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 몸의 암까지도 사랑하라
얼마 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지난 2000년 암 진단을 받은 4,600명의 환자 중 절반이 넘는 51%의 환자들이 10년 이상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현대식 치료법과 최첨단 장비들이 의료현장에 도입됨으로써, 불과 수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암이 수명이 다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존해야 할 만성질환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장시간 암과의 동거가 늘어난 흐름 속에서, 암환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까? 이제부터 내 몸속의 암까지도 배려하고 이해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암을 대하는 그들의 건강한 정신력을 배워보도록 하자.
2. 암은 내 몸속의 세입자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수술실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오늘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는 환자는 이제 겨우 서른한 살. 수술을 맡은 강남 세브란스병원 유방암 클리닉 이희대 교수는 환자가 젊은 아가씨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유방을 보존해주려고 한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이희대 교수의 오랜 경험과 섬세한 손길로 젊은 환자는 유방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이희대 교수가 환한 웃음을 보인다.
이희대 교수는 4기암을 앓고 있는 암환자다. 그러나 오늘도 그는 암 전문으로서 암과의 전쟁, 그 최전선에 서 있다. 이교수의 몸속에서 7년 동안 무려 열한 번에 걸쳐 암이 재발했다. 이희대 교수는 2003년 초 대장암 2기를 진단받았고, 그해에만 수술 두 번, 항암치료 두 번, 방사선치료까지 다섯 번에 걸쳐 사투를 벌였다. 대장암 수술을 받을 당시만 해도 이희대 교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암과 싸우는 암 전문의로서, 대장암 2기의 경우 수술만 잘 하면 열 명 중 여덟 명에서 아홉 명까지 완치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6개월도 되지 않아 간과 뼈에 전이가 발견되었다. 방심이 문제였다. 첫 수술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교수는 병원 기획실장에 임명됐고 본인이 암환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밤낮없이 일에 매달렸던 것이다. 뒤늦은 후회 속에 방황할 시간은 없었다. 마치 게릴라전을 연상시키는 복합적인 치료가 시작됐다. 골반 뼈의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방사선치료를 하고 간으로 전이된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항암치료와 수술이 병행되었다. 하지만 계속된 치료 속에서 이 교수의 체력은 점점 떨어졌고, 암세포들은 빠르게 증식했다.
급기야 2004년 3월에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마지막 상황에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힘든 상황이 숱하게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추스르며 치료를 이어갔고, 마침내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벌써 1년 넘게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건강한 상태다.
골반 뼈에 전이된 암세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다리가 불편해진 이교수는 지팡이를 짚고 암 병동을 누빈다. 암 병동에서 그는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회진을 돌면 의사를 먼저 위로하는 환자들. 이 교수의 회진길에는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암환자들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이희대 교수가 암을 진단받은 지 벌써 7년. 이 교수는 자신의 몸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암세포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 교수가 암을 보는 첫 번째 시선은 일반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다. 이희대 교수는 "암은 내 몸에 사는 세입자"라고 말한다. 방 한 칸을 전세준 것같이, 내가 아닌 남이 들어와서 살지만 조용히 말썽 없이 지내면 동거할 수 있는 존재로 암을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암도 적정한 정도의 크기면 우리 몸의 면역력만으로 적절히 억제하면서 같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희대 교수가 암을 보는 두 번째 시선은 “암 말기는 없다. 4기 다음은 5기"다. 이 교수 본인을 봐도 4기 판정을 받았는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든지 5기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를 찾아온 많은 환자들 역시 4기 암환자지만 몇 년 이상씩 살아 있다. 암이 재발하면 치료하면 되고, 또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희대 교수가 암을 보는 세 번째 시선은 "암환자는 절망감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암 때문에 죽는 건 그럴 수 있지만 대개 암을 빨리 퍼지게 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절망이라는 중간 매개체라고 말한다. 암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더욱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기 때문에 나을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암과의 오랜 동거로 암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지내는 이희대 교수. 오늘도 암과 싸우는 암환자들에게 전하는 이 교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암은 이길 수 있고,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다.
