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Bend It Like Beckham
감독: 거리더 차다(2002년, 영국 · 독일 미국)
등장인물: 파인더 나그라 (제스), 키라 나이틀리(줄스),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 (조)
배경: 21세기, 영국
상영 시간: 112 (12세 관람가)
정면 돌파냐, 우회나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이 월드컵 열기로 들끓던 2002년에 개봉된 <슈팅 라이크 베컴>은 어린 시절 축구 경기를 보면서 ‘바나나킥'에 열광하던 오빠들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영화입니다. 바나나처럼 포물선을 그리는 휘어차기, 즉 바나나킥은 정식으로는 스핀킥' 또는 '벤드(bend)'라고 불리는데 이 영화에선 아예 '베컴 슛’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습니다. 'bend'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구부리다'라는 뜻 외에도 우회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호라, 제스가 장애물을 헤치고 꿈을 이루는 과정을 지켜보니 그야말로 벤드, 우회 전법입니다. 정면 돌파 대신 구부리고, 기다리고, 참고, 돌아서 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벤드라는 단어의 중첩된 의미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베컴의 어시스트를 받아 멋진 슛을 쏘는 인도계 소녀 제스 밤라.
이것은 넋을 놓고 축구 중계를 보던 제스의 상상입니다. 방 안을 온통 데이비드 베컴 사진으로 도배한 제스는 언니 핑키와는 달리 외모나 쇼핑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축구 생각뿐입니다. 베컴 생각뿐입니다. 제스는 동네 공원에서 남자아이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러 축구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를 능가하는 제스의 축구 실력을 유심히 지켜보던 줄스가 자신이 속한 여자 축구팀에 들어올 것을 권합니다.
여자 축구팀 감독 조는 ‘포지션'이 뭔지도 모르는 제스를 얕보지만, 드리블과 볼 장악 능력을 보고 바로 제스를 스카우트합니다. 축구팀 유니폼을 입은 채 집으로 오는 길에, 평소 함께 축구를 하던 남자아이들조차 제스를 보고 놀립니다. 제스는 보란 듯이 자유자재로 공을 다루며 남자들의 수비를 제치고 실력을 뽐냅니다. 하지만 이때 공원을 지나던 어머니가 제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여자애가 다리를 드러내 놓고 남자들과 어울려 축구를 할 수 있느냐?”며 역정을 냅니다.
어머니의 태클에 제스는 몰래몰래 축구 연습을 합니다. 요리를 하면서 피망과 양배추로 드리블 연습을 하고, 빨래를 널면서 페널티킥 연습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스가 줄스와 우정의 표시로 포옹하는 것을 언니의 약혼자 부모가 보고 제스를 불량 소녀로 오해하여 언니에게 파혼을 선언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머리가 짧은 줄스가 남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제스에게 화가 난 언니는 제스가 그동안 몰래 축구를 했다고 부모님께 일러바칩니다.
이 일로 제스가 훈련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조는 제스의 집을 찾아옵니다. 조는 제스의 재능에 대해 얘기하며 부모님을 설득해 보려 하지만 부모님은 완강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도 영국 크리켓팀에 입단한 적이 있었지만 터번을 두른 인도인이라고 내쫓겼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며, 소수민족으로 영국에서 살아가는 인도인의 처지를 토로합니다. 더 이상 제스의 부모님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조는 떠나면서 제스에게 “부모님 말씀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야.”라는 말을 남깁니다.
며칠 후 제스는 사촌 집에 놀러 간다고 속이고 독일 원정 경기에 참가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경기 사진이 신문에 실려 아버지에게 들통이 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를 놓고 줄스와 삼각관계에 빠집니다.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제스는, 경기장에서도 줄스와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으로 괴롭습니다. 단독 드리블로 골 찬스를 얻으려는 찰나 상대편 수비수의 고의적인 태클이 들어오고 제스가 항의하자 "인도년!" 이라는 욕설이 들려옵니다. 흥분한 제스가 거칠게 대응하자 주심은 제스를 퇴장시킵니다. 사회의 축소판을 보듯 경기장에서도 예의 없이 도사리고 있는 소수자 차별에 당사자 제스는 물론 관중석도 동요합니다. 제스의 경기를 몰래 지켜보던 아버지 역시 상처를 입습니다.
제스의 법대 합격 통지서를 받고 부모님이 기뻐하는 동안 제스는 방에 올라와 베컴 사진을 떼어 냅니다. 제스는 대학 진학 쪽으로 마음을 굳히지만, 조가 찾아와 미국 프로팀에 스카우트될 절호의 기회라며 클럽 결승전 출전을 권유하자 흔들립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승전 날이 언니의 결혼식이라니……. 결승전 출전과 결혼식 참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제스를 두고 카메라는 결혼식 준비와 결승전 준비를 교대로 비춥니다. 흥겨운 분위기로 가득 찬 인도 전통혼례 준비 장면, 결승전을 앞두고 신발끈을 조이며 활기차게 연습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번갈아 비추어집니다.
