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의 울음소리는 여름을 알리는 대표 신호입니다. 중국 진나라의 시인 육운은 매미가 "지극한 덕을 갖춘 벌레"라고 평하며, 매미에게서 다섯 가지 덕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신(信)인데요, 매미는 여름철이 되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어김없이 자신의 할 도리를 지키어 울어대니 신의를 갖추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매미가 그 신의를 지키기 위해, 그러니까 여름철에 목청껏 울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무려 7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세상 구경은 허무할 만큼 일찍 끝납니다. 성충이 된 매미는 일주일에서 길어야 한 달 정도 살면서 짝짓기를 한 뒤 생을 마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7일의 삶을 위해 무려 7년의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것이죠. 이 정도면 그야말로 '인내의 화신'이라고 할 법한데요. 여기 매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인물이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숨죽인 채 칼을 간 사람, 바로 고려의 제4대 왕 광종입니다.
광종이 왕위에 오른 949년은 호족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였습니다. 본디 고려는 호족 연합 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유력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혼인 정책을 펼쳤는데, 그 결과 아들만 25 명이나 되었죠. 이처럼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많다 보니 태조사후 호족 출신 외척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고, 따라서 왕권은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태조를 이어 혜종이 즉위하자, 호족들이 보낸 자객이 왕의 처소에 몰래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왕을 죽이려 한 역모인데, 혜종은 잘못 건드렸다가 호족이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워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호족들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왕임에도 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저 공포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혜종은 매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결국 신경증이 심해져 재위 2년 만에 죽고 맙니다. 그 뒤를 이은 동생 정종 역시 혜종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며 호족 세력을 제압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재위 4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호족들의 기세에 짓눌려 시름하다 요절한 형들의 뒤를 이은 왕이 광종입니다. 그는 혜종과 정종이 왕권이 약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죽어가야만 했던 비참한 상황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왕권이 바닥에 떨어진 시기,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데다 목숨까지 위태로운 자리에 오른 광종은 어떻게 했을까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호족의 편에 섰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내가 왕인데 이렇게 살 순 없지' 하면서 호족과 맞섰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광종은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왕이라는 호칭만 가진 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 거죠. 그러다 보니 호족들도 딱히 그를 경계하거나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 위협도 되지 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허수아비 왕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한 해 한 해 세월이 흘러 어느덧 7년이 지난 956년, 허울뿐인 왕으로만 살던 광종은 갑자기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삼한통일 때 억울하게 호족의 노비가 된 자들을 조사하고 살펴 옳고 그름을 가리도록 하시오."
바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것입니다. 노비안검법 선포는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호족들과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선언이자, 개혁을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전쟁 포로로 잡혀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가 많았는데, 노비안검법은 이처럼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안검, 즉 자세히 조사해서 다시 일반 양민으로 돌려놓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당연히 호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 생각 없고 나약한 줄만 알았던 왕이 갑자기 급진적인 정책을 떡하니 내놓았으니까요.
호족들은 놀라움을 넘어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호족이 지닌 막강한 힘은 군사력에서 비롯됐고, 그들이 거느린 사병 대부분이 노비였던 터라 노비들을 다시 양민으로 돌려놓으면 호족의 힘이 약해질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죠. 미국 남부 지역에서 격렬하게 반발했던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처럼 광종의 노비안검법도 반발이 엄청났습니다. 광종의 왕비인 대목왕후까지 나서서 반대할 정도였죠. 하지만 광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려의 노비 해방은 노비안검법이 처음은 아닙니다. 태조 왕건 역시 개국 직후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노비로 전락한 자들을 조사해 원래 신분으로 돌려준 적이 있습니다. 광종은 선대왕의 선례를 들어 "그때처럼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원래 신분으로 환원하는 것뿐"이라며 호족들을 설득했고, 반박할 논리를 찾기 어려웠던 호족들은 결국 수긍하게 됩니다.
노비안검법이 실시되면서 호족들은 경제적·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습니다. 하지만 고려 정부는 세금을 낼 인구가 증가하면서 나라 살림이 나아졌죠.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라서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노비 해방으로 양인이 늘어 그만큼 조세 수입도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재정을 확보한 광종은 그로부터 2년 후인 958년, 또다시 호족들이 예상하지 못한 정책을 시행합니다.
“앞으로 유교적 지식을 갖춘 능력 있는 자들을 시험을 통해 관리로 선발하겠다."
