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야기

성령세례 받는 법 6 – 성령 세례를 받는 법 3

hope888 2022. 6. 2. 15:36

 

 
  

6) 여섯째, 성령세례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여섯 번째 단계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라.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의 논리는 매우 엉성하다. 그들은 "하나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영원히 주셨다. 그분이 이미 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이런 잘못된 주장에 대해 고() A. J. 고든 목사는 "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게 영원한 선물로 주셨다(3:16).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 전체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각자 영접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성령세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순절에 하나님은 성령을 교회에 영원한 선물로 주셨지만,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하나님이 교회 전체에게 주신 성령을 각자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달라고 구할 때 그것을 주신다.

나는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또 다른 오류를 지적하려고 한다. 그들은 "모든 신자에게는 이미 성령이 계신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에게 계신 성령을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나는 성령께서 우리 존재의 은밀한 성소(聖所)의 후미진 곳에, 즉 우리의 분명한 의식의 뒤편에 단순히 거하시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존재 전부를 완전히 통제하시는 것은 전혀 다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된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답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라는 주님의 약속은 주님이 지상에 머무셨던 동안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 약속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오순절 사건을 간과하는 것이며, 지금은 모든 신자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오순절 사건 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구하는 신자들의 분명한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을 주셨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431절은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 신자들을 위해 기도한 사건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8:15,16)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3:16). 따라서 오순절 사건 전이든 후이든 간에 신약의 도처에 나오는 교훈과 사례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구하는 분명한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을 주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보스턴에서 열린 기독교 사역자 신앙대회에서 한 신자가 내게 찾아와 말했다.

"프로그램을 보니 목사님께서 성령세례에 대해 말씀하실 예정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렇습니다"라고 내가 대답했다.

"나는 성령세례가 오늘 진행되는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꼭 말씀해주십시오."

"형제님, 나는 그들에게 성령세례를 위해 꼭 기도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순절 사건 이전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도행전 431절에 기록된 사건은 오순절 전입니까?"

물론 그것은 오순절 후의 일이죠."

"그렇다면 여기 성경에서 사도행전 431절을 읽어보십시오."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815,16절의 사건은 오순절 전입니까, 후입니까?"

물론 그것도 오순절 후입니다.”

사도행전 815,16절도 읽어보십시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그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기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구하는 구체적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개인적 체험의 문제이다. 나는 물이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음식이 배고픔을 없애준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길 때 나의 첫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그 첫 체험 이후, 내가 기도하며 그분을 섬길 때 거듭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종종 성령께서 우리 위에 임하셨다. 비가 올 때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지각(知覺)할 수 있듯이 우리는 성령의 임하심을 분명히 지각할 수 있었다.

나는 시카고의 우리 교회에서 체험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YMCA 강당에서 정오 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무디의 시카고 방문에 대비하여 목회자들이 모인 기도회였다. 모임 중에 한 목사가 일어나 우리는 시카고에서 목회자들의 철야 기도회를 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여러분이 금요일 밤 10시에 시카고 애버뉴교회로 올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도회를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면 밤을 새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금요일 밤 10시가 되었을 때 시카고 애버뉴교회의 강의실에 사오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는 목회자가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여자들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기도회를 방해하기 위한 사탄의 강력한 시도가 있었다. 우선 세 명의 남자가 문 옆에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의자 옆에서 무릎을 꿇더니 바닥을 세게 치며 소리를 질렀다. 계속되는 그들의 행동 때문에 우리 가운데 일부는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회장을 빠져나가고 싶다고 느꼈다. 한 형제가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정숙()해줄 것을 조용히 부탁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욕을 했다. 그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어떤 사람이 강의실 한가운데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는 엘리야다"라고 소리쳤다. 그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런 일들 때문에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으며, 거의 밤 12시가 될 때까지 크고 작은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탄은 결국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지 못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일부는 영적 복을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그 복을 받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자정 무렵 하나님께서는 기도회장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들을 모두 제거해주셨다. 그 후 두 시간 동안 진행된 기도회는 너무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그렇게 복되고 아름다운 기도회가 있었다는 얘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2시를 조금 넘겼을 때 갑자기 그곳에 모인 무리가 조용히 있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말할 수 없었고, 기도할 수 없었고, 찬송을 부를 수 없었다. 들리는 것은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한 울음이었다. 그곳의 공기조차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인하여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일은 토요일 새벽에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주일 아침에 우리 교회의 집사 한 사람이 내게 찾아와 숨을 죽이고 저는 어제 새벽에 일어난 일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토요일 새벽에 우리가 체험한 것은 단지 감정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체험은 실제적으로 열매를 맺었다.

