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신자에게 임하여 그의 마음을 진리에 대한 이해,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로 가득 채우고 그의 정신적 기능들을 사로잡고 그의 본래적 능력이 아닌 능력을 부여하여 그의 사명을 감당케 하는 것이다
1.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구체적 특징들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413절에서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主)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
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성령세례는 하나지만 그 세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여러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은사들은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다. 하나님이 각각의 사람들을 어떤 사역의 분야로 부르셨느냐에 따라 은사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몸의 지체들은 서로 다른 기능들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성령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은사들을 주시는데, 이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도록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성령세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성령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면, 행 2:4; 10:46: 19:6). 그리하여 나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내 주변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도 성령세례가 주어지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고린도전서 12장을 연구하던 나는 바울이 놀라운 은사들을 받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발견했다(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따르면 고린도교인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나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2:28-30).
그리하여 나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알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방언의 은사가 마지막 은사요 가장 덜 중요한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바울이 우리에게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전 12:31; 14:5,12,14,18,19,27,28).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조금 후에 나는 또 다른 잘못된 견해에 빠질 뻔했다. 이것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방금 이야기한 방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성경적인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복음전도자의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전에 나는 이미 D. L 무디, 찰스 피니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은 다른 복음전도자들의 이야기를 잃었으며, 복음전도자들인 그들에게 능력이 임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복음전도자의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사실 비성경적인 견해였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복음전도자로 부르셨는데 그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는다면, 그에게는 복음전도자의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복음전도자가 아닌 다른 사역자로 부르셨다면, 그에게는 그에 맞는 사역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전도자의 능력이 주어질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해악을 끼친다.
첫째, 이런 견해는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전도자의 능력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성령세례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전도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서 실제 성령세례를 받기는 해도, 복음전도자의 능력은 그들에게 임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그들에게 심한 실망감을 안겨주며, 더 나아가 때로는 절망감까지 느끼게 한다. 복음전도자의 능력을 기대했으나 그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성령세례와 은사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알았다면, 그들이 복음전도자의 능력을 받지 못한 것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는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 어떤 특정한 사명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그 사명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하나님께 복음전도자나 목사로 부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또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무모하게 복음전도자나 목사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들이 생긴다.
이들은 성령세례를 받기만 하면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목사로서 성공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하고 목사로서의 사역에 필요한 충분한 성경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목사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 충분한 성경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성령세례를 받는다면 그는 목사로서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의 사명을 받지도 않고 충분한 성경지식을 갖추지도 못한 사람은 비록 성령세례를 받는다 할지라도 목사로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무관심의 해악을 초래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목사의 사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세례에 대해 복음전도자나 목사로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성령세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자녀를 아주 많이 둔 어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자기가 복음전도자로 부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녀는 자녀와 가정을 돌보는 게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세례에 대한 책을 읽거나 그에 관련한 설교를 들은 그녀는 복음전도자나 목사로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 성령세례라고 느낀다. 이럴 경우 그녀는 '성령세례는 복음전도자나 목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그녀가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으면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능력이 나타나는 모양은 신자들 각자의 사명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그녀가 깨달았다고 가정해보자.
더 나아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없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자녀들을 거룩하게 키우는 어머니의 사역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았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그녀는 “복음전도자나 목사에게는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세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기 위해 (엡 6:4) 성령세례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2. 성령세례의 은사와 나타남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사도 바울은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라" (고전 12:7)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에게는 그 몸 안에서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다. 아무리 미약한 지체라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엡 4:16) 성장하는데, 성령께서는 가장 미약한 지체에게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3. 성령은 성령세례가 각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결정하신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서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라고 말한다. 성령은 성령세례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 주권을 갖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성령세례가 어떤 은사, 작용 또는 능력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결정하는 절대적 권한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역의 종류를 선택한 후, 성령께 그 사역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은사의 종류를 선택한 후, 그분께 그 은사를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온전히 그분의 처분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 그분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하고, 그분이 맡기시는 사역에 충성해야 하고, 그분이 주시는 은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은 절대적 주권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나는 성령께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고 내가 그분께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 기쁘다. 그분이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가운데 내가 감당할 사역의 분야와 은사의 종류를 결정하시는 것이 기쁘다. 이런 결정이 근시안적이고 어리석은 내게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이 기쁘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의 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에 빠지는 것은 성령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소유할 은사의 종류를 결정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아무 은사도 얻지 못하게 된다.
