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생,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한 선택을 통하여 날마다 새롭게 빚어집니다. 어떤 선택은 새로운 가능성과 빛, 환희를 가져다줄 것이고, 어떤 선택은 절망과 후회, 어둠을 가져올 것입니다. 삶에서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조금 의아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카인과 욥 두 인물을 만나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의 상황이 동일하지 않기에 이 둘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세월 동안 우리가 해 온 선택들을 되돌아보고,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지혜를 얻는 데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1) 카인(가인)의 선택
먼저 카인의 선택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낳은 카인과 아벨은 각각 농부와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각자 노동의 결실을 하느님(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을 받아들이셨고, 이 때문에 카인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까요? 카인이 바친 제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만약 그랬다면 카인이 굳이 화를 낼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도 자신이 잘못한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현대의 성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아벨의 제물을 선호하신 하느님의 선택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해석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모든 해석에서는 카인의 지향이나 제물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침묵합니다. 어쩌면 그의 관심은 하느님의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 저자는 하느님이 왜 아벨의 제물만을 선택하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카인의 선택에 있습니다.
화가 난 카인을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왜 화를 내는지 묻습니다. 카인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이 상황을 잘 해결하지 않으면 더 나쁜 결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그에게 미리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동생 아벨을 데리고 들로 나갑니다. 분노한 카인은 아벨의 비명과 피로 들판을 물들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제물을 받아 주지 않으신 하느님께 화가 났지만, 그 분노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동생에게 쏟아 냅니다. 카인은 분노의 원인이 된 하느님 앞에서는 침묵하였지만, 자신보다 약한 존재 앞에서는 억압된 분노를 표출합니다. 왜 카인은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겠음에도 그분께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지 못했을까요?
왜 자신의 제물이 가납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해명을 직접 청하지 않았을까요?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난 후에도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이번에도 하느님께서 먼저 카인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카인에게 다시 한 번 상황을 설명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이때에도 카인은 진실을 외면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 4,9).
왜 카인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피하는 것일까요? 카인은 하느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카인에게 하느님은 그를 이해해 주지도 않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도 않으시는 분, 카인의 소망과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시는 분입니다. 카인은 이런 하느님을 애써 외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카인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이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심을 강조합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그의 선택에 따라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께 말을 건넵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창세 4,13).
카인은 이 짧은 대화를 통하여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찍어 주심으로써 그를 보호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만약 카인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털어놓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선택을 납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직접 말을 건넸다면
그의 인생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2) 욥의 선택
욥은 카인과는 매우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흠 없이 살았던 그는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중병에 걸려 신음하면서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를 단죄하지 마십시오, 왜 저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욥 10,2), 욥도 카인처럼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카인과 달리 욥은 하느님께 직접 여쭙고, 항변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자 합니다(욥 13.3.4. 15 참조).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눈물지으며, 자신의 보증인을 세워 달라고 간청합니다 (참조: 욥 16,20 17.3).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고자 하느님을 만나려고 합니다(욥 19,27 참조).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 하느님께 욥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변해 버리셨냐고 따집니다(욥 30,20-21 참조).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욥기 3장에서부터 욥이 하느님을 불렀다면, 38장에서 하느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그는 끈질기게 기다립니다. 욥이 하느님께 드리는 긴 변론은 '이제는 당신께서 대답하실 차례'라
는 말로 끝납니다(욥 31,35 참조).
그리고 욥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는 신비이신 하느님을 마주하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의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비와 하나 되는 법을 터득합니다.
카인과 욥의 선택이 극명히 달랐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가진 하느님의 이미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카인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욥이 알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은 매우 달랐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크고 두렵고, 심판하시며, 세상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독재자와 같은 분이라면 그 하느님을 뵙고 대화를 나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주관하느라 늘 바쁘시고 큰일들에만 신경을 쓰는 분이라면, 비록 소소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어떤 사정들을 말씀드리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하느님은 카인이 알고 있는 하느님입니까? 혹은 욥이 아는 하느님입니까? 우리 모두는 카인과 욥의 간격 그 어디엔가 서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가 말을 건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화풀이고 투정이라 할지라도. (김영선 수녀 / 『관계를 치유하는 33가지 지혜』 / 생활성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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