우리 기도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토요일 새벽에 기도회에서 빠져나와 미주리행 기차를 탔다. 방문한 도시에서 일을 끝낸 그는 호텔 주인에게 "이곳에서 열리는 신앙 집회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주인은 "지금 컴벌랜드 장로교에서 시작된 집회가 연장되어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도시를 방문한 그 사람은 컴벌랜드 장로교 소속의 신자였다. 그는 집회가 열린다는 교회로 갔다. 집회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청중에게 복음을 증거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받은 그는 자기에게 임하신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복음을 증거했고, 그 결과 마흔여덟 명 내지 마흔아홉 명의 사람들이 즉석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고백했다.

우리 기도회에 참석했던 한 젊은이도 새벽에 기도회를 빠져나가 기차를 타고 위스콘신 주의 한 도시로 갔다. 그후 얼마 안 되어 그 도시로부터 소식이 날아왔다. 그가 말씀을 증거할 때 서른여덟 명의 청년들과 소년들이 회심했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의 한 젊은 학생도 위스콘신 주의 다른 지역으로 갔다. 그후 얼마 안 되어 그가 방문한 지역의 인근에서 사역하는 목사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목사들은 젊은 학생에 대해 내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가 교사(校舍)와 교회와 군인들의 집을 다니며 전도하여 회심자들을 만들어냈다고 전했다.

우리 기도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그후 일본, 중국, 호주, 뉴질랜드 및 인도로 전도여행을 다닐 때, 나는 우리 기도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 충만을 주신다는 진리를 의심하는 것은 정말 비신앙적인 태도이다. 단언하건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 충만을 주신다. 성령 충만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더미같이 많은 '불신앙적 해석들'이 아니라 한 줌의 '신앙적 체험' 이다.

 

7) 일곱째, 믿어라.

 

일곱 번째 단계는 믿는 것이다. 마가복음 1124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확실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5)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에 이어 야고보는 계속 이렇게 가르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1:6-8).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령세례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성령세례를 구하는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세례를 구한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 구하면 받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다른 조건들을 충족시켰지만 단지 믿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단지 성령세례를 기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는다. 마가복음 1124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가르친다. 성령세례를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기 때문에 성령세례가 우리의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렇게 믿을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을 실제 체험 속에서 받을 수 있다. 마가복음 1124절 말씀을 좀 더 분명히 밝혀주는 것은 요한일서 514,15절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제 당신은 분명히 깨달았는가? 아직도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해 좀 더 설명해보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에게 제일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가?” 이다. 우리가 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약속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514절 말씀에 따라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요한일서 515절 말씀에 근거하여 "나는 내가 구한 것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아직은 그것을 실제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내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했고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구한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받았다고 믿는 것을 장차 나의 실제 체험 속에서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를 현재 우리의 문제, 즉 성령세례를 받는 문제에 적용해보자. 누가복음 1113절과 사도행전 239절에 근거하여 판단하건대, 내가 하나님께 성령세례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안다. 더 나아가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령세례가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 내가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나는 그것을 받았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근거하여 내가 내 것이라고 믿는 그것을 나는 장차 실제 체험 속에서 받을 것이다.

