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천 년후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생명에 의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깨달으셨는데, 우리는 무슨 근거로 혼자 살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예수님은 아버지께 돌아가시기 전, 자신처럼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설명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된 상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하신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드러내셨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시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의미는,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분이 의도하신 모습이 되며,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말이다. 복잡하게 느껴지는가? 간단하게 생각하라. 그저 그리스도가 삶의 매 순간을 통해 사시게 하는 일일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은 그 어떤 일도 직접 하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그분의 행동은 아버지의 생명에서 비롯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뭔가 해 드리기 위해 부름받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라고 부름받았다.
2. 나의 성공을 짓밟은 말
어떤 단어 하나가 있다. 그 단어는 내 삶을 29년 동안이나 망쳐 놓았다. 그 단어 때문에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누리지 못했고, 끊임없이 부담감에 시달렸다. 이전까지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단어의 의미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이해하면,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나의 저서 《내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예영커뮤니케이션 역간)를 보면, 평생 율법주의자로 살던 내가 어떻게 은혜 안에서 살게 되었는지 자세히 나온다. '은혜 안의 삶‘ (grace walk)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드러나는 삶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은 서로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나는 줄곧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삶인 줄 알았다. 그래서 경건하게 사는 법을 배우려고 성경을 읽었다. '법칙을 꼭 지키겠다'고 정기적으로 다짐도 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나는 지금 신념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하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축복받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율법주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뭔가 하려고 애쓰는 삶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삶이다.
가끔씩 나는 하나님이 내게 바라시는 수준에 내가 얼마만큼 미치고 있는지 점검하고자 성경을 펼쳤다. 그런데 그때마다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성경을 읽을 때면, 내가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는 계명이 항상 눈에 띄었다. 내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영적 수준까지의 여정도 너무 길어 보였다. 나는 절대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심으로 영적 원칙을 지켰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싶었다. 퍽 고상한 염원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러한 마음은 교묘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위해' 일하라고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라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3. 순종 없는 복종
기독교는 원칙대로 살라거나, 예수님을 위해 살라고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 원리에 입각한 삶은 보기에 훌륭해 보이지만, 사실은 미묘한 형태의 율법주의다. 물론 그리스도인을 위한 삶의 지침이 성경에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종교적 율법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사시는 삶의 여러 가지 방법을 기술한 것뿐이다. 신약에 나오는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일에 기초한다.
성경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주님께 순종하면 분명히 축복받는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고 무조건 축복받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친구 로저가 전자 우편을 통해 이런 쪽지를 보냈다. "스티브, 나는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질 못할까?" 로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나안 땅에 비유하고 있었다. “영적인 애급에서 나온 이후, 내가 아는 한, 나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을 모조리 지켰어. 애급에서 살 때 피웠던 마약도 끊었지. 그런데 왜 광야만 맴돌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도 좀 들어가게 해줘!"
내 친구에게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로저는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을 모조리 지켰어. 애급에서 살 때 피웠던 마약도 끊었지." 그러나 로저는 '순종'이 아니라 '복종'의 열매를 맛보고 있었다. 로저처럼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기만 해서는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기쁨의 근원은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경의 계명을 복종하는 일에는 기쁨이 없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을 모두 지키는 것 같은데, 왜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까?"라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옳은 일만 열심히 하기를 바라실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집중하길 원하신다. 순종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리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에야 성경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반면에 자기 스스로 성경의 가르침을 그냥 따르는 행동 자체는 거룩한 순종이 아니다. 이는 '복종'에 불과하다. 불신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보다 옳은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불신자도 그 정도는 지키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옳은 일만 하는 행위는 순종이 아니다. 공허하고 맥 빠진 복종에 불과하다. 복종은 하나님의 생명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4. 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삶이다. 이 삶을 두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민한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승리로 이끄시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 수 없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오직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늘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뢰보다 시도를 택한다.
그러고는 일이 왜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아무리 신실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도 그렇게 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다.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아직 겪어 보지 못했다면, 한번 시도해 보라. 얼마 못 가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스스로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이다. 나 역시 승리하는 삶의 비결을 오랫동안 모르고 살았다. 구원의 전체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는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지 잘 몰랐다. '자비'(mercy)는 알았으나 '은혜' (grace)는 몰랐던 것이다.
5. 자비와 은혜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를 사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잘 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셨다. 우리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분노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셨다(롬 3:23-26). 우리의 죄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물으실 때, 우리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서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된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영원히 지옥에 있어야 마땅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앨라배마에 목사로 있었을 때다. 교회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버밍햄에 갔다가 돌아올 때였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었는데, 그만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이내 사이렌소리가 내 차를 뒤따랐고, 번쩍거리는 푸른 색 불빛이 백미러로 보였다. 동시에 속도계를 힐끗 본 순간, 아차 싶었다.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군. 꼼짝없이 잡혔구나.'
