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섭식장애가 발병한 건 언니와 3층짜리 작은 다세대 주택의 옥탑 방에서 자취할 때였다. 광주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취직하고자 했던 언니와 서울 소재의 대학교
에 입학한 나에게 둘이 함께 살라며 부모님이 구해준 방이었다. 건물 1층에는 슈퍼가 있었고, 2, 3층에는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옥탑 방에서 2년을 살았고, 그해 마지막
1년 동안 나는 섭식장애를 앓았다.
폭식증은 으레 살을 빼고자 하는 집착에서 시작된다. 그만큼 섭식장애 환자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고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외모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상 행동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내가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까, 폭식증을 들키지는 않을까.
그래서 음식을 사 올 때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2층과 3층의 현관문은 아파트와 같은 육중한 철문이 아닌 얇은 스테인리스 프레임에 안이 뿌옇게 보이는 격자무늬 유리가 끼워져 있는 형태였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옥탑 방에 사는 언니와 내가 외출했다 돌아오는 것을 아래층 사람들은 소리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층의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항상 가게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식증을 앓기 전에는 생활에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을 모두 그 슈퍼에서 샀다. 그러나 폭식증이 심해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음식을 사야 했을 때는 더 이상 그 슈퍼에 가지 못했다. 하루에 서너 번씩 많은 양의 음식을 사는 것을 주인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건물 구조상 외출을 했다 집에 들어올 때는 꼭 그 슈퍼를 지나야 했다. 수시로 나가 음식을 사 오는 내 모습을 들킬까봐 나는 변장 아닌 변장을 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나갈 때마다 다른 옷을 입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음식을 사놓으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폭식증 환자였던 나에게는 매번이 마지막 폭식이었기에 다음 폭식을 위해 음식을
미리 사놓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슈퍼의 주인아주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장을 보러 들락날락하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새벽에 편의점을 갈 때면 2, 3층에 사는 친척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매번 신경이 쓰였다. 그 행동들을 할 때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폭식증은 보통 폭식-구토-자기혐오라는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혐오가 다시 폭식을 부르며 이 과정이 반복된다.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먼저 살을 빼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고 살을 빼기 위해 음식을 억제하면 그로 인한 보상심리로 식탐이 생겨 폭식을 하게 된다. 폭식 후 살이 찔 거라는 공포와 불안감이 강하게 들면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고 만다. 그다음 나를 기다리는 것은 자기혐오. 식욕을 참지 못했다는, 그래서 '폭토 (폭식한 뒤 구토하는 일)를 해버렸다는 것에 대한 자기혐오다.
자기혐오가 견딜 수 없이 커지면 다시 폭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머릿속은 ‘폭식을 하고 싶다'와 '폭식을 하면 안 된다'로 꽉 차버리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초조해졌다. 그리고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먹는 것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초조하고 힘들 바에야 차라리 먹어버리자. 그래 그게 낫겠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폭식을 하는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기혐오가 극에 달하고 스스로를 형편없고 무능력하고, 의지박약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식욕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무엇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로웠다. 나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들이 다 나의 무능함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음식을 찾았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폭식증이 심해진다. 폭식과 구토가 습관이 되면 단순히 자기혐오만이 폭식을 유발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이유로 폭식을 했다. 불안하거나, 긴장이 되거나, 맛있는 음식을 보거나, 군침 도는 냄새를 맡거나, 술을 마시 거나, 육체노동을 하거나, 피곤하거나, 지루할 때도 폭식을 했다.
나의 경우 폭식증이 가장 심할 때는 매 끼니 폭식을 했다. 이렇게 폭식과 구토가 이어지 면서 정신은 점점 피폐해졌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폭토를 하지 않고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김안젤라 /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 창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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