이는 과거제를 실시하겠다는 선언으로, 호족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와 다름없었습니다. '너희들은 개국공신이라는 이유로 이제껏 잘 먹고 잘 살았지만, 너희 자녀들부터는 그럴 수 없다. 왕인 내가 실력을 평가해 관료를 뽑겠다'라는 뜻이었죠. 노비안검법이 경제적 개혁이라면, 과거제는 정치적 개혁이었습니다. 광종이 과거제를 시행하면서 고려는 '칼의 시대'에서 '붓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지요. 또한 이전까지는 관료 등용에서 '신분'만 보았는데, 이제 '실력'을 따지게 된 것입니다. 칼에서 붓으로, 신분에서 실력으로 넘어가는 획기적인 분기점에 있는 제도가 바로 과거제였죠.
호족들은 그제야 광종의 속내를 알아차렸습니다. '아, 이 인간이 그 동안 바보처럼 가만히만 있었던 게 아니구나. 우리 몰래 우리를 내치려 칼을 갈아온 거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은 거죠. 호족들은 우리가 고려를 세우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데, 지금 개국공신에게 뭐 하는 거냐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게 바로 광종의 한 수였던 것 같습니다. 광종의 최종 목표는 호족을 숙청해 왕권을 강화하는 거였는데, 아무런 명분 없이 호족들을 내칠 수는 없었지요. 호족들을 쳐내기 위해서는 정치적 명분, 그러니까 그들이 왕에게 대드는 역모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광종은 하나씩 치밀하게 단계를 밟은 것으로 보입니다. 노비안검법을 시행해 호족들의 군사력을 약하게 만들어놓고, 과거제 실시로 호족들이 반발하자 “감히 왕에게 대들다니, 이것은 역모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미 힘이 많이 빠진 호족들을 숙청해버린 것이죠.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내가 이것을 던지면 상대는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럼 나는 그 반응에 이렇게 대응하면 된다. 이게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광종은 7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때를 기다렸던 겁니다. 그 7년간 그는 자신에게 계속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나의 때는 언제인가?"
허수아비 왕이라는 모욕과 멸시에도 그는 오직 자신의 질문에 집중했을 겁니다. 호족들이 기세등등하게 왕실과 나라를 자기들 뜻대로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 고려를 개혁할 때가 언제인지를 계속 고민하며 차근차근 준비해온 것이죠.
실제로 그 시간 동안 광종은 여러 방면으로 힘을 쌓았습니다. 몰래 중소 귀족을 포섭하고 민심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정치 관련 서책을 섭렵하며 그 이론을 달달 외웠습니다. 당시 그는 당 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정치 문답을 적어둔 《정관정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왕학의 교과서라 칭송받는 책을 읽으며 자신의 때를 도모한 것이죠.
무엇보다 광종은 호족과 연줄이 닿지 않아 진정한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입니다. 쌍기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금세 문병(대재학)이 되었습니다. 과거제는 그런 쌍기의 건의로 시행되었죠. 이후 광종은 다른 외국인들도 계속 등용했는데, 덕분에 외국인 인재들이 '기회의 땅' 고려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든든한 왕의 편이 되어 광종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그렇게 광종은 왕권 강화와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지요.
만약 광종이 이처럼 왕권이 약한 시기에 왕이 되다니, ‘나는 때를 잘못 만났다'라며 그저 한탄만 했다면 어땠을까요? 혹은 '왕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데, 이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라며 왕위에 오르자마자 개혁을 감행했다면 어땠을까요? 광종은 자신의 '때'를 치밀하게 계산하고 철저하게 준비했기에, 개혁의 군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종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 많은 피를 봤습니다. 광종은 왕권을 빛낸(光, 빛 광) 대단한 왕인 동시에 미쳤다(狂, 미칠 광)고 밖에 할 수 없는 숙청을 펼친 군주이기도 했지요. 호족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형인 혜종, 정종의 아들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활용할 때는 균형 잡힌 시각과 취사선택이 중요합니다. 뜻을 이루고자 너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광종의 잔혹함은 경계하고 비판해야 마땅합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을 인내하며 준비한 그 노력은 새기되, 노력 이후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죠.
광종에게도 흔들림이 찾아온 시기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이러다 영영 허수아비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이토록 준비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에게는 ‘뜻을 펼칠 때'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지금은 그때를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할 시기라는 것을 알았기에 흔들리다가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만의 질문을 품은 사람, 삶의 화두가 분명한 사람은 그 질문과 화두를 뿌리 삼아 어떤 비바람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습니다. 수험생이든 취업 준비생이든 혹은 직장인이든, 이토록 열심히 노력하는데 내 꿈을 펼칠 때가 정말 오긴 할지, 이렇게 시간만 잡아먹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불안하고 초조한 분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7년을 인내한 매미가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 '맴맴' 울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7년간 허수아비 왕으로 살며 개혁의 칼을 간 광종이 결국 왕권 강화와 개혁에 성공했듯, 때는 반드시 옵니다. '나의 때는 반드시 온다'라고 믿으며 흔들리지 않고 준비한다면 말입니다.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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