런던에서 온 F. B. 마이어(F. B. Meyer, 1847~1929. 영국의 저명한 목회자 겸 저술가)와 함께 위스콘신 주의 레이크 제네바에서 열린 학생 부홍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야간 집회 때에 F. B. 마이어는 성령세례에 대해 설교했다. 설교를 끝내면서 그는 이 집회가 끝난 후에

여러분 중 누구라도 토레이나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집회 후에 한 젊은이가 나에게 찾아왔는데, 그는 일리노이 주의 한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는 성령세례라는 복된 체험이 있다는 얘기를 30일 전에 들었습니다. 그후 이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해오고 있지만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뜻을 온전히 꺾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그가 대답했다.

"당신의 뜻을 꺾지 않는다면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뜻을 굽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꺾어주시기를 원합니까?"

", 원합니다."

그러면 이제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는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 위에 요한일서 514,15절을 펴서 올려놓았다. 그는 "하나님, 저의 뜻을 꺾어주십시오. 저의 마음에서 완고함을 없애주시고, 저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나는 "이제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이 내가 구한 것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의지가 꺾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구하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 지금 제게 성령세례를 주소서" 라고 기도했다.

"당신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었습니까?" 라고 내가 물었다.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느낌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 앞에 놓인 성경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당신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당신은 무엇을 구했습니까?"

"나는 성령세례를 구했습니다."

"당신이 성령세례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합니까?"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39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앞에 놓인 성경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5).

이제 당신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당신이 그분께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세례입니다."

이제 당신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성령세례가 주어졌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것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후 약간의 대화를 나눈 후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레이크 제네바를 떠났고 며칠이 지나 다시 그곳에 갔다. 나는 그 젊은이를 다시 만나서 성령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표정이 그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내 질문에 대답했다. 다음 해 가을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을 1년 이상 남겨둔 시점에서 교회를 맡아 사역 초기부터 회심자들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 해 '대학들을 위한 기도의 날'에 성령께서 그 신학교에 강하게 임하셨는데, 주로 그 젊은이를 통해서였다. 신학교의 교장은 교단 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

대학들을 위한 기도의 날'에 우리에게는 오순절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오직 이 학생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믿은 이 젊은이를 통해서 일어났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버리고, 죄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 성령세례를 구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아들인다면 누구라도 당장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순종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기도의 필요성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부정하기도 한다.

진리의 한 면을 강조하느라고 그것과 똑같이 중요한 진리의 다른 면을 놓치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복을 잃어버린다.

이제까지 언급한 일곱 가지 단계를 충족시키면 확실히 성령세례의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길 수 있는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사역을 시작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가?

그렇다.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떤 것을 인식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두 번째 방법은 체험이나 감정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이다. 이제까지 나는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당신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그것을 분명히 구했는가? 그렇게 했다면 체험의 문제를 하나님의 때와 장소에 맡기고, 단지 "성령세례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당신의 사역을 계속 감당할 수 있는 권리가 당신에게 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는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찾아왔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믿기에 이 사람은 틀림없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지만,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그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가? 당신이 영혼을 다루는 법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안다. '기록된 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안다(요일 5:13).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의 확신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기록된 말씀'을 제시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그에게 요한복음 336절을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라고 그가 읽을 것이다.

"누구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라고 당신이 묻는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말씀을 보고 대답한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들 중 얼마만큼의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아들을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진리인 것을 압니까?"

",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아들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의 이 질문에 그가 "내게는 영생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지만, 십중팔구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내게 영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은 그에게 성경말씀을 다시 제시하고 몇 차례 질문을 거쳐 그 말씀의 의미를 드러내준다. 당신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 말씀의 의미를 확인시켜준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확신을 가진 다음에 그는 개인적 체험을 가질 것이다.

이제 당신은 성령세례의 문제에 있어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요한일서 514,15절에서 발견되는 말씀을 직시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느낌이 생기든 안 생기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신에게 성령세례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라. 그러면 장차 당신은 체험적으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R.A. 토레이 / 성령세례 받는 법/ 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