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대체로 모든 것들이 미화되기 마련이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섭식장애 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섭식장애의 경우 환자 본인이 나서서 병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나 병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다른 환자들은 어떠한지 알기 위해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많은 작품들이 섭식장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미화한다. 특히 섭식장애 증상을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곤 한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섭식장애 재발 위험성이다. 상태가 호전되다가도 영화나 드라마 속 섭식장애 관련 장면이 트리거가 되어 다시 폭식과 구토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다음의 작품들은 섭식장애 환자가 주연 혹은 조연으로 나온 영화와 드라마로 나에게 자극 을 주었던 작품들이기도 하다. 드라마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총 3시즌, 2013~2015), 「스킨스」(총 7시즌, 2007~2013), 「가십걸」(총 6시즌, 2007~2012), 영화 「블랙 스완」(2010), 「머시니스트」(2004), 「공기인형」(2009),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6), 「콰이어트 룸에서 만나요」(2007), 「김씨표류기」(2009), 「투더본」(2017).
이 중 나를 가장 크게 뒤흔들었던 작품은 일본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다. 평범했던 여인의 인생이 작은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B급 감성으로 보여주는 뮤지컬 영화인데, 아름다웠던 마츠코는 죽기 전 폭식증에 걸린 채 오랫동안 칩거 생활을 한다. 그 모습이 마치 나의 미래인 것 같아 공포스러웠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이었다. 극 중 폭식증에 걸린 일러스트레이터가 잠깐 등장하는데, 그는 작품 하나를 완성한 후 의식을 치르듯 폭식 과 구토를 했다. 마치 내 모습을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인 듯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는 폭식, 자해, 이상행동 등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10대 소녀 가 퇴원해 다시 일상에 적응하며 자신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스킨스」 또한 10대들의 방황 을 다룬 작품으로 주연 중 한 명인 캐시는 거식증 치료 중이다. 「가십걸」에서도 주인공인 블레어가 폭식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10대 소녀들이고 이혼 가정에서 친모와 계부와 함께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섭식장애 환자가 원톱 주연으로 나오는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와 달리 「스킨스」와 「가십걸」에서는 서브 캐릭터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한 설정으로 섭식장애가 사용됐다. 특히 캐시라는 캐릭터는 금발 미소녀에 엉뚱하고 사차원적인 매력이 10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캐시병'이란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한창 드라마가 인기 있을 무렵 드라마 속 캐시와 같이 약간 멍한 표정으로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을 따라 하는 사람을 보고 캐시병에 걸렸다고 놀리기도 했다.
최근 일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프로아나는 바로 이러한 섭식장애의 미화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킨스」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그게 정확히 어떤 병인지도 모른 채 단지 캐시 같아 보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마르고 엉뚱하면서 매력적인 여자아이. 그걸 위해서라면 캐시처럼 섭식장애에라도 걸리고 싶어 한다. 섭식장애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섭식장애를 섣불리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섭식장애 환자들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투더본」의 경우 섭식장애 환자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투더본」은 섭식장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 누구도 섭식장애로 인해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되지 않는다. 심각한 단계의 섭식장애 환자들이 모여 치료를 받는 센터가 배경인 이 영화에는 다양한 부류의 섭식장애 환자가 등장한다. 음식을 무조건 거부하는 환자, 폭식을 하는 환자, 먹고 토해내는 환자 등 병증은 다르지만 이들은 음식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습관적으로 자신의 팔뚝 두께를 재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일반적으로는 엄지와 중지로 반대쪽 손목의 둘레를 재는데 그 주인공은 반대쪽 팔뚝의 둘레를 쟀다. 팔뚝 두께를 체크하는 것으로 자신이 살이 쪘는지 가늠했던 것이다. 섭식장애 환자들은 자기만의 체중계를 갖고 있다. 영화 속 그 장면은 이 점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단순히 체중계의 숫자에 집착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체형에 집착하는 섭식장애 환자의 모습에서 나 역시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섭식장애 증상을 새로이 알게 됐다.
하체 비만이었던 나는 특히 허벅지 두께에 집착했다. 똑바로 섰을 때 양 허벅지 사이에 공간이 어느 정도인지로 체형을 평가했다. 샤워를 마친 뒤 전신거울 앞에 똑바로 서서 허벅지 사이의 공간을 확인한다. 공간이 있으면 세이프, 만약 양 허벅지가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면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살이 쪘다는 신호였다. 더 이상 체중을 재지 않게 됐을 때도 이 행동은 지속됐다. 사실 체중계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몸의 느낌이나 일명 '눈바디' 를 통해 체중을 대충 가능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미장센과 영상미를 추구하기에 추한 것은 감추고 아름다운 것은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울 때도 예뻐야 하고 전속력으로 달릴 때도 자세는 완벽해야 한다. 불치병 환자도 단지 비련의 주인공일 뿐이다. 섭식장애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정신 없이 먹고 그것을 변기에 모두 게워내는 그 생생한 장면들은 감춰둔 채 섭식장애 환자 연기를 하는 배우의 마른 몸만을 부각한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섭식장애에 걸려서라도 저 배우처럼 마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뚱뚱한 것보다는 섭식장애에 걸렸더라도 마른 것이 훨씬 낫다고, 영화 속 과장된 주인공들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영화 속 모든 사건에는 명확한 동기나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체로 명확한 원인을 찾기가 어렵다. 내가 봤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엔딩에 가까워질수록 주인공들이 섭식장애를 유발한 원인에 다다르고 이를 해소하는 것으로 병에서 회복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섭식장애의 원인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해소와 회복도 명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봐도 내가 폭식증에 걸린 원인은 그 안에 없었다. (김안젤라 /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 창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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