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잠비크에 생명수가 되기를
말라위나 모잠비크의 주민은 땔감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해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땔감을 장만하러 다니느라 고생이 많다. 도로 곳곳에 장작을 쌓아 놓고 팔거나 자전거에 장작을 마치 예술작품처럼 쌓아서 팔러 다니는 사람도 많이 봤으며, 숯을 팔기도 했다.
주민 대부분은 사탕수수를 씹고 있었다. 담배 피우는 주민은 보지 못했다. 담뱃값이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대신 그들이 너무 자주 사탕수수를 즐겨 씹어 먹으니, 이빨도 나빠질 것이고 건강에 해로울 터인데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먹는 것이 부실하므로 당뇨환자는 없다지만 이곳의 평균 수명이 40여 세라고 하는데 사탕수수 때문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프 안으로 누런 먼지가 너무나 몰려 들어와서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견뎠다.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3시간여를 견디었다. 차 안에는 잡고 견딜만한 손잡이 하나도 없어서 의자 귀퉁이를 잡고 온몸으로 견뎠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은다울라’ADP 지역이다. 일행은 먼저 물 부족이 심각한 마을을 방문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라 뙤약볕을 맨몸으로 받으며 걸었다.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이고, 애들도 코에 콧물이 주렁주렁했다. 심각한 물 부족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온 것이다.
우물은 시골 샘물이었다. 작두 펌프도 없는 엉성한 우물이라서 아이들이나 짐승이 빠지지 않도록 기다란 나무토막을 지붕처럼 얹어 놓았다.
주민 한 사람이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시연을 해줬다. 플라스틱 통을 오려서 만든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은 완전히 흙탕물이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곳에 작두펌프라도 놓아 주면 이 지역 주민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했다.
샘의 바로 밑에는 어린 학생들이 마실 수 있는 옹달샘도 있었고 그 아래에는 뭇 짐승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만든 더 작은 옹달샘도 있었다. 주민들은 나름대로 그들의 생활을 향상하려고 채소밭과 양어장을 만드는 등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활을 하려는 몸부림을 보여 주는 시설도 있었다. 그들이 결코 게을러서 못 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주민들이 오랫동안 애용하고 있는 이 초라한 웅덩이는 이곳 오지의 500여 주민과 짐승들의 생명수라고 한다.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한 소년에게 내가 먹으려고 가지고 다니던 생수를 한 병 선물했다. 그 어린 학생이 어떤 키 큰 외국인이 건네준 맑고 시원한 물을 마셔보고 나서 열심히 공부해서 이 지역 주민 모두에게도 이렇게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내가 꼭 해내고 말겠다는 열망이 생겨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의 여인에게 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는 그런 생명수는 아니지만 내가 준 이 물은 마중물이 되어서 이곳 주민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의 마음으로 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
은다울라 지역은 모잠비크의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영양실조 비율 또한 높다. 이는 안전하지 않은 식수를 섭취하면서 장내 감염, 빈혈, 말라리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카사바, 땅콩, 밀, 사탕수수 등이며, 채소류는 배추, 당근, 토마토 등이다. 풍부한 농업용수와 기름진 농토로 농업에 대한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농업에 대한 기술 부족, 전통적인 농업방식 고수, 농기계 부족 등으로 가정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될 정도의 생산량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은다울라 지역의 수익작물로는 담배, 콩 등이며 한 가구당 연 소득은 약 6만 원 정도이다. 이러한 열악한 지역에서 월드비전은 보건사업, 농업사업, 에이즈예방사업, 역량강화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너무나 불쌍한 그들을 가슴에 품은 우리는 월드비전에서 건축 중인 치폰두 중학교로 갔다. 황량한 들판에 우뚝 두 개의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곳도 주민의 염원인 중학교가 세워지도록 도움을 준 월드비전 손님들이 왔다는 소식에 많은 주민이 몰려와서 우리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나는 주민 모두가 힘을 합해서 건축하는 모습을 보니 모잠비크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했다.
10여 리나 떨어져 있는 유일한 샘에서 아낙네들이 머리에 물통을 이고 길어온, 생명수 같은 물로 빚은 붉은 벽돌이 하나씩 둘씩 올라가며 학교가 건축되고 있는 현장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한 그루씩 기념식수를 한 다음에 정성스럽게 물을 주었다. 10여 년 후에 우리가 다시 한 번 각자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이 학교가 번창하고 있는지를 꼭 다시 와서 보기로 마음을 먹으며 나무를 심은 것이다.
