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Kirikou et la Sorciere
감독: 미셀 오슬로 (1998년, 프랑스)
등장인물: 키리쿠, 마녀 카라바, 키리쿠의 삼촌,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
배경: 연대 미상, 아프리카
상영 시간: 75분 (전체 관람가)
수상: 1999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문제 해결은 '왜?'라는 물음에서부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빈부 · 학력 · 외모와 관련하여 버려야 할 고정관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근시안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편견 안에 가두어 양쪽 모두를 두 번 죽이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차이와 다름에 대해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타인의 주체적인 삶을 존중하고, 동시에 자신의 능동적인 삶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키리쿠와 마녀>는 실루엣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1999)를 만든 미셀 오슬로 감독의 전작으로, 내용에 몰입하다 보면 고정관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마법의 주문 같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영웅 키리쿠와 마녀 카라바의 캐릭터가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마녀를 무조건 나쁘다고 몰아붙이거나 제거해아 할 '악의 축‘으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 사실은 그 마녀 또한 마을의 희생자였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적의 고통까지 감싸 안는다는 점이 매우 독특한 작품입니다.
"엄마, 어서 저를 낳아 주세요.” 아이가 간청하자 엄마는 배에 손을 얹고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엄마 배 속에서 말을 하는 아이는 스스로 태어날 수 있단다."
이윽고 아이는 스스로 걸어 나와 “내 이름은 키리쿠!" 라고 외칩니다. 타악기 중심의 아프리카 음악이 흥을 돋우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머리 모양은 각자 다르지만 어른들은 모두 상반신을 드러냈고, 키리쿠를 포함한 아이들은 모두 벌거숭이입니다.
그렇다면 마녀의 모습은 어떨까요?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더벅머리 마녀와는 달리, 이 영화 속의 마녀는 화려한 에메랄드빛 실크 옷과 보석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키리쿠의 주먹만 한 몸집 때문에 어른들은 그를 피하고, 아이들은 그를 따돌립니다. 하지만 이처럼 몸이 작은 덕분에 마녀에게 잡혀갈 뻔한 아이들을 구해 내고, 저주받은 샘에 들어가 샘물을 되찾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용감한 키리쿠는 작아도 우리의 친구!"라며 환호합니다. 하지만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키리쿠의 삼촌을 제외하곤 아이들과 여자들뿐입니다. 마녀가 마을의 남자들을 모두 잡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마녀는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거죠?” 키리쿠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왜?” “왜?”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원래부터 그러니까.” 한결같기만 합니다.
호기심 많은 키리쿠가 이런 판에 박힌 대답에 만족할 리 없습니다.
어른들이 모두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하자 키리쿠는 엄마에게 와서 묻습니다. “그런데 마녀는 왜 못된 거죠? 왜 그리 심술궂죠?" 그러자 엄마는 "어디 심술궂은 게 마녀뿐이든?" 하고 참으로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마녀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떨칠 수 없는 키리쿠는 답을 얻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모험 중 스컹크, 멧돼지, 뱀 등과 맞닥뜨리지만 지혜로 물리칠 뿐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점 또한 눈여겨볼 만합니다. 자신을 방해하고 공격하던 새와 멧돼지를 이용해 오히려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한 키리쿠는 지혜로운 할아버지를 만나 마녀에 대한 비밀을 듣습니다. 그리하여 먼 옛날 마을 남자들이 마녀의 등에 가시를 박고 집단 폭행을 가했다는 것, 또 마녀에 대한 사람들 생각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키리쿠는 직접 마녀의 가시를 뽑아 주기로 결심하고 필사적으로 마녀의 등에 올라가 입으로 가시를 빼냅니다. 다음 순간 마녀 카라바는 수줍은 처녀로 변하고, 그녀의 입맞춤을 받은 키리쿠는 건장한 청년으로 변신합니다.
카라바와 키리쿠가 함께 마을로 돌아오자, 편견과 미움으로 가득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마녀의 편을 드는 키리쿠도 평소부터 하는 것이 마법사 같았다고 수군거리며 두 사람을 공격하려 합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마을 남자들이 저 멀리서 지혜로운 할아버지와 함께 나타나고, 할아버지가 “용서할 줄 알아야지! 키리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라고 꾸짖은 연후에야 사람들은 잠잠해집니다. 마녀가 저주를 걸어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던 물신(物臣)들이 사람으로 돌아와 가족들 품에 안기자, 키리쿠와 카라바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포옹합니다.