3. Doctor Says: 암은 조절할 수 있다.
암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는 고통의 길로 끝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고생하면 다시 햇빛 쪽으로 나와서 생명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이후 다른 원인으로 암이 재발하면 또 다른 제2의 터널로 들어갔다고 생각해야 한다. 깊고 끝이 없는 동굴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_이희대 교수(강남세브란스병원 유방암 클리닉)
4. 암과 친구처럼 산다
암이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수명이 다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존해야 할 만성질환이라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오랜 기간 암과 공존할 수 있을까?
일본의 치바 현 마쓰도시에 살고 있는 이비인후과 전문의 오구라 쓰네코(60) 박사는 현재까지 무려 24년째 암과 싸우고 있다. 그녀는 유방에서 전이된 암세포들이 전신에 끊임없이 재발하는 다발성 전이암 환자로 일본 내에서는 이미 많이 알려진 유명 인사다.
오구라 쓰네코 박사가 처음 유방암을 진단받은 것은 1987년이었다. 그녀는 당시 세 살배기 딸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수술로 양쪽 유방을 모두 절제했음에도 불구하고 13년 만에 암이 재발했다. 유방은 물론 폐와 간, 늑골과 등뼈, 복부 림프절과 흉막 그리고 뇌를 둘러싼 경막까지 암세포는 그녀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가능한 치료법은 단 하나. 그녀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항암제를 번갈아가며 투여했고, 지금까지도 항암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오구라 쓰네코 박사를 다시 만난 곳은 시내 중심가의 한 댄스스포츠 교습소에서였다. 젊은 시절부터 춤을 좋아했다는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있다. 주변
에서는 모두들 암으로 약해진 그녀를 걱정했고 그녀 스스로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등뼈에 전이된 암 때문에 꼭 보호대를 해야 하고 다리의 기능도 완전치 못하다. 하지만 무대에 선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몸은 제대로 스텝조차 디딜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지난 24년 동안 그래왔듯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실력도 점차 늘어 지난해에는 아마추어 댄스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주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기도 했다. 암을 진단받은 다음부터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더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오구라
쓰네코 박사. 그녀의 한발 한발 내딛는 스텝 속에는 지치지 않는 삶의 열정이 흐르고 있다.
쓰네코 박사는 3개월에 한 번씩 마쓰도시립병원을 찾아 정기검사를 받으며 주치의와 치료법에 대해 상의한다. 최근에 복부 한가운데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상태가 계속됐는데, CT 촬영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 번 검사를 받은 후 이제 겨우 3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간에 전이되어 있던 암세포들이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하지만 오구라 쓰네코 박사의 표정 속에선 별다른 동요를 찾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한동안 컴퓨터 앞에 머물러,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 <오구라 쓰네코의 희망일기>라는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진에게 뭔가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죽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한 버킷리스트였다.
그녀의 버킷리스트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버킷리스트의 ‘첫 번째는 딸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사는 것', 두 번째는 '일주일에 세 권 이상 책을 읽을 것’이었다. 세 번째는 '1년 동안 영화를 100편 이상 영화관에서 볼 것', 네 번째는 '투병기를 쓸 것', 마지막 다섯 번째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이었다.
암과 싸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암과 친구처럼 지내며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암과 공존한다는 그녀의 철학이 통한 것일까? 암이 발병한 날로부터 벌써 24년, 당시 세 살이던 딸아이는 스물일곱 살의 숙녀가 되었다. 이제 오구라 쓰네코 박사의 새로운 목표는 딸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이다.
오늘은 박사가 일본 이비인후과 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는 날.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
졌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구라 쓰네코 박사는 살아 있는 오늘을 향해, 또 발걸음을 한발 힘차게 내 딛는다.
5. Doctor Says: 21세기는 암과 공존하는 시대
20세기가 암과 싸우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암과 공존하는 시대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난 결코 암을 싫어하지도 않고 내 몸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증오하지도 않는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그저 친구처럼 사이좋게 걸어갈 생각이다. _오구라 쓰네코 박사(일본 오구라의원 이비인후과). (허완석 엮음 / 『암중모색 암을 이긴 사람들의 비밀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 비타북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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