제스는 분홍 사리를 입고 피로연 음식을 나르지만 표정은 우거지상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네가 웃을 수만 있다면......” 하고 말하며 경기 출전을 허락합니다. 부리나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경기장에 나타난 제스, 0:1로 뒤져 있던 팀은 제스의 어시스트로 동점골을 얻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때 골 세리머니 장면과 결혼 피로연 손님들이 춤추는 장면이 또다시 교차편집으로 비쳐집니다. 이어 프리킥 찬스를 얻은 제스가 공을 차려는 순간, 상대편 수비
벽은 인도 전통 의상을 입은 친척들의 모습과 겹칩니다. 이 장면은 제스가 넘어야 할 장벽이 경기장 안에서는 상대편이지만 현실의 삶 속에서는 여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벽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결국 통쾌한 '베컴 슛‘으로 역전승을 거둔 제스는 미국 프로팀에 스카우트되고, 그제서야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돌변한 제스의 태도에 가족들은 당황해하지만 소꿉친구인 토니의 도움, 그리고 속 깊은 아버지의 지지에 힘입어 상황은 바뀝니다. 자신도 젊었을 때 난관에 부딪쳐 꿈을 포기했으나 이내 후회했고, 비록 자신은 아파했지만 상처를 대물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꿋꿋하게 세상에 나아가 네 방식대로 싸워서 꼭 이겨 내라!"는 아버지의 마지
막 말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영화입니다.
1.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1975~
체스와 같은 등번호 7번을 단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 그가 1997년에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선발되기까지는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습니다. “나는 체격이 작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발을 걸면 그대로 걸려 넘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볼을 잡으면 곧바로 패스하도록 훈련을 함께해 주셨다. 그때 배운 요령 덕에 지금도 웬만해서는 부상을 입지 않고 태클을 피해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의 말은 이 영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2. 교차편집 cross cuting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병치시키는 편집 기법을 말합니다. 특정한 주제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교차편집은 <대부3>(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90)의 결말에서도 극적으로 쓰였습니다. 새로운 대부가 된 마이클(알 파치노)은 조카의 세례식에 참석하는 동안 아버지(말런 브랜도)를 살해한 반대파를 처치하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합니다. 성당과 살해 현장을 교차해 보여줌으로써 마피아의 이중성 - 충성심과 무자비함 - 은 물론 '대부(代父)'라는 말이 지닌 성과 속의 이중적 의미를 부각시킵니다.
3 여자라서, 어려서, 키가 작아서, 또는 남들의 시선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당당히 맞선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4. 긴 트레이닝복 바지만 입던 제스는 축구팀에 들어와 유니폼 반바지로 갈아입게 되자 한동안 주저합니다. 스탠드에 쭈뼛거리며 앉아 있던 제스가 얼마 안 있어 경기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길잡이: 영화 첫 장면에서 제스의 상상 속 '천재 축구 소녀 제스 발라‘의 인터뷰에 등장한 엄마의 말씀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허벅지를 내놓는 것은 해괴망측한 일입니다. 제스에게 반바지가 부적절한 복장이라는 것은 인도 여성의 전통 의상이 몸을 전부 감싸는 베일 형태라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관습이 아니더라도, 허벅지를 드러내는 것은 제스에겐 꺼림칙한 일입니다. 여섯 살 때 엄마가 없는 사이 요리를 하다 허벅지에 커다란 화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흉터를 드러내기란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감독인 조는 자신의 무릎 상처를 보여 주며, “경기장에서 달릴 때 아무도 상처 따위는 보지 않아. 그래도 넌 뛸 수라도 있잖아?" 라고 제스를 격려합니다. 조는 자신 또한 잉글랜드에서는 차별받는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점을 들며 제스의 마음속 상처까지 공유합니다. 이로 인해 제스는 용기를 얻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맹연습을 하게 됩니다. 자신감에 찬 제스는 귀갓길에 자신에게 야유를 보내는 인도계 소년들에게도 “흉터 처음 보냐? 이게 뭐 어때서?" 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타인의 편견을 지혜롭게 극복합니다.
5. 그토록 축구하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가 마침내 허락을 해 주기까지 제스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길잡이: 이 영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실감케 합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제스가 한 노력은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요리를 배우라면 배우고 빨래를 하라면 하고 손님이 오면 군말 없이 다과를 준비하는 등 항상 순종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이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걸 보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런 평소의 태도 때문에, 제스가 스스로 진정 원하는 꿈을 말할 때 부모님이 더 귀 기울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빌리 엘리어트> (스티븐 달드리, 2001) 에서 주인공 빌리의 문제 해결방식이 그가 추는 탭댄스처럼 저돌적이었다면, <슈팅 라이크 베컴>은 원제 그대로 우회적인
‘돌아가기’로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빌리가 아빠의 반대라는 장벽에 부딪혀(실제 춤을 출 때도 벽을 두드리는 동작이 등장합니다) 꿈을 접게 되자 반항하고 울부짖는 반면
제스는 한 번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항의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가족들, 그리고 오해로 인해 자신을 외면하는 줄스에게도 그저 굽히고, 참고, 기다릴 뿐입니다. 제스의 이러한 자세는 부드러움(여성성)이 강함(남성성)을 이긴다는 동양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보수적 편견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유쾌한 스타일로 가볍게 그려 나간 거린더 차다 감독의 연출 방식 또한 우회 전법으로 비칩니다. 주인공 제스, 감독 거린더 차다. 두 여인은 모두 베컴처럼 우회하는 슈팅으로 절실한 삶의 목적에 골인한 경공(經功)의 달인인 듯싶습니다. (윤희윤 / 『세상을 껴안는 영화읽기』 / 문학동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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