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정치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스토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정치적 의도에 관해서라면 클린턴보다 더 나은 스토리를 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아내와 내가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던 데에는 그의 완벽한 스토리텔링 기술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그가 아칸소의 ‘교육주지사'로 유명했던 시절부터 그를 알고 지냈다. 당시 우리는 베벌리힐스 호텔에서 열린 오찬행사에 그를 초대해 '에듀케이션 퍼스트 Education First’라는 단체를 위한 연설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 단체는 국가차원의 공교육 수준 향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저명인사들과의 만남이야 말로 그가 가장 원하는 정치적 자산임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로스앤젤레스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무려 600명을 불러 모았고, 클린턴은 공립학교의 개선이 이 나라에 얼마나 절실하고 큰 기회가 되는 일인지 역설했다. 그가 화려한 언변으로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의 말에서는 지성과 열정 그리고 감동이 묻어 나왔고, 우리는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고 굳게 확신했다.
그런데 1992년 민주당 예비선거가 시작되자마자 베트남전 병역 기피 의혹과 불륜 문제가 연달아 그를 강타했다. 그 결과 민주당 후보로서 당연히 확보해야 할 뉴햄프셔에서 덜컥 지고 말았다. 1952년 이후로 먼저 뉴햄프셔에서 이기지 않고 대선을 이긴 후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정계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표가 있는 곳에 돈도 흘러간다.'는 말처럼, 이 패배는 클린턴 캠프를 엄청난 재정 위기에 몰아넣고 말았다.
예비선거 다음 날 아침, 그의 수석 참모 중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는 클린턴이 다음 경합주로 넘어가려면 그날까지 9만 달러를 모금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당시 소니의 CEO였던 내가 클린턴 주지사를 대신해서 할리우드 지역사회에 도움을 요청해 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이 말하는 액수만 봐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양반은 지금 다른 일도 아니고 미합중국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결승선을 앞두고 총력을 기울이려 하니 50만 달러 정도만 구해 달라고 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우 다음 유세지로 가기 위해 막판에 고작 9만 달러를 부탁하다니, 이건 선거운동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긴다는 믿음은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나부터가 이미 의심을 가득 안고 이렇게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니라면 제가 왜 이런 부탁을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선거자금법은 한 사람당 최대 기부금액을 1천 달러로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부탁받은 총액을 채우려면 수많은 사람에게 내 신용을 걸고 부탁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후보가 직접 정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클린턴이 전화를 바꿨다. "거버 씨, 안녕하세요. 클린턴입니다." 그리고 둘 다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전
화기 건너편 클린턴의 머릿속에서는 상대방(즉 나)의 마음을 자신의 목적을 향해 옮겨다 놓을 스토리를 찾느라 한창 정신 근육을 단련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혹시 영화 <하이 눈High Noon>을 보셨습니까?"
당연히 알고 하는 질문이었다. 영화 제작자가 어떻게 그 영화를 모르겠는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1952년 작 정통 서부극으로, 게리 쿠퍼가 영웅적인 보안관 윌 케인 역으로 출연한 영화였다. 줄거리는 주인공이 정오 열차로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악명 높은 갱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는 이야기였다. 케인은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결투를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기까지 그의 곁을 지켜 준 사람은 용기 있는 어린소년 하나뿐이었다.
클린턴은 케인의 다급하고 외로운 혈투 스토리를 구구절절 꺼내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했다. “거비씨, 지금 상황이 바로 하이 눈입니다."
아하! 그 말 한마디가 내 감성을 자극했고, 나는 즉각 요청을 수락했다. 영화에서 영웅은 정오를 알리는 호각 소리와 함께 자신의 내면과 외부에 모두 존재하는 악당에 맞서 이기기 위해 용감하게 나선다. 지금 우리의 영웅 빌 클린턴도 바로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금 후원자라는 나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그를 도와준다면 말이다.
클린턴이 실제로 영화광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속한 사람에게 통할만 한 소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시드 개니스sid Ganis를 찾아갔다. 그는 소니의 마케팅 총책임자로, 나중에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었다. 나는 허겁지겁 커피를 마시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신세 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전화해서 방금 저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하세요."
그리고 우리 둘 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하이 눈> 아시죠? 영화 말이에요." 모두에게 그렇게 물었다. 물어보나마나 였다! "자, 지금 빌 클린턴이 처한 상황이 하이 눈이에요. 귀하 부부께서 각각 1천 달러씩 기부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요, 정오의 호각소리가 울리기 전에 말이에요. 이번 경우로 말하자면, 호각소리는 오후 4시에 울립니다."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영화 이야기에 거의 모든 이들의 감정이 움직였다. 우리는 그날 오후 내내 모금 활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정각 4시에 클린턴의 수석 보좌관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하이 눈이 됐네요. 필요하신 금액을 마련했습니다. 그럼 나가서 악당을 물리쳐 주세요. 꼭 이기십시오."
클린턴은 그때부터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그 기세는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 5월에 그가 캘리포니아 경선을 위해 비행기로 날아왔을 때, 나는 수천 명의 지지자와 함께 공항에 나가 있었다. 그는 계단 맨 꼭대기에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게 벌써 언제 있었던 일인가 싶다. 클린턴의 선거팀은 백악관에 입성했고, 개니스와 나는 취임식에 초대되어 기쁨을 만끽했다.
클린턴 사건을 겪은 후, 나는 스토리텔링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콘텐츠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스토리는 어디에나 숨어 있다.
우리는 모두 매일 생생한 스토리를 겪으며, 우리 머리에는 책에서 읽거나 영화 또는 TV에서 본 스토리의 보고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많은 잠재적 콘텐츠로부터 주어진 목적에 맞는 것을 골라내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을까? 예를 들자면 빌 클린턴은 어떻게 그 많은 스토리 중에서 하필이면 <하이 눈>을 딱 집어내 나를 설득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 그가 영화 이야기를 한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코미디, 비극, 액션, 모험 등 수천 편의 다른 영화중에서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이 눈>이 가장 완벽한 선택지였던 이유는, 클린턴이 이겨 내야하는 상황과 똑같이 닮은 스
토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굳이 긴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제목만 듣고도 머릿속에서 연관성이 저절로 떠올랐다. 우리의 영웅은 케인처럼 모든 사람이 주저앉아 있는 중에도 결연히 일어날 것이다. 클린턴은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끝까지 싸워서 이길 거라고,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 더구나 충직한 소년의 도움으로 승리를 쟁취한다는 내용까지 있으니, 내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영화에서 케인이 역경을 극복하는 감정적인 드라마와 그 절박함 그리고 마침내 누리게 되는 흥겨움을 이미 알다 보니 클린턴이 선거 유세에서 겪는 일들을 곧바로 공감할 수 있다. 나는 그를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했고, 나중에는 우리 모두 그를 컴백키드comeback Kid, 즉 '돌아온 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피터 거버 / 『스토리의 기술』 / 라이팅하우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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