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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수정하라 - 10미터만 더 뛰어봐_ 천호식품 김영식 회장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방법’을 ‘방뻡’이라고 발음하는 강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의 유명한 건강식품 광고 카피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해 더욱 널리 알려지고, 자기 회사 상품의 TV광고에 직접 출연해서 한층 더 유명해진 인물이 (주)천호식품의 김영식 회장이다.
김 회장의 인생은 분명히 남다르다.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 점철되고 삶의 밑바닥과 정상을 오르내리며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달랐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를 성공 전략의 모델로 다루는 것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인물로,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를 닮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해낸 것처럼 평범한 우리도 ‘목표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식은 1951년 경상남도 고성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군을 제대한 뒤, 24세에 그는 처음으로 학습지 사업을 시작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추진력이 뛰어났던 그는 학습지 사업으로 어느 정도 돈을 벌자 신발깔창, 금연파이프 등을 만들어 열심히 돈을 벌었다. 대학 등록금이 50만 원도 안 되던 서른 살 때는 6개월에 6천만 원이 넘는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6개월에 약 6억 원을 벌었다고 볼 수 있다. 젊은 혈기와 남다른 열정과 추진력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역시 젊었기 때문인지 자만심에 빠져 돈을 물 쓰듯이 하면서 장난감 제조, 주방기구 사업 등 닥치는 대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확고한 목표 없이 돈벌이에만 치중해서 중구난방 식으로 넓혀 나간 사업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문제점과 후유증이 드러나더니 한순간에 사업이 무너지고 무일푼이 되어버린 것이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어 한동안 허송세월하던 김영식은 1984년 ‘천호물산’을 설립했다. ‘물산’이라는 상호가 말해주듯이 뚜렷한 사업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가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분명한 아이템이 없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지지부진한 사업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던 1986년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큰 고통을 겪었다. 다리에 6개월 동안이나 깁스를 했지만 뼈가 잘 굳지 않아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갖가지 약물치료와 뼈가 아무는 데 좋다는 온갖 약을 복용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때 주위에서 달팽이를 먹어보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영식은 별 기대 없이 뼈가 굳는 데 좋다니까 한번 먹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달팽이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 큰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루가 다르게 뼈가 굳고 상처가 아물었다. 그는 ‘바로 이거다!’ 하며 사업 아이템을 찾아냈다. 교통사고와 달팽이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달팽이의 식용에는 거부감이 컸을 뿐 아니라 식용달팽이의 보급조차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식용달팽이의 효과를 알리는 일과 보급이 우선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거쳐 1989년 식용달팽이의 분양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인 1990년, 천호물산을 ‘천호식품’으로 바꾸었다. ‘천호(泉湖)’는 그의 선친이 작명해준 것으로 “깨끗한 샘에서 물이 솟아 큰 호수를 이루어 많은 사람에게 물을 준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와 함께 식용달팽이를 건강식품으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판매에 나섰지만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역시 달팽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탓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식용달팽이가 요리의 고급재료로 쓰인다지만, 달팽이는 식품이 아니라는 우리 식문화의 뿌리 깊은 전통적 인식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방법을 놓고 오랫동안 고심하던 김영식은 마침내 ‘달팽이 엑기스’를 개발했다. 엑기스는 액체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다음은 홍보였다. 그는 어느 방송의 인기 프로그램을 겨냥했다. 엄청난 TV광고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끈질기게 방송 프로그램에 매달려 출연기회를 얻었고 달팽이 엑기스의 효능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달팽이 엑기스가 대박이 난 것이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건강식품 사업이 잘 풀려 나갔고 김 회장은 당시 부산에서 현금 보유 100위 안에 들 정도로 알부자가 되었다. 그는 많은 현금을 보유하게 되자 또다시 욕심이 생겼다. 서바이벌 게임장, 찜질방, 황토방 체인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1997년 말 전혀 예상치 못했던 IMF외환위기가 덮치면서 김 회장은 자금이 끊겨 하루아침에 파산하고 말았다. 200명이 넘던 직원들이 모두 떠났고, 김 회장의 집과 회사는 경매에 넘어갔다. 그야말로 완전히 알거지 신세가 된 데다 은행부채만 20억이 넘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엄청난 고난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김 회장은 빌딩 9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세무서 직원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체납된 세금을 내라고 독촉했다.
“이봐요! 나, 지금 빚에 쫓겨 9층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합니다. 이 판국에 세금은 무슨 세금이요?”
