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야기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 2 -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은혜

hope888 2022. 4. 20. 15:20

 

1.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은혜

 

영원하지 않은 것, 변하는 것,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는 진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결코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진짜 만족을 주고 내면의 갈망을 완벽하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고 나서, 그의 뒤를 여호수아가 잇게 됩니다. 그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막중한 과업을 떠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 부담감에 휩싸인 여호수아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 5~9)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지도자에게 필요한 카리스마? 복잡한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명석한 두뇌? 이방 민족과 협상할 수 있는 외교술? 일당백의 힘과 체력? 하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그와 완전히 다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거라.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내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느냐.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하겠다.”

모세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능력 덕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모세와 함께하신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이 약속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다면 어떨까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보다 완전한 약속, 이보다 완전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복음입니다. 주님만 함께하시면 됩니다.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완전한 복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복음 가운데 베푸신 영광이자 능력이며 축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습니까?

복음에 대해 물어보면, 기껏해야 세례문답 때 배운 내용 정도만을 읊습니다. 아니, 사실 그 정도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복음을 '죄책감을 처리하는 쓰레기 처리장' 정도로 여겨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완전히 김빠진 복음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복음? 복음이 그냥 복음이지 뭐'라고만 반응할 뿐입니다. 복음을 싸구려 허섭스레기 취급한다는 말입니다.

결단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어떤 대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0-11)

 

주님은 자신의 전부를, 자기 자신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갖고 계신 것에서 몇 가지를 여기저기 살짝 떨어뜨려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선물보따리 몇 개 주는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그분의 모든 것을 함께하는 어마어마한 복음이란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복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접기도나 회개기도를 하면서 찾는 죄책감 하치장이 절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이용하는, 자동판매기 같은 예수님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2. 당신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점검하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전노 (守錢奴)라는 말을 아십니까? 부자가 되는 것을 절대가치로 삼고 그 일을 이루는 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밀어 넣은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수전노라 말하는 것은, 그가 돈의 종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의 종입니까? 여러분의 순전한 마음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든 여러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관심과 에너지가 자연스레 쏠리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그 대상이 무엇이든,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그것이 바로 마음속의 '실재' 입니다. 신앙 연수가 길어도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근본 이유 중 하나는, 복음을 내면의 실재로 삼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음, 그 영적 가치를 마음속에 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 그럴까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자연스럽게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마음 역시 하늘로 향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양이란 짐승은 물을 아주 싫어하고 무서워한답니다. 그런데 몽골처럼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나라 중에는 목가적인 풍경의 넓은 들판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대개 목동이 이끌고 다니는 양은 수백 마리나 됩니다. 수많은 양을 데리고 목동 혼자 그 많은 개천을 건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양은 고집이 아주 센 동물입니다. 집을 찾아갈 능력도 없으면서 고집만 세고, 그래서 목동을 힘들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천을 건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겁니다. 이때 노련한 목동은 새끼 양을 덥석 안고는 그대로 물로 들어가 버린답니다. 그러면 순간 어미 양의 모든 관심이 새끼에게만 쏠립니다.

평소에 매우 싫어했던 물이지만, 납치당한 새끼 양에게 관심이 쏠린 어미는 목동을 따라 개천을 건너게 됩니다. 또 양은 한 마리가 움직이면 단체로 따라가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결국 한 마리의 새끼 양을 따라 모든 양이 개천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 형님입니다. 이 형님은 무엇엔가 한번 꽂히기 시작하면 평생 물고 늘어지는,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소유한 분입니다.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피신한 야곱 형님은 거기서 라헬과 사랑에 빠집니다.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던지, 7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기다렸습니다.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아무리 첫사랑이라도 그렇지, 무슨 연애를 그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라헬의 손 한 번 못 만져 본 채 7년이나 지켜보면서 종살이를 한 게 아닙니까.

야곱의 외삼촌이자 라헬의 아버지인 라반도 대단한 양반입니다. 아니, 세상 천지에 딸을 끼워 파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7년이 지나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 이 개념 없는 아버지는 라헬이 아닌 그의 언니 레아를 신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당시에 전깃불만 있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어두컴컴한 데다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으니, 순진한 야곱은 당연히 라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의 일을 더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야곱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레아와 첫날밤을 보냈다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이때부터 야곱 형님의 정신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라헬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겁니다. 기어코 라헬과 결혼하려고 7년을 더 봉사했습니다. 라헬이 죽고 나서는 요셉에게 목을 매기 시작했습니다. 이 형님은 레아와 라헬 말고도 부인이 둘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자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에게만 애정을 쏟았습니다. 이거야말로 편집증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는 라헬이 일찍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하도 라헬에게 집착하니까 하나님이 걱정하신 나머지 라헬을 먼저 데려가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에게 너무 집착하니까 이집트로 팔려가게 하셨던 겁니다. 나중에 집안이 통째로 이집트로 이주했을 때, 야곱이 좋은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겠습니까? 이집트에 요셉이 있으니까 간 것입니다.

야곱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짜 주인 노릇을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것, 도저히 떨어질 수 없어서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내면의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 실재가 바로 그 사람의 주인입니다. (김용의 /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 예수 전도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