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야기

관계를 치유하는 33가지 지혜 4 - 절대 고독의 순간(에스테르(에스더))

hope888 2022. 4. 24. 18:54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홀로 직면해야 하고, 외로이 걸어가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아무하고도 나눌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마음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데,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갈 길을 갑니다.

내면의 어둠은 깊어만 가는데, 그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려는 사람보다는 두려워하며 피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고독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페르시아 왕궁에서 살았던 에스테르 왕비는 자신을 위하여, 혹은 가족을 위하여, 또는 세상을 위하여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력과 무력감으로 시달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에스테르(에스더)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온 사촌 모르도카이(모르드개)의 양녀가 되어 성장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임금 크세르크세스의 왕비였던 와스티가 폐위된 후 3년이 지나 새 왕비를 뽑을 때 에스테르는 왕비로 간택되어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에스테르는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 모르도카이가 명한 대로 유다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혈통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임금의 총애가 제아무리 크다 하여도 왕궁에서의 에스테르의 삶은 있는 그대로 자신이 될 수 없기에 부자연스러웠고, 제 속을 다 털어놓아도 염려할 것이 없는 진실한 인간관계란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음을 드러냅니다.

한편, 왕궁 관리였던 모르도카이는 임금에 대한 음모를 사전에 알아내어 임금을 위기에서 구해 내었고, 그의 업적은 궁중 일지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모르도카이의 업적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당시 최고의 궁내 대신으로 등용되었던 사람은 아각 사람, 곧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말렉족인 하만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은 그를 신뢰하였고, 그의 모든 시종에게 하만이 지나가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모르도카이는 이 명령에 불복종합니다. 왜 모르도카이가 임금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모르도카이의 태도는 다른 왕궁 관리들의 불만을 샀고, 이를 전해 들은 하만도 분노에 가득 차 모르도카이뿐만 아니라 왕국 전역의 모든 유다인을 몰살시킬 계획을 품게 됩니다.

도대체 왜 모르도카이는 이런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선택을 하였을까요? 에스테르기 417절 이후에 소개된 그리스어로 저술된 '모르도카이의 기도'를 참조하면, 모르도카이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그가 교만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 위에 두지 않으려는 것이었으며, 주님 이외에는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고 절하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곧 모르도카이는 다만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따른 선택을 했고,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을 각오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도카이 개인에 대한 원한을 모든 유다인에게 돌린 것은 하만의 오류였습니다. 하만은 자신의 그릇된 판단을 정당화하려고 임금에게 유다인들은 혼자서 유별나게 모든 사람과 끊임없이 적대 관계를 이루면서 자기네 법에 따라 기이한 생활 방식으로 떨어져 살며, 우리 일에 나쁜 감정을 품고 극악한 짓들을 저질러, 왕국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거짓 고발하였습니다.

하만은 주사위를 던져 유다인들을 몰살시킬 날을 선택합니다. 이때 주사위를 뜻하는 아카드 말이 푸르이고, 이것이 푸림절(부림절)의 기원이 됩니다. 이제 아다르 달, 곧 열두 째 달 14일이면 왕국 전역의 유다인들은 임금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교살(絞殺)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이런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될 줄 미처 몰랐던 모르도카이는 다른 모든 유다인과 함께 단식하고 참회하며,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스테르(에스더)는 궁궐 내시인 하탁을 모르도카이에게 보내어 상황을 알아보게 합니다. 모르도카이는 하탁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려준 후에 에스테르에게 임금 앞에 나아가 민족을 살릴 길을 강구해 보라고 당부합니다.

이로써 모르도카이의 위기는 에스테르의 위기가 됩니다. 임금의 부름을 받지 않은 채 임금의 처소 안뜰로 나아가는 자는 사형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스테르는 모르도카이에게 이 사실을 전하지만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에게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모르도카이는 양녀인 에스테르에게 왕궁에 있다고 해서 이 난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며, 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때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침묵을 지킨다면 구원은 다른 곳에서 올 것이지만, 에스테르와 그의 집안은 영원히 잊히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에스테르가 왕비가 된 것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이런 위기를 대비하여 마련하신 섭리가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양부의 말을 통해 에스테르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며, 무엇인가를 해도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에스테르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두려움으로 몸을 떱니다.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지도 못한 채 민족의 운명을 지고 나가야 하는 현실 앞에서 에스테르는 깊은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만약 신앙이 없었다면 에스테르는 이 순간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에스테르는 신앙 안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수사성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자신을 위해 사흘 동안 단식하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임금 앞에 나아가기 전 사흘 동안 에스테르는 어떤 심정으로 지냈을까요?

도무지 물러설 데라고는 없는 곳에 에스테르는 홀로 서 있습니다.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면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만, 그 무엇인가를 하는 일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입니다. 이 짐은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는, 누구하고도 나누어 질 수 없는, 고스란히 에스테르에게 맡겨진 그의 몫입니다.

'에스테르의 기도는 이때 에스테르의 심정을 잘 보여 줍니다.’하느님 외에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에스테르의 절대적인 고독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체험이지만, 인간이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에스테르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에스테르는 전적으로 주님께 기대합니다. 그에게는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 존재가 하느님을 향한 채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분께 드러냅니다. 에스테르는 자신을 집어삼키는 두려움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용감한 척, 자신 있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하느님 앞에 드러냅니다.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 “이 두려움에서 저를 구하소서.”(에스 4,17), 그리고 임금 앞에 나아갈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음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주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임금 앞에 나아갈 용기를 주시며,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조화로운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주님께서 임금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에스테르는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에스테르의 믿음은 하느님을 믿는 참된 믿음으로 변모됩니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 대신 우리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니까? 우리가 가

진 모든 능력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가장 무력해진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어쩌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에스테르의 믿음에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죽을 용기를 낸 에스테르가 임금의 처소 앞뜰에 나아갔을 때 임금은 그를 어여쁘게 보고 왕홀을 내밀어 줌으로써 에스테르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하만의 책략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테르처럼 주님 말고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처지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절망이 주님에 대한 희망으로 바뀔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김영선 수녀 / 관계를 치유하는 33가지 지혜/ 생활성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