“죽더라도 세금은 내고 죽어야죠!” 세무서 직원이 냉혹하게 말했다. 그 순간, 김 회장은 오기가 생겼다. “뭐라고? 그래! 세금 낸다! 반드시 재기해서 세금 낸다!” 김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오기가 발동한 김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사무실 보증금을 빼고 부친에게 2천만 원을 빌려 다급한 앞가림을 한 그는 기필코 다시 일어서고 말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결혼반지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전당포에 맡기고 130만 원을 마련했다. 서울 강남의 역삼동에 60만 원짜리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여직원 한 명을 뽑았다. 멋모르고 들어왔다가 회사의 너무나 초라한 행색에 실망한 여직원이 나가려고 하자, 우선 40만 원을 선불로 주어 붙잡았다. 회사에 남아 있는 제품 가운데 ‘쑥진액’이 있었다. 김 회장은 그것부터 팔기로 하고 20만 원으로 홍보 전단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쑥진액이 크게 들어간 명함, 어깨띠를 만들어 걸치고 거리에 나서 하루 온종일 오가는 사람들에게 명함과 전단지를 뿌렸다. 또한 식당, 길거리에 주차해 있는 승용차에 전단지를 꽂아놓고, 골목길, 전봇대 가릴 것 없이 전단지를 붙였다. 심지어 부산행 비행기 안에서도 승객들에게 전단지를 돌렸다. 당황한 승무원이 다가와 “이러시면 안 돼요.” 하며 막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난 쑥장수입니다. 쑥을 못 팔면 난 죽습니다.” 승무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동요 멜로디로 쑥 주제가를 만들어 사람들이 많은 곳 어디서나 크게 불렀다. “쑥, 쑥, 쑥 자로 끝나는 말은 이 쑥, 저 쑥, 들쑥날쑥….” 정말 죽기 살기였다. 여기저기서 드디어 김영식이 미쳤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돈이 없어서 식사는 하루를 저녁 한 끼로 때웠다. 소주 한 병과 600원짜리 소시지 한 개가 그의 하루 식사 전부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한다. 죽기 살기로 덤벼든 그 쑥진액 장사는 하루가 다르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홀로 쑥진액 장사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1998년 1월에 1,100만 원 매출을 올리더니 4월에는 9,800만 원, 1년 만에 매출이 50배로 뛰어 5억 원, 1999년 6월에는 9억 8천만 원의 매출실적을 올렸다. 초고속 신장이었다. 그는 쑥진액 장사를 시작한 지 1년 11개월 만에 은행빚 22억을 모두 갚았다.
그 과정에서 김 회장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비전문 분야에 뛰어들면 망한다.” 그 뒤 그는 본업인 건강식품 이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오직 건강식품 개발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먹지 않는 것은 남에게 팔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에 따라 천호식품은 개발하는 건강식품마다 크게 성공해서 2004년에는 연매출 100억 원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 회장이 또 한 번 미친 것은 ‘통마늘진액’이었다. 제품의 효능을 자신한 그는 통마늘진액을 홍보하기 위해 마라톤대회에 직접 출전하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는 등, 갖가지 과감한 이벤트를 실행했다.
나아가 천호식품과 김영식 회장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최고의 히트제품이 ‘산수유환’이다. 이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전략회의 때의 일화이다. 김 회장을 비롯해서 사장, 전무, 광고대행사 책임자 등이 참석한 광고전략회의였는데 좀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김 회장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강한 경상도 사투리로 김 회장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참석자들이 무릎을 쳤다. “바로 그겁니다.” 한때 시중에서 크게 회자됐던 유명한 광고카피는 그렇게 탄생했다. TV광고에는 김 회장이 직접 출연해서 그의 말투 그대로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 누구에게나 진솔하게 받아들여졌고, 진실성과 제품의 신뢰성이 저절로 드러나는 최고의 광고였다. 광고도 히트했고 제품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김 회장은 “어떤 일에 미치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게 돼 있다. 미쳐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운이라는 것은 열심히 뛰면 오는 것입니다. 운은 자신의 발뒤꿈치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현재 김 회장의 천호식품은 끊임없이 히트제품을 내놓으면서 부산과 서울에 직원 400여 명을 두고 연매출 1,000억 원이 넘는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그가 60만 원짜리 작고 허름한 사무실을 얻어 ‘쑥진액’ 장사를 시작했던 역삼동에 사옥도 지었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지면서 국내 대표적인 건강식품 회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은 이렇게 주장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성공이다. 처음부터 목표를 크게 세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목표를 달성하다 보면 큰 목표도 이루어진다. 목표 달성의 달콤한 맛을 봐야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멀리도 아니고 10미터만 더 뛰면 된다. 지금 바로 뛰어라.”
김 회장은 자수성가한 성실한 기업인으로서 대통령 표창, 보건복지부 장관상, 모범납세자로 국세청장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또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하여,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도 받았으며 모교의 겸임교수로 후진들을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유명한 강연자로 전국에서 수많은 강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자신의 인생과 경영철학을 담은 저서 <10미터만 더 뛰어봐>를 출간,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으며, 2010년 8월, KBS <아침마당>의 ‘목요특강’에 출연해서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강연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자신이 젊었을 때 고생하며 의지를 불태우던 경험, 자기반성, 자아발견, 자기계발과정, 성공노하우 등이 큰 공감을 주었다. 끝.(www.bookcosmos.com)에서 부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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