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넬슨 만델라
1993년에 나는 세계에 몇 안 되는 진정한 지도자를 모시고 며칠을 보내는 특권을 누린 적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반대운동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소니 엔터테인먼트의 CEO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신의 75세 생일 기념행사를 주최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 왔다. 전화를 받은 것은 만델라가 소수 백인 통치에 반대하다 투옥되어 거의 30년 만에 석방된 지 불과 36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는 이후 1993년 말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최초의 민주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전화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만델라는 거국 중립내각 수립 계획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기존 체제에 속한 인물과 다양한 인종 및 정당을 대변하는 새로운 리더들을 포괄한다는 이 계획은 남아공의 당시 상황에서 매우 예외적이고 대담한 안이었다. 서구 사회는 45년간 지속된 인종차별 정책으로 무수한 유혈 사태와 증오가 얼룩진 남아공에서 과연 그런 정부가 성공할 수 있을지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새 정부가 성공하려면 서방국가의 외교적, 문화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경제적 지원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서구 사회의 편견을 타개하고, 평화로운 새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자신의 비전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려던 참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 행사를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내가 파티 주최뿐 아니라 몇몇 비즈니스 리더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선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덕분에 나는 며칠 동안이나 만델라를 곁에서 지켜보며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미래에 참여해 달라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요청이 담긴 스토리가 하나 있었다.
“27년간 투옥되어 있으면서 제가 알고 지낸 교도관 중에, 틈만 나면 나에게 곧 풀려날 거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델라는 그 교도관이 자신을 열렬히 지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승리의 날이 눈앞에 온 듯이 열광했지만, 정작 만델라가 보인 반응은 전혀 달랐다. “저는 그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마다 오히려 서글펐습니다. 저의 정신과 신념이 결코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몸은 갇혀 있었지만 제가 꿈꾸는 스토리는 절대로 가둘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꿈꿀 자유마저 앗아가지 않는 한, 그를 가둘 감옥은 어디에도 없다는 진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만델라는 이야기를 더 큰 무대로 옮겨 자신의 나라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그의 국민도 자신과 똑같은 자유를 맛보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온 국민이 공허함과 절망의 감옥에 갇혀 나라를 잃게 될 판이었다.
이윽고 그는 행동을 촉구했다. “제가 미국에 온 이유는, 여러분에게 저의 조국에 재정 지원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평판과 신뢰를 한번 걸어 주십사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친구와 이웃에게 그리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스토리를 전해 주시고, 이 나라의 잠재력을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여러분이 계속해서 도와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만델라의 진심은 너무나 분명했고, 그의 이야기는 강한 호소력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얻은 영감과 동기에 힘입어 기꺼이 자신의 지적 자산과 평판 자본을 동원해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그들은 나도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넬슨 만델라의 말을 들은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알렸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피의 복수와 정치적 혼란 없이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넬슨 만델라가 높이 치켜든 깃발에 힘입어 평화로운 정치 혁명이라는 그의 비전이 실현되었다.
2. 딸 아이 조디
세상을 살다 보면 서로 너무 잘 아는 사이일수록 진심을 보여 주기가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몇 해 전 딸 조디 Jodi 가 새로 의류 회사를 차린다고 나에게 투자를 부탁했을 때였다. 이미 30대에 접어든 딸은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사가 될 준비를 해 오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요가를 주제로 한 패션 의류 제조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업을 시작하는 데 수십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왜 하필 나한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곧이어 '왜 꼭 이 사업을?', 그리고 ’왜 지금 와서?'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딸은 사업이나 유통, 소매, 심지어 의류 디자인 분야에도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물론 그 녀석으로서는 다른 누구보다 아버지가 만만한 투자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이었다. 딸의 생각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심은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전하는 스토리가 어떤 것이든, 진정성을 보여 주기만 하면 청중은 나의 말에 공감하는 것은 물론, 나와 똑같은 열정을 품을 수 있다. 누군가가 모든 역경을 극복하려는 진심을 보여 줄 때, 그것은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성공은 진정한 확신으로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조디의 스토리는 자신의 열정을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경력이나 나의 투자 성향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어쨌든 딸아이를 응원하는 것과 그 아이의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조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어린 소녀 시절부터 주변에서 보아 온 화려한 인물들 틈에 자신도 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보다 나아 보이고 또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 같아, 자신은 늘 방관자가 된 듯 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문제는 자신이 늘 끼고 살다시피 하던 잡지에 등장하는 날씬하고 유연한 몸매와 자신의 몸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디는 체중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신의 몸은 전혀 모델처럼 완벽하지 않았고, 자신이 아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조디는 패션을 좋아했지만,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왜 키가 178 센티미터 이상이고 체구가 4 사이즈를 넘지 않는 사람에게만 잘 어울리는지 의아했다. 딸아이는 체구나 체형,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아무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포용성 있는 패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활동에 간편한 옷은 누가 입어도 멋지게 보이고 편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이 분아의 패션 디자이너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마침내 조디는 아무도 그런 옷을 만들지 않는다면 자신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요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조디는 모든 여성이 입고 요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옷, 그러면서도 매거진에 나올 만큼 멋진 옷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다.
딸의 말에서 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적의식을 발견한 나는 그 말이 외부의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사가 되겠다고 할 때는 보이지 않던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고객들도 똑같이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가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해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만족을 안겨 주는 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딸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내 생각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특히 지금까지 많은 일을 진행해 왔고 이미 ‘비욘드 요가 Beyond Yoga'라는 브랜드의 활동복을 출시할 준비도 마쳤음을 보여 주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한번 일을 시작하자 그녀는 자신의 진심이 담긴 스토리를 전하면서 계속해서 상품을 팔아 나갔다. 조디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공급업자와 고객 그리고 미디어에 맞는 형태로 바꿔 각각을 상대로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마다 모두 그녀의 동기에 공감했다. 특히 조디와 같은 경험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예컨대 평생 체중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오프라 윈프리는 조디의 철학에 공감해 조디의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오 매거진 O Magaine〉 표지에 실었다.
8만 달러로 출발한 비욘드 요가의 매출은 단기간에 무려 500만 달러로 치솟았고, 이제는 요가 분야를 뛰어넘어 '아이 엠 비욘드 l am BEYOND’라는 생활 의류 브랜드로 성장했다. 비록 처음의 나는 딸의 말을 가장 냉정한 태도로 듣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스토리 덕분에 가장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투자자가 되었다. (피터 거버 / 『스토리의 기술』 / 라이팅하우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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