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어릴 때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 때만 해도 깨끗한 곳 찾기가 어려웠고 다들 꾀죄죄했다. 기생충 감염 때문에 봄가을에는 학교에서 단체로 구충제를 나눠 먹었고 동네를 소독하는 방역차 뒤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살충제를 뿜는 그 하얀 연기가 몸에 좋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의 소득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위생 관념도 함께 높아져 이제는 기본 생활 수칙이 되었다. 요즘은 어딜 가도 참 깨끗하다.
공중화장실 같은 공공시설에 가도 반짝반짝 윤이 나고 놀이터의 아이들조차 말끔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약간은 더러워야 건강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위생 관념을 독려할 땐 언제고 이젠 좀 더럽게 살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것이다.
'위생가설'이라는 것이 있다. 위생이 너무 깨끗해서 많은 세균에 노출될 기회가 없으면 면역 체계가 올바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너무 깨끗하게만 살다 보니 오히려 면역력이 떨어져서 요즘 아이들은 알레르기나 천식, 아토피 등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이들은 놀이터나 운동장의 흙에서 뒹굴며 놀았다. 지금의 40~50대 성인들은 다들 그렇게 자랐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아토피나 알레르기 질환 자체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현대의 아이들은 어떤가? 옷에 흙먼지 하나 묻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청결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오히려 아토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만약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제왕절개로 태어나 모유 수유도 받지 않고 질병 등의 이유로 항생제를 다량 투여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아이의 몸속은 중심 미생물군을 구성하는 특정 미생물들이 누락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아이가 특정 미생물이 누락된 채 자라 어른이 되어 다시 아이를 낳는다면? 이 아이에게서 태어난 다음 세대 역시 중심 미생물군 없이 자라나게 될 것이다. 항생제와 항균제품이 무차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상황에서 이런 세대들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이들 세대에서 유독 많은 알레르기성 질환이 나타나고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요즘은 가족 구성원의 수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이 가진 고유의 미생물에 노출되거나 전염성 질병에 노출되는 기회도 적어졌다. 살균 효과를 가진 다양한 목욕 용품이나 청결제, 소독된 수돗물 등에 둘러싸 여 미생물에 노출될 기회 자체가 너무나 적다. 그러나 이렇게 강제로 미생물들이 제거된 공간에는 어떻게든 다른 미생물들이 그 빈 공간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최근 항생제를 먹어도 죽지 않는 미생물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미생물과 접촉하며 살아간다. 때론 미생물로 인해 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면역력이 강해져 몸이 더 건강해진다. 그런데 만약 무균상태에서 산다면(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느 날 강력한 세균이 새로 나타날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병의 원인은 미생물이고, 세균은 모두 병원균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집집마다 항균제품 하나 없는 집이 없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세균을 흉측하게 그리며 가족의 건강을 위해 항균제품을 사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세균에 대한 편견과 상술에 현혹되어 몸에도, 집 안에도 완벽한 무균상태를 꿈꾼다. 그러나 실제로 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전체 미생물 중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극히 적다. 좋은 세균이 훨씬 더 많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가습기에 있을 수 있는 세균을 죽이겠다고 쓴 살균제로 인해 무려 120여 명의 산모와 아이들이 사망한 사건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가습기에 치명적인 세균이 자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도 '세균을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폐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살균제를 사용했다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사람들의 공포감을 조장해서 살균제나 항균제를 판 회사들과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이럴 때일수록 세균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줘야겠다는 의사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모든 살균제와 항균제는 항생제와 마찬가지로 몸에 해로울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살짝 뿌리기만 하고, 휴지로 스치듯 닦기만 해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깨끗해진다며 광고하는 제품들이 많다. 화장실, 싱크대, 자동차 청소 등에 사용하는 살균제와 세제, 각종 항균제품들이다. 그러나 그런 광고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먼지와 얼룩을 힘들여 닦지 않아도 녹여낼 만큼 독한 화학물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품들은 유해균을 죽이는 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덩달아 우리 몸의 유익균마저 파괴하고 있다. 항균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로 몸을 가린 채 우리의 면역계가 생활 속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을 접하면서 면역력을 강화시킬 기회를 빼앗는다.
이제 과도한 청결 인식을 바꾸자. 조금은 더럽게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다.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고서는 무균상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우리의 건강에 바람직하지도 않다. (서재걸 /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 / 위즈덤하우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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