아무 탈 없이 잘 견딘 일행들이 대견하다고 서로 격려했다. 이런 봉사 활동을 닷새 정도를 더 했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에서 나는 남을 돕는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을 돕는 일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낀 보람찬 여행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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