용감하지만 잔인하지 않고, 지혜롭고 정의로우면서 용서할 줄 아는 자세.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넘어서 사악하고 추악한 마녀조차 감싸 안는 톨레랑스 정신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힌 마을 어른들과 달리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문제를 풀어 가려는 키리쿠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눈앞의 현상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원인부터 알아보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괴롭히거나 헐뜯을 때 그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야 진정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실루엣 애니메이션
사물의 윤곽선만을 통해 움직임을 표현하는 애니메이션 기법입니다. 빛이 투과되는 배경에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을 올려놓고 조금씩 움직임을 바꾸며 한 프레임씩 촬영하여 이어 붙인 것입니다. <키리쿠와 마녀>에서는, 키리쿠가 마녀의 성을 지나갈 때 땅굴을 파고 다람쥐와 만나는 장면과 단순하고 명쾌하게 키리쿠의 움직임을 표현한 엔딩 크레디트에서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맛볼 수 있습니다.
2. 톨레랑스 tolarance
‘견디다.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고 박해해선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퍼졌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종교에 대한 군주의 태도를 가리켰지만, 점점 타인에 대한 자세를 가리키는 뜻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 홍세화 씨는, 톨레랑스란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뉘앙스의 '관용 (寬容)'보다는 다름을 인정한 채 어우러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 가까운 단어라 표현한 바 있습니다. 흑백논리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3. 여러분이 생각하는 영웅은 어떤 사람인지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영화를 보고 나서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길잡이: 영웅이라 하면 흔히 탁월한 능력으로 난세를 구한 이, 슈퍼맨 같은 초월적 존재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키리쿠는 몸집이 너무 작아 아이들이 놀아 주지 않았고 어른들도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게다가 지치지 않고 질문과 말대꾸를 쏟아 내어 대부분의 어른들이 성가셔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키리쿠가 어떻게 마을을 구한 영웅이 되었을까요? 키리쿠를 항상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그의 독특한 외모나 성격에 대해서도 침착하게 대응한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키리쿠가 지혜로운 일을 해낼 때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고 춤을 추면서 “키리쿠는 우리 친구!"라고 ‘칭찬 송'을 부르는데, 이 노래를 키리쿠 자신도 흥얼거린다는 점입니다. 칭찬은 고래만이 아니라 키리쿠도 춤추게 하고, 그 칭찬에 걸맞은 행동을 자꾸자꾸 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제 여러분도 친구들의 좋은 점을 찾아서 칭찬해 보세요.
4. 일반적인 액션물이나 모험물과 달리, 〈키리쿠와 마녀〉에서 키리쿠가 차고 있는 칼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살펴보세요.
길잡이: 이 영화에서 칼은 여러 번 등장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남을 해치는 데 쓰이지 않고, 위기를 넘기는 도구로만 쓰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마을 아이들을 잡아가는 배에 구멍을 내 침몰시킬 때, 뿌리가 움직이는 나무의 밑동을 잘라 낼 때 칼이 등장하며, 마을의 샘을 말려 버린 괴물의 몸을 찔러 물을 토해 내게 할 때도 칼을 닮은 부지깽이가 쓰입니다.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있는 마을로 갈 때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단검은, 마녀의 성 밑으로 땅굴을 파서 헤쳐 나갈 길을 만드는 데도 쓰입니다. 마녀의 감시망을 피해 새로 위장할 때는 뾰족한 칼을 새의 부리로 삼기도 하구요. 사나운 멧돼지가 공격할 때는 칼로 찌르는 대신 오히려 멧돼지를 이용해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반면 마녀 등에 박힌 가시를 빼낼 때는 칼로 도려낼 거라는 관객의 예상을 깨고 자신의 입으로 가시를 뽑는데, 매우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치명상을 입을지 모르는데도 끝내 칼을 쓰지 않는 키리쿠의 모습은, 이 영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윤희윤 / 『세상을 껴안는 영화읽기』 / 문학동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