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기

일생일문 2 –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hope888 2022. 5. 24. 09:12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집니다. 당시 일본은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는데, 일왕의 암살을 시도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습니다. 즉, 그의 시도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그만큼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한국과 한국인의 저항정신은 세계로 타전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본인으로 살았던 이봉창. 그런 그가 어떻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걸까요? 그의 마음, 그의 삶이 완전히 뒤바뀐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기노시타 쇼조가 된 이봉창은 완벽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일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일본인이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을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죠. 그러던 어느 날 교토에서 일왕의 즉위식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다른 일본인들처럼 구경에 나섭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 자칫 일왕을 위협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경비도 그만큼 삼엄했죠. 경찰들은 길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문했고, 그 과정에서 기노시타 쇼조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구금해버리죠.

이 사건으로 이봉창은 커다란 충격에 빠집니다. 일본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일본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은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깨달은 그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한국인으로도, 일본인으로도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일대 혼란이 찾아온 순간, 그는 깨닫습니다. 일본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당한 수모가 가슴 깊이 쌓여왔다는 것을요.

대상을 찾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와 원한, 이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를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깨달은 것이지요. 훗날 김구를 만난 이봉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작년에 일본 '천황'이 능행을 한다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엎드리라고 하기에 나도 길가에 엎드려서 그 모습을 보았는데, 그때 나는 지금 내 손에 폭탄이 있다면 '천황'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소."

자신의 마음속에 차별에 대한 저항과 그 차별의 주체에 대한 원한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이봉창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사실 이봉창이 앞서 일본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치열한 고민을 통한 선택이었다기보다는 급격한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그저 따라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일본인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니,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기로 한 것이죠.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이봉창은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김구를 만납니다. 사실 김구는 처음에 이봉창을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하죠. 일본어를 일본인보다 잘하고 오히려 한국어가 어눌한 한국인이라니, 혹시 일본에 매수된 스파이가 아닐까 싶기도 했을 겁니다. 게다가 이봉창은 술과 노래를 좋아해 취하면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호방하게 놀아 '일본 영감'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하니,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김구의 의심이 믿음으로 바뀐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김구는 우연히 이봉창이 임시 정부 요원 한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봉창은 마치 상대에게 따지듯이 묻고 있었죠.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은 왜 죽이지 못합니까? 나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을 타도하려면 그 우두머리를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사람을 어떻게 죽여? 그건 무리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기회만 주십시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김구는 이봉창의 진심을 깨닫고 그를 첫 번째 한인 애국단 단원으로 임명합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큰 위기에 직면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거센 압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펼치지 못하다 보니, "과연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기는 한 것이냐"는 질문까지 받을 정도였죠. 그런 상황에서 '임시 정부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김구가 만든 조직이 한인 애국단이었고, 이봉창은 그 애국단의 첫 번째 단원이 된 것입니다. 단원으로 임명된 이봉창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제 나이가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한들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략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해 늘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영원한 쾌락'이라는 그의 말이 지니는 생경함과 놀라움 때문입니다. 사실 독립운동가, 역사 속 위인이라고 하면 정말 존경은 하지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토록 숭고한 정신을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품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봉창은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주변에서 쉽게 만났을 이웃집 청년처럼, 나라의 안위보단 자신의 안위가 급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엄청난 전환을 맞이해 독립운동가가 되긴 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는 데도 거창한 표현으로 사명감을 드러내는 대신 어찌 보면 세속적으로 느껴지는 '쾌락'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요.

풍류를 즐기는 모던보이였던 이봉창은 '누구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 순간, 아마도 이런 답을 내렸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작은 쾌락들을 추구하고 누리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보다 크고 중요한 쾌락, 즉 나라의 독립이라는 숭고한 쾌락을 위해 살아보자고요. 사전을 찾아보면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움'이라고 풀이돼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꿈꾼 영원한 쾌락은 조국의 독립을 통해 찾아올, 모두가 차별과 멸시에서 벗어나 유쾌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세상, 아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즐기며 사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후 이봉창은 '영원한 쾌락'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사용합니다.

자신이 주장했던 일왕 암살을 실제로 거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 직전의 일입니다.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폭발물을 마련한 한인 애국단 일행은 거사를 앞두고 사진을 남겼는데요, 곧 목숨을 잃을 것이 자명한 그 시각,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머릿속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숨어 있었을까요. 사진을 찍기 전 이봉창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얻고자 이 길을 떠나는 겁니다. 우리 모두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신년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집니다. 하지만 성능이 떨어졌던 폭탄은 제대로 터지지 않았고, 암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이봉창은 1932년 10월 10일,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맙니다.

비록 일왕 암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봉창의 시도는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존재 자체를 의심받던 상황에서, 임시 정부가 건재함을 알림으로써 이후 많은 독립자금이 쏟아져 들어왔고, 무엇보다 일제에 탄압받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향한 희망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KBS 1TV <역사기행 그곳>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프로그램을 함께한 개그맨 이윤석 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시절 그들은 가슴에 폭탄을 품었는데, 자신은 무엇을 품고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요. 우리도 같이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지금 가슴에 무엇을 품은 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 마음속 화두를 추구하며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즉 누구로 살고 싶은지를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