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편 시인은 주님께 자신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날수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기도 하고,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그간의 경험들을 통하여 익히고 배운 바를 통찰하여 지혜를 길어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아온 날 수가 많을수록 자신이 서 있는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한없이 단단할 줄만 알았던 한반도의 지반도 수시로 흔들리고, 언제든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던 이로부터도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경험을 하게 되며,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것 같던 신체도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때가 찾아오면 스멀스멀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안심하고 서 있을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이 불안은 인생의 날수가 가르쳐 주는 경험이기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과 더불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사뭇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로보암(여로보암)은 우리처럼 불안에 시달렸던 한 인물입니다. 그의 불안의 원인은 무엇이었으며, 불안 속에서 그가 내린 선택은 무엇이었고, 또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불안을 극복하는 지혜의 샘물을 긷고자 합니다.
예로보암은 북왕국 이스라엘(이하 북이스라엘)의 첫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에프라임 사람으로 츠루아라는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힘센 용사였던 그는 솔로몬이 밀로궁을 세울 때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솔로몬 임금의 눈에 띄어 요셉 집안의 강제 노역을 총괄하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예루살렘에서 나가던 길에 실로 사람인 아히야 예언자를 만났습니다. 그 길에는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때 아히야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더니 그중 열 조각을 예로보암에게 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내가 너를 데려다가 네가 원하는 모든 지역을 다스리게 하리니, 너는 이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다. 네가 만일 나의 종 다윗이 한 것처럼 내가 명령하는 바를 모두 귀담아듣고, 나의 길을 걸으며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고 내 규정과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또한 내가 다윗에게 세워 준 것처럼 너에게도 굳건한 집안을 세워 주고, 이스라엘을 너에게 주겠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임금으로 선택하신 것처럼 예로보암을 임금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경 저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이런 결정을 내리신 이유는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주님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예로보암이 다윗처럼 주님의 길을 걷기만 하면 하느님(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안을 이스라엘 위에 굳건히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는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예로보암과 아히야 예언자 둘 사이에만 일어났던 이 일이 솔로몬에게 알려지자 솔로몬은 예로보암을 죽이려 합니다. 이 때문에 예로보암은 이집트로 달아났다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예로보암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르호보암)이 스캠에서 왕위 즉위식을 가질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예로보암을 그들의 대변자로 삼아 르하브암 앞에 나아가 선왕인 솔로몬이 부과한 강제 노역과 세금의 부담을 줄여 달라고 청하게 하였습니다. 르하브암이 이 청원을 거절하자 온 이스라엘은 예로보암을 그들의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오직 유다 지파만 르하브암을 지지하였고, 나머지 지파들은 예로보암을 임금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히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로보암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예로보암의 왕권은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로보암이 주님의 길을 따라 걷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의 왕권은 굳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로보암은 불안하였습니다.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가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언제든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 불안의 뿌리와 마주하는 대신 불안을 가라앉히는 일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인간적인 조처들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스켐에 도읍을 세웠다가 후에 프누엘로 옮깁니다. 천도가 잦다는 것은 왕국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집안의 존재를 잊어버리도록 단과 베텔에 성소를 세운 후 자신이 만든 금송아지상을 그곳에 두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그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이 말에 의하면 예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는 다른 신이 아니라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일종의 발판과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계약 궤(언약궤)가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옥좌로 이해된다면, 예로보암은 계약 궤 대신 하느님의 발판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셈입니다. 하지만 이 금송아지들로 인하여 백성은 힘센 황소 위에 서 있는 바알이나 하닷 신에 대한 숭배와 야훼 신앙을 혼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명기 신학에 따르면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기로 정하신 한 곳에서만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예로보암은 단과 베텔의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신명기의 규정을 위반하도록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를 일컬어 “예로보암의 죄"라고 말합니다. 신명기계 역사가가 북이스라엘의 임금을 평가할 때 적용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과 베텔의 성소를 폐쇄하고 금송아지상을 파괴하지 않은 임금은 모두 예로보암의 길을 따라 걸었다든가 예로보암의 죄를 지었다는 식의 평가를 받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임금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단과 베텔의 성소를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예로보암의 죄를 지은 것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예로보암의 불안은 단과 베텔에 성소를 짓는 것으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이들을 사제로 임명하였으며, 본래의 전례력도 수정하여 일곱째 달에 지낼 초막절 축제를 여덟째 달에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축제 때에는 임금 자신이 베텔의 제단으로 올라가 제단에 분향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왕권의 주인이자 그 왕권을 자신에게 주신 분께 충실하기보다는 온갖 인간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불안의 근원에 직면하였다면 왕권을 지키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분께 온전히 맡겨 드림으로써 왕권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대신 그 왕권을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펼쳐 나가는 데 전력을 쏟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예로보암에게 왕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느 해 예로보암이 베텔의 제단 옆에서 분향하려고 할 때, 유다에서 온 한 예언자가 베텔의 제단이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로보암은 여전히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왕권이 주어질 것임을 예언하였던 아히야 예언자 또한 그에게 내릴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예로보암은 하느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 주셨음에도 어떤 임금보다 더 악한 짓을 저지르고, 다른 신들과 우상들을 만들어 하느님의 분노를 돋우면서 하느님을 자신의 등 뒤로 내던져 버렸으므로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에서 잘려 나갈 것이며, 결국 예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멸망하여 유프라테스 강 저쪽으로 유배를 가게 될 것이라고 아히야는 예언하였습니다. 아히야의 예언대로 예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왕위에 오른 지 두 해 만에 바아사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렇게 하여 예로보암 왕조는 끝이 났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그 날수를 정하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하고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려 할 때 불안은 엄습해 옵니다. 더 잘 지킬 수 있는 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이미 주신 것을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골몰하는 우리,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오늘, 지금을 충만히 살 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영선 수녀 / 『관계를 치유하는 33가지 지혜』 / 생활성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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