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주의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 성령세례를 구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아들인다면 누구라도 당장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1. 성령세례를 받는 일곱 가지 단계
이제 우리는 아주 실제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이다.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지극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대답한다.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는 성령세례를 받는 법은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몇 가지 단계들로 이루어졌다. 누구라도 이 단계들을 밟는다면 성령세례를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만일 성경이 이 점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내가 이렇게 분명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한다.
1)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와 구주로 받아들여라.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와 구주(Savior)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이 말은 방금 내가 한 말만큼 분명하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행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일곱 가지 단계는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베드로가 한 말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이것에 빛을 비추어주는 다른 구절들을 더 인용할 것이다.
처음의 두 단계는 '회개하라' 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는 '회개하라' 라고 말했다. 회개는 무엇인가?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에는 '고쳐 생각함' 또는 '마음을 바꿈' 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 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마음을 바꾼다는 말인가?
회개는 세 가지 점에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서,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셋째는 죄에 대해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무엇에 대해 마음을 바꾸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두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6,37).
그러므로 '회개하라' 라는 베드로의 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희 마음을 바꾸어라. 그분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마음에서 돌이켜 그분을 주(主)와 구주(救主)와 왕(王)으로 모시는 마음으로 바꾸어라" 라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것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1단계이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라. 무엇보다도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라. 당신은 그렇게 했는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고후 5:21; 갈 3:13), 하나님께서 예수의 속죄의 죽음을 보고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속죄의 사역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自稱)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들은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나는 세례를 받았으며,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나는 성찬에 참여하며, 기도회에도 참석합니다. 나는 내가 아는 방법에 따라 최대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당신도 그들처럼 이런 것들에 근거하여 구원을 확신한다면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당신의 '행위' 인데, 로마서 3장 20절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서는 옳은 것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당신의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어보라. 그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무슨 근거에서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나는 내가 행한 것이나 앞으로 행할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몸으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이루신 것을 의지합니다. 나는 그분의 완성된 속죄 사역을 믿고 의지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당신
이 이런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 사역을 의지한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이며,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1단계를 이룬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내가 방금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을 가르친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는다. 이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언젠가 바울은 갈라디아를 지나던 중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그곳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육체적 연약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여러분 대신에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여러분을 구속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갈 3:13). 바울의 전도를 받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의 증거를 믿었다. 이것은 말 그대
로 '듣고 믿은'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에 재가(裁可)의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어떤 유대주의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라디아로 내려왔다. 복음 대신 모세의 율법을 따랐던 그들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가르쳤다. 한술 더 떠서 이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특히 모세의 할례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던 것이다(행 15:1).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갈라디아 신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어린 신자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헷갈렸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갈라디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게 된 바울은 매우 분개하면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편지를 쓴 목적은 다름 아난 이런 유대주의자들의 오류를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했다(갈 3:6).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다음에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할례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인증(印證)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유대주의자들의 오류를 증명했다.
또한 그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체험을 지적함으로써 그의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즉, 그는 “너희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됨으로써 너희가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았다고 증거하셨다. 너희는 바로 이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을 받은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갈라디아 신자들은 이미 분명히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데, 바울은 그들의 체험을 지적하면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듣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선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인증(印證)이다.
즉,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의롭다 하실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을 그분이 인정해주셨다는 인중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성령을 받기 위한 첫 단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구주(救主)로서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주(主)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점은 제4단계와 관련된 성경구절을 논할 때 좀더 깊이 논의될 것이다.
2) 둘째, 죄를 버려라.
성령세례의 복을 받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죄를 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회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사랑하고 죄에 빠지는 태도를 버리고,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태도를 갖는 마음의 변화이다. 이것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두 번째 단계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과 죄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성령과 '거룩하지 못한 죄‘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 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한 가지 죄, 두 가지 죄, 세 가지 죄 또는 많은 죄들을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죄들을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단 한 가지라도 집착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고 성령세례에 대해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심지어는 철야기도 하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들이 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나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1년, 5년, 10년 동안 기도했지만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말한다(그들 중 한 사람은 20년 동안 기도했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많은 경우 나는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나님처럼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의 특정한 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당신은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을 '작은 죄' 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작은 죄'라는 것은 없다. 작은 문제들과 관련된 죄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그러므로 '작은 죄'라는 것은 없다. 지극히 작은 것을 놓고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며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세례의 복을 받을 수 없다.
찰스 피니는 성령세례를 받기를 정말로 갈망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일 밤 집회가 끝난 후 그녀는 그녀의 방으로 가서 밤늦게까지 기도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정신이상이 되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성령세례는 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그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사소한 문제 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머리 장식에 관한 문제였다. 지금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같으면 이런 것을 거의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그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 종종 떠올랐지만, 이것과 관련하여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그녀의 뜻을 굽히지 않았었다. 머리 장식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녀는 손으로 머리에서 브로치(brooch)를 떼어내어 방 저쪽으로 던지면서 "저리
가!" 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 성령이 그녀에게 임하셨다. 그녀가 그때까지 성령세례의 복을 받지 못했던 것은 머리 장식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가 하나님 앞에서 그녀의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당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처리하라. 몇 년 전 나는 남부의 한 주(州)에서 열린 신앙대회에 강사로 참석했다. 그때 집회의 사회를 맡은 한 침례교 목사가 내게 어떤 사람을 가리키며 "저 목사가 이 지역의 우리 교파에서 교황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 모두 실행됩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세례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와 견해를 달리합니다. 아무튼 그가 이 집회에 참석한 것을 보니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우리가 여는 집회에 계속 참석했다. 마지막 집회에서 성령세례에 대해 설교한 후 현관으로 간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와 마주쳤다.
그는 "오늘 집회에서 목사님께서 '성령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일어나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예, 내가 보니 목사님께서는 일어나지 않으셨더군요"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들만 일어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목사님의 이해가 맞습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참 잘하신 것입니다.
“나는 목사님이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실 목사님의 말씀은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아주 가까이 갈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주 가까이 갈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아마 목사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와 내가 이 대화를 나눈 것은 금요일 오후였다. 그후 나는 한 가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른 시(市)에 갔다가 그 다음 주 화요일 오전에 신앙대회가 열리는 그 시로 돌아왔다. 전주 금요일 집회에서 사회를 보았던 목사가 정거장에서 나를 맞았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어제 아침에 열린 우리 침례교 목사 모임에 계셨더라면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지난 주 집회 때에 언급했던 그 목사님, 즉 우리 주(州)의 북부에서 오신 그 목사님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모임 중에 그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믿음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말한 다음, 자기가 행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해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형제들이여, 나는 내가 회심할 때 체험했던 것보다 더욱 분명한 체험을 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가 체험했던 것을 다른 많은 사람들도 체험할 수 있다. 교역자이든 평신도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자기의 죄를 인정할 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집착하던 것을 버릴 때, 누구라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성령세례를 받기를 정말로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시여, 제 마음을 살피소서. 저의 마음이나 삶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소서" 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깨달음을 주실 때 과감히 자기의 잘못된 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다렸는데도 아무 깨달음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도하는 것도,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도, 성령세례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그 밖의 어떤 것을 행하는 것도 다 소용이 없다. (R.A. 토레이 / 『성령세례 받는 법』 / 규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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