또다시 3시간을 달려서 리피지 중학교를 방문했다. 이곳도 월드비전에서 지원해준 학교다. 2,00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다니는 매우 큰 학교인데 그곳 교육장이 직접 우리에게 브리핑했다. 포르트갈 어로 설명하면 다시 영어로 통역되고 우리에게 통역되는 어려운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지루한 브리핑이 끝나고 교육장이 앞장서서 리피지 중학교 시설을 설명해 주는데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남학생 200여 명이 생활한다는 생활관은 온통 곰팡내였고 침대도 매우 부족해서 맨땅에 스펀지로 만들어진 엉성한 매트리스 한 장을 깔고 잠을 자며, 화장실이 모두 다 고장 나 있고, 샤워시설도 고장 나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200여 명이 생활하는 곳에는 전등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교육장은 우리에게 침대를 좀 지원해 달라고 애원했다. 또한, 생활관뿐만 아니라 2,000여 명이 생활하는 이 학교에 물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어려움이 너무나 많으니 우물도 파 달라고 애원했다. 우물을 하는 파는 데 2천 여만 원의 거금이 든단다. 식당에는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그냥 서서 밥을 먹어야 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에는 녹슨 커다란 숱 하나만 덜렁 놓여 있었다.
이런 열악한 곳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도 탈이 없을지 무척 걱정되었다. 식당에 있는 유리창은 깨어져서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여학생들의 기숙사도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전기 시설이 없었고 샤워시설이나 화장실도 없었다. 그야말로 난민촌과 흡사한 시설에 많은 여학생이 잠을 자면서 공부를 한다고 한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을 본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칠판도 흰 벽에 검은색의 페인트로 칠한 칠판이고, 천장에는 깨어진 형광등이 세 개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 수보다 책상과 걸상이 턱없이 부족하단다. 컴퓨터를 구경해 본 학생이 하나도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라도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잠비크에서는 축복받은 학생들이란다. 이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너무나 많은 아이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보니 문맹률이 50%를 넘어서고 있는 모잠비크의 현실이라고 한다.
말라위 공항에도, 모잠비크의 국경선에도 컴퓨터가 없었는데 하물며 이런 학교에 컴퓨터가 있을 것인가? 컴퓨터보다 한 잔의 물이 더 소중할 것이고, 한 개의 책상이 더 필요한 학교이다. 우리에게 교육장은 컴퓨터 시설과 고등학교를 세워달라고 간청했고, 학교장도 거듭해서 우리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내구연한이 지나서 폐기 처분해야 할 많은 컴퓨터를 폐품으로 처분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 선물한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교장들이 앞장서서 이런 봉사활동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일행을 대표해서 “같은 교육자의 길을 가고 있는 처지에서 이렇게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모잠비크의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러분을 존경하며 힘차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용기를 잃지 말고 더 꿋꿋하게 열심히 가르쳐서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많은 인재를 길러 주시길 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가면 이곳의 실정을 여러 곳에 이야기해서 열심히 여러분들을 도울 방안을 마련해 보겠다. 건투를 빈다.”라는 취지의 인사말을 한 후에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는 모두 함께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열렬히 손뼉을 쳤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준비해 간 ‘제기 만들기’ 교육을 했다. 교육장, 교장, 교감, 그리고 그곳의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제기를 만들었다. 우리는 조교가 되어서 열심히 가르쳤다.
한참 후에 서툴게 만들어진 제기를 가지고 밖으로 나와서 우리는 제기차기 시범을 보여 주었다. 교육장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이 제기를 난생처음 차보며 즐거워했다. 그들의 어색하기만 한 제기 차는 자세를 보면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간 제기를 만들 수 있는 엽전과 한지 같은 것을 모두 주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 보도록 말했다. 떠날 때 우리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여러 가지 선물을 전달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함께 올 줄만 알았던 우리의 짐들이 착오로 도착하지 못해서 3일이 지난 오늘 아침에야 찾은 선물 보따리이다. 볼펜, 리코더, 축구공, 줄넘기 등을 선물하고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떠났다.
두 곳의 국경선을 마찰 없이 통과한 후에 말라위의 마피리 숙소에서 모처럼 푸짐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은 이제야 도착한 짐에서 나온 김치며, 컵라면, 컵 누룽지, 깻잎, 김, 고추장 등으로 지금까지의 느끼한 기름때를 벗겨 낼 수 있었다.
한국의 봉지 커피도 맛보며 행복해했다. 특히 김치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 피곤해서 모든 나라가 행복한 천국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끝.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걀 한 줄 (0) | 2022.04.14 |
---|---|
모잠비크에 생명수가 되기를 (0) | 2015.06.12 |
캐나다 토버머리에서 인디언과 함께 (0) | 2014.10.18 |
나이야 가라! (0) | 2014.10.18 |
칭찬은 서로의 기를 북돋아 줍니다 (0) | 2014.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