차를 세우자 경관이 내 차로 다가오며 운전면허증을 요구했다.
"얼마나 과속하셨는지 아시죠?"
"네, 압니다." 나는 최대한 목사답게 대답했다.
"차에서 내려 경찰차 앞좌석에 앉아 주십시오." 경관은 사무조로 말했다.
나는 신속하게 차에서 내려 경찰차 앞좌석에 앉았다. 담임 목사라는 사람이 경찰차 앞좌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교인들이 보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경관은 탐지기에 잡힌 위반 속도를 보여 주고는 속도위반 딱지를 떼고자 장부를 꺼낸 뒤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나는 경관이 장부를 넘기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말을 건넸다.
"저기, 경관님? 제게 자비를 좀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어요?"
내 말에 경관은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장부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그러죠. 이제부터는 천천히, 안전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목사가 되면 모든 일이 늘 이런 식으로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예전에 어떤 경관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목사만큼은 법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며 내게 핀잔을 줬다.) 당신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는가? 딱지를 떼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경관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도 이러한 식으로 자비를 베푸셨다. 우리는 마땅히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하셨다. 우리는 마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은 어떤 여자와 같다. 사진을 찍고 며칠이 지난 후에 여인은 사진을 찾고자 사진관을 다시 찾았다. 사진을 넘겨보던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하네요.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잖아요." 그러자 사진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손님, 지금 손님에게는 공의가 아니라 '자비'가 필요합니다. 사진 찍는 기술에는 문제가 없답니다." 이 자비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바이자, 우리 죄를 사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신 바였다.
그러나 복음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측면이 하나 더 있다. 앨라배마의 경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떤 사람은 그 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그 경관은 목사님께 은혜를 베푼 거죠, 그렇죠?"
내 대답은 "아니오"다. 그 경관은 내게 어떠한 은혜도 베풀지 않았다. 오직 자비만 베풀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경찰차에서 내렸을 때, 그 경관이 이렇게 했다고 치자, 경관이 "잠깐만요. 아직 다 "안 끝났습니다" 하고 말하더니 자신의 지갑에서 십만 원을 꺼내서 내게 주었다고 상상해 보라. "이거 받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라는 인사를 덧붙인다. 만일 그랬다면, 이 일은 은혜다(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비는 응당 받아야 할 뭔가를 받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뭔가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셨으며,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셨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혜를 베푸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용서는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용서가 핵심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최우선 목표를 달성하려는 전제 조건일 뿐이다. 구원받는 순간에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6. 예수님은 왜 우리 안에 사실까?
구원받은 사람의 안에 예수의 영이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승천하고 나면, 성령이 임하여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17), 그리고 우리도 종종 '구원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사건'라고 말한다. 구원받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유 중 몇 가지를 잘못 알고 있다. 한번 짚어 보겠다.
1) 우리 죄를 사하시려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우리 죄를 사하는 문제라면 굳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셔도 된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하나님은 예수의 생명을 주지 않고는 우리를 용서할 수 없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셔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다.
2)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려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게 하시려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가?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 땅에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야 했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주지 않으셔도 우리를 능히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 있다.
3)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려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고자 우리 안에 거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성경에 잘 나와 있다.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셔도 된다.
구원받는 순간,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체험하고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요 10:10). 우리는 본래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으나 구원받고 다시 살아났다(엡 2:1).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매 순간 우리를 통해 드러나길 바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기본 특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섬기는 나, 그분을 위해 사는 내가 중심인 삶이 아니다. 또 하나님이 지시하신 일을 하는 내가 전부인 삶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자체다! 그리고 은혜 안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다. 이게 바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다.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29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종교 규정, 곧 율법이 내 삶을 지배했다. 그러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정말 놀랐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아무리 애써 봤자 그 일은 오히려 그분의 목적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섬겨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다.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통해 사신다.
이게 바로 은혜가 다스리는 삶이다. 그런 삶을 살려면, 기본 진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진리에 우리 삶의 승패가 달렸다.
7. 성령님과 동행하라
이 책을 읽는 내내 성령님과 동행하자, 진리를 깨닫는 여정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다루실 때마다 그분과 함께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각 장 마지막에 있는 기도가 당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 주
고 있다면, 그 기도로 하나님께 고백하라. 또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라. 그러면
이 책에서 더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8.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다 보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제 보니 저는 예수님 대신에 저의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애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저를 통해 사시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제 힘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통해 어떻게 사실 수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스티브 멕베이 / 『은혜가 다스리는 삶』 / 예수전도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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