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가미카제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고려 시대에 여몽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의 일입니다. 갑작스런 태풍으로 연합군이 침몰하면서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그 태풍을 '신이 불어준 바람', 즉 '신풍'이라고 불렀는데 그 신풍의 일본어가 바로 가미카제입니다.
가미카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 때 다시 등장합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일왕의 방패가 되어 일본 제국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적에게 돌진하는 무모한 작전, 즉 자살 공격에 동원됩니다. 무고한 생명들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이고 잔인한 작전이었죠. 이 가미카제 특공대원 중에 미쓰야마 후미히로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전을 수행하기 하루 전날 단골 식당을 찾아가 "아마도 여기를 찾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며, 고향의 노래를 한번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노래가 시작된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랍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일본인인 그가 한국말로 <아리랑>을 부르다니, 어찌 된 일이었을까요? 사실 미쓰야마 후미히로는 한국인 탁경현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시대의 비극에 어쩔 수 없이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일본인처럼 살았지만,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자신의 뿌리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한국사람 탁경현이 탄 비행기는 1945년 5월 11일 오전에 출격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가 끊깁니다.
인간을 전쟁의 소모품으로 이용한 가미카제 작전. 여기에 동원돼 목숨을 잃은 한국인은 탁경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특공대를 지지한 한국의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서정주는 가미카제 특공대원 마쓰이 히데오(한국명 인재웅)를 찬미한 시 <오장 마쓰이 송가>를 쓰기도 했죠. 이런 시입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서정주는 친일 시를 많이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 뛰어난 재능, 놀라운 필력을 우리나라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일제를 위해 자신의 붓을 사용한 흔적이 너무나 많은 명백한 반민족행위자입니다. 서정주만이 아닙니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친일의 길을 걸으며 글과 말로 일본군 '위안부', 가미카제 등에 동원되는 것을 감사히 여기라고 떠벌렸습니다.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던 걸까요?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지식인도 분명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동주입니다.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보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나의 이름과 나의 글과 나의 문자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일제 강점기, 그는 어쩔 수 없이 일본식 이름을 지니고 일본의 글을 통해 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시대가 이러니 별 도리가 없다'는 식으로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처절한 부끄러움을 낱낱이 고백하고, 시대의 문제점들을 폭로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또한 자신을 부끄럽게 한 원인을 바로잡고자 하는 시도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장 루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잘못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실수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수와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는 것, 고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부끄럽다고 고백한 윤동주는 역설적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인물이 된 것이겠지요.
그의 시에는 '참회', '반성'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많이 나옵니다. '실수와 잘못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동주는 부끄러워하라고, 참회하고 반성하라고, 그리하여 달라지라고 답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그의 시는 자신의 잘못,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의 벽 앞에서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그의 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940년대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했는데, 당시 일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히라누마 도주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는데, 그는 자신의 선택을 변명하기보다 통렬하게 부끄러워합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무덤가에 자기 이름을 썼다 지우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윤동주라는 이름을 쓸 수 없는 시대, 그래서 이름을 썼다가 덮어버리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아파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감추지 않고 고백함으로써 시대적 아픔을 알리고 나눈 것입니다. '창씨와
나‘ 같은 글을 통해 창씨개명을 독려한 소설가 이광수 같은 반민족 행위자의 행보와는 전혀 다르죠.
윤동주는 거리로 뛰어나가 폭탄을 던진 인물은 아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를 시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그는 '몸' 대신 '말'과 '글'로 싸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서시>에 그 시대를 산 한 청춘의 고뇌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문학은 잘 모르기에 문학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역사적 의미만 놓고 봐도 분명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의 풍파 속에서 흔들리고 변절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자신은 온갖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길을 가겠다는 다짐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윤동주의 이런 결연한 의지에는 그의 절친 송몽규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이 참 특별합니다. 둘은 1917년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시인이 되었습니다.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먼저 등단했는데, 얼마 후 그는 작가의 길을 벗어 던지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간 것이죠. 오랜 꿈을 뒤로하고 고행을 자처하는 친구의 용기, 그 모습을 본 윤동주는 놀라고 또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결국 둘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던 중 한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과 민족 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됩니다. 두 사람 모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윤동주는 감옥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죠. 곧이어 송몽규마저 숨을 거둡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송몽규는 그해 3월에 사망했는데, 그때 둘의 나이 고작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 시대는 다 그랬다고 주장하며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비판을 멈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윤동주와 송몽규처럼 목숨을 내어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청춘이 있
는데 일제에 빌붙어서 호의호식한, 심지어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가기까지 한 반민족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라니요.
이분들 앞에서 "그땐 다 그랬다"고 말하는 건 결코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당대에 지지를 받은 결정이 후대에는 치욕적인 결정, 실패한 역사로 남기도 하고, 당대에 수많은 비난을 받은 결정이 훌륭한 업적으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역사는 선조들의 선물이자 현재와 미래를 위해 조언해줄 수 있는 큰 흐름입니다. 선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역사 속 장면들을 떠올리면 올바른 선택을 위한 해결책을 얻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선택이 쉽지 않을 때, '지금 당장'보다는 '먼 훗날'을 떠올려보며 이 선택이 시간이 흘러서도 계속 옳은 결정일지, 상황이 지금과 달라지면 잘못된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염치와 부끄러움을 압니다. 이 감정들은 남을 위하는 거창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저 나 좋자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는지 주위를 살피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떨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은 시인 그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다해 부끄러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냈을까요. 저는 문득 두렵습니다.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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