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야기

관계를 치유하는 33가지 지혜 10 – 거짓과 사실 왜곡의 안갯속에서(예레미야)

hope888 2022. 4. 29. 14:51

  

거짓된 정보와 왜곡된 사실들이 시커먼 안개처럼 피어올라 심각한 미세 먼지처럼 우리 시야를 가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에 목이 마릅니다. 진리를 알아보는 일, 진실을 가려내는 일의 힘겨움은 어제오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구약 성경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말씀도 그 진위를 식별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 기준이 제시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언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 예언이 성취되었는지, 또 예언의 내용이 신앙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시의 형식에 대한 것인데, 과연 계시가 하느님(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한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언자의 인격에 바탕을 둔 기준으로 예언자가 진실하고 도덕적인 사람인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분명한 소명 의식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준들을 모두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예언의 진위를 명명백백히 가릴 수 있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언 활동을 하는 동안 줄곧 거짓 예언자들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과연 예레미야 예언자는 거짓이 난무하는 가운데 어떻게 진실을 지켜 내며 진리에 항구할 수 있었는지 그의 지혜를 배워 보고자 합니다.

요시야 임금 시절에 예언자로서 활동을 시작한 예레미야는 멸망해 가는 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고스란히 겪어내었습니다. 국가에 닥쳐올 불운을 경고하기 위해 독신으로 살라는 하느님의 말씀(예레 16,1-4 참조)에 따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심판과 파멸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였습니다. 그 까닭에 예레미야는 숱한 오해와 비난을 받았으며,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기간 내내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박해하고 거부하는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사실 성경의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알려 주는 사람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한자로 표기할 때에 '미래 예(豫)‘가 아니라 '맡길 예(預)를 사용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대변자로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백성의 사정을 하느님께 전하는 중재자의 역할도 맡습니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변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전하는 말씀으로 인해 위험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자신의 존재를 흔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이 원하는 소리를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거짓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을 좋아합니다(예레 5.31 참조).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 한 안전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시온 신학은 야훼께서 시온을 선택하시고 시온에 세워진 성전에 머무시며, 다윗 왕조에게 영원한 통치권을 주셨기에 예루살렘은 영원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레미야는 시온 신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성전이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막아 낼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위기를 막아 내는 길은 백성이 철저하게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뿐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도 실로 성소처럼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성전 앞에서 이것을 선언하였고, 이 성전 설교 (예레 7,1-15; 261-6)로 인하여 반대 받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유다 말기의 정치·사회적 혼란기에도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며 평화를 외치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평화를 외치는 그들의 메시지는 그들에게서 나온 생각일 뿐 주님의 계시일 수 없다고 예레미야는 반박하였습니다(참조: 예레 14,14; 23,16.21). 그들은 단지 헛된 희망만을 불어넣으며(예레 23,16 참조), 허황된 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잊게 만드는 '하느님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예언자들'이었습니다(예레 23,30 참조). 참된 예언자는 백성을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이지 그것을 부추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예레 23,22 참조).

예레미야가 대적했던 예언자들 가운데 기브온 출신의 하난야라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 두 예언자가 충돌한 때는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치드키야(시드기야) 때였습니다. 치드키야 임금은 재위 제4년에 반바빌론 동맹에 가담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에돔과 모압, 암몬과 페니키아에 사절을 파견하여 반바빌론 동맹을 결성하였고, 치드키야 임금에게도 사절을 파견하였습니다.

에돔과 모압, 티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들이 치드키야 임금을 만났을 때,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나무 멍에를 메고 치드키야 임금 앞에 나아갑니다(예레 27,1-3 참조). 그리고 바빌론의 멍에를 그대로 메고 있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언자 하난야는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었기 때문에 2년 안에 1차 유배 때 끌려갔던 포로들이 돌아오고, 바빌론으로 옮겨졌던 모든 성 전 기물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예 28,2-4).

예레미야는 하난야에게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하면서,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예언자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예레 28,9 참조). 하난야는 두 해 안에 하느님께서 바빌론의 멍에를 벗겨 주실 것이라며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나무 멍에를 부수어 버립니다.

예레미야는 더 이상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예레 28,11 참조). 예언자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는 쇠 멍에와 같아서 벗을 수 없다는 말씀을 전하시며 거짓을 예언한 하난야는 그해 안에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예레 28,12-16). 예레미야가 그 말씀을 전한 지 두 달 만에 하난야(하나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로 고발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난야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의 낙관론의 영향으로 제1차 유배 때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이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빌론 유배지에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배 기간이 길어질 것이므로 그곳에 정착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번성하며, 그들이 머무는 성읍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예레 29,5-7 참조). 그들의 평화가 그 성읍의 평화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예레 29,8-9 참조). 또한 하느님은 유배지에 있는 백성을 잊지 않으실 것이며, 일흔 해가 지나고 나면 그들을 본국으로 데려올 것을 약속하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예레 29,10 참조).

예레미야의 편지를 읽은 유배민 중에서 네헬람 사람 스마야는 예루살렘의 스바니야 사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배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고 말한 예레미야를 "예언자 행세를 하는 미친 자”로 규정하면서 그를 붙잡아 기둥에 묶고 목에 칼을 씌워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예레 29,24-27 참조). 스바니야 사제가 이 편지를 예레미야에게 읽어 주었을 때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스마야는 하느님께서 부르신 예언자가 아니라 거짓에 의지하여 자신의 말을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예레 29,31 참조).

숱한 거짓 소리의 숲 가운데서 진리의 끈을 놓치지 않고 그것에 따라 흔들림 없이 걸어갔던 예레미야 예언자의 용기와 굳건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두려움도 일어납니다. 쉬운 길을 선택하려 들고 거짓에 기울어지기 쉬운 저 자신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주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달려가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예언을 하는, 곧 말씀을 도둑질하는 자가 될까 두렵습니다(예레 23,21.30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제 소리가 아니라 주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소리와 주님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길 청합니다. ((김영선 수녀 / 『관계를 치유하는 33가지 지혜』 / 생활성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