나는 스코틀랜드에 사는 하나님의 성실한 자녀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금속판공(金屬板工)으로서 꽤 돈을 잘 버는 이 사람은, 성령세례와 성령세례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대단한 자기희생을 결심하고 직업을 포기했다. 그는 미국 북서부에 목사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는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시켰다. 나는 그가 실제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복음전도자로 선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지 않았다. 사역의 문은 그에게 열리지 않는 것 같았고, 그는 매우 낙심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시지 않는 게 아닐까?' 라는 의심에 빠졌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미니애폴리스(미국 미네소타 주 최대의 도시)에 있는 우리 교회에 와서 성령세례에 대한 나의 설교를 들었다. 내가 "성령세례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복음전도자의 능력을 받지 못한 것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에게 깨달음의 빛이 비치는 게 보였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 분야와 은사를 결정하시도록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주일학교 교사로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성령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은사를 나누어주시도록 온전히 복종했을 때, 참으로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복음전도자의 능력을 받고 북서부 주(州)들 중 한 주의 시골 지역들을 다니며 복음전도자로서 능력 있게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4. 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능력의 종류는 서로 다를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성령세례를 구한다면 그는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세례와 더불어 그에게는 전에 맛보지 못했던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이 능력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어지는 능력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에서 나온 가르침이기도 하다. 신앙 위인전들에는,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어느 날 성령세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여 받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새로운 능력이 임하여 그들의 사역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무엇보다도 찰스 피니, D. L. 무디 또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북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에게 선구적 선교활동을 펼친 선교사) 같은 사람들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소수의 탁월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나는 전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께 새로운 능력을 받았다고 분명히 간증할 수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았고, 또한 그들과 서신 왕래를 해왔다. 이 수천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온갖 종류의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목사로, 일부는 복음전도자로, 일부는 선교회 일꾼으로, 주일학교 교사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개인 사역자로 일했다. 그들의 간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신과 기쁨과 단호함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가 몇 년 전에 만났던 어떤 목사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코네티컷 주(州)의 뉴브리튼에서 열린 기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 주(州) 총회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개인의 사역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마무리를 하면서 “효과적인 개인 사역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불과 한두 문장으로 설명을 했다.
내 설교가 다 끝났을 때 이 목사가 연단에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나는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내가 "지금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총회 참석자들이 강당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 우리는 의자 두 개를 놓고 무리를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그가 먼저 기도한 다음 내가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나는 워싱턴주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몇 주 전에 뉴브리튼에서 열린 주 총회에서 나는 당신이 어떤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완전히 변화되어 자신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 분의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주로 청년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회심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어떤 다른 교회가 이 목사를 청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성이 뛰어난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그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교회는 적극적 전도활동에 반대하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왠지 그는 그 교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였다. 그가 교회에 부임한 후 6개월이 지났을 때 예순아홉 명의 회심자가 생겼는데, 그들 중 서른여덟 명은 그 도시의 사업가들이었다.
몇 년 전 몬트리올에서 열린 캐나다 지방 YMCA 대회에 참석한 후 나는 한 젊은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몬트리올에서 열린 목사님의 마지막 집회에 참석해서 성령세례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후 나는 내 방에서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홀로 기도했고,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기독면려회의 봉사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을 소집했습니다. 나는 그들 중 두 사람이 목사님의 마지막 집회에 참석하여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위원회에 속해 있는 다른 위원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 결과 그들도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교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자, 교회의 젊은이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집회 때 점잖은 부부가 나를 찾아와 "우리가 전에 목사님을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목사님께서 보스턴의 기독교 사역자 대회에서 성령세례에 대해 설교하신 것을 기사를 통해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성령세례를 구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다시 그 남편이 "성령세례 때문에 나는 주일학교 부장으로서 더욱 능력 있게 봉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말이 끝나자 그의 아내가 "그래요. 가장 감사한 것은 성령세례 때문에 내가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꿈도 못 꾼 일이었죠"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언급한 사람들이 서로 분명히 다른 세 가지 봉사의 영역에서 일했지만, 각각의 경우에 모두 성령의 능력이 크게 나타났다.
물론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언제나 즉시 회심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성령충만한 스데반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즉시 회심자들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분노로 가득한 유대인의 무리가 이를 갈며 그를 돌로 쳐 죽였다(이처럼 우리가 성령 충만할지라도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 회심자가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순교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바울이라는 회심자를 낳았다. 다소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회심 사건은 수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변하는 회심 사건보다 교회 역사에 더 크게 공헌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세례의 또 다른 결과는 복음증거와 봉사를 위한 담대함이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는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담대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패배자로 전락했다. 그는 맹세하고 저주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 후, 그는 그의 주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공회 앞으로 끌려와 협박을 당했지만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8-12).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기탄없이 말한 후에 공회는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9,20)라고 대답했다. 그후 또 다른 경우에 공회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지만, 베드로는 공회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29-32)
오늘날에도 선천적으로 소심한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으면 담대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함과 자유함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R.A. 토레이 / 『성령세례 받는 법』 / 규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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