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기

일생일문 7 - 김춘추와 김유신

hope888 2022. 5. 27. 09:40

 

 

 

1. 김춘추와 김유신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폐위된 왕의 손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사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재위 4년 만에 왕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왕위 계승자였던 손자는 하루아침에 권력의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일순간에 권력의 한복판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그는 깊은 좌절에 시달리죠.

또 다른 한 사람은 사정이 더욱 좋지 않습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생전에 벌어진 일이긴 하나, 여하튼 권력뿐 아니라 나라마저 잃은 그는 망국의 후예라는 뿌리 깊은 낙인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각자의 한계 앞에서 절망하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나 그 모자란 힘도 합치면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손잡은 두 사람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 정사를 주도하며 마침내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습니다.

서로 힘을 합쳐 각자의 한계를 뛰어넘은 두 사람은 바로 신라가 삼국 통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김춘추와 김유신입니다. 김춘추는 재위 4년 후 폐위된 신라 진지왕의 손자였고,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자였습니다. 진지왕이 폐위되자 그의 아들 김용훈 대신 조카 김백정이 왕위를 이어 진평왕이 되었고, 자연스레 김춘추는 왕의 자리에서 벌어졌죠. 그리고 김유신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의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은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나, 같은 진골이라도 본래 신라인

인 진골 귀족과 구분되어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가야 출신 진골인 김유신은 태생적 한계가 분명했죠.

이처럼 각자의 한계와 싸워야 했던 두 사람이 힘을 합친 결과, 훗날 김춘추는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태대각간이라는 최고 관직까지 올랐습니다. 태대각간은 신라 17관등 중 1등급인 이별찬의 이칭인 각간에 큰 업적을 치하하려고 '태대'를 붙인 것이죠.

살다 보면 여러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경제적 한계로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능력의 한계로 인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한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응원과 위로의 그 말이 노력이 부족해서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라는 질책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도 분명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늘 제자리일 때,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장애물과 싸워야 할 때……. 이럴 때는 혼자서 모든 것을 이겨내려 하기보다는 뜻이 맞는 사람과 힘을 합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이 질문에 협력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이야기입니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달아준 것을 계기로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인연은 본격화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일찍이 김춘추가 왕이 될 재목임을 알아본 김유신이 자신의 동생과 결혼시키기 위해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서 떼버린 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여하튼 처남과 매제의 관계가 된 두 사람은 이후 서로 협력하며 힘을 키워갑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한계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력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선덕여왕입니다. 선덕여왕은 이 둘의 능력을 높이 샀고, 당시 단단한 골품제의 벽에도 불구하고 신라 조정의 비주류라 할 수 있었던 이들을 과감히 등용합니다. 만약 선덕여왕이 없었다면, 아무리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며 미래를 도모했다 해도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보자면 김춘추와 김유신의 한계 극복은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의 힘이 합해진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들을 등용한 선덕여왕의 선택에 보은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여왕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다양한 정무를 처리했습니다. 642년 백제가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고 신라군이 참패를 당했을 때,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고구려에 군사를 빌리러 간 인물도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김춘추였습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뺏기 위해 압박하는 상황에서 여왕의 명을 수행하고자 제 발로 적진에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김춘추를 만난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신라가 갖고 있던 한강 유역을 내놓아야만 도와준다는 바람에 협상은 결렬됐지만 말입니다.

한편 김유신이 가장 크게 활약한 시기는 비담의 난 때입니다. 선덕여왕 재위 당시 상대등이라는 자리에 있었던 비담은 "여성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나는데, 그 난을 제압하고자 전면에 나선 사람이 바로 김유신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도중 죽음을 맞이하고, 진덕여왕이 그 뒤를 잇습니다. 김유신이 반란군을 진압한 것도 진덕여왕 때의 일로,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일화가 있습니다.

반란군과 진덕여왕의 군이 각각 경주 동쪽 명활성과 월성에 자리하며 열흘간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비담은 "큰 별이 떨어지면 반드시 피를 흘리는 일이 있다. 즉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전투에서 패할 것이라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웁니다. 실제로 김유신의 부대는 하늘의 계시라며 위축되었는데, 김유신은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서 띄워 올리며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가고 있다라며 군사들을 독려합니다. 덕분에 신라군은 다시 기세를 올렸고, 결국 반란군을 진압했죠.

시간이 흘러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신라 조정은 뒤를 이을 인물을 고민하고, 신하들은 당시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던 상대등 알천을 섭정을 행할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러자 알천은 이를 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늙고 이렇다 할만 한 덕행도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로 춘추공만 한 자가 없습니다. 실로 가히 빈곤하고 어려운 세상을 도울 영웅호걸입니다." <삼국사기> 중에서

 

이에 김유신도 찬성하며 김춘추가 왕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김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 왕위에 오르기로 합니다. 이전까지 '성골'만이 쭉 왕위를 계승했던 오랜 관습을 깨고, 김춘추가 진골 출신 첫 번 째 왕인 태종 무열왕이 된 것이죠. 이후 김춘추는 진덕여왕 때 자신이 추진한 나당 연합을 기반으로 백제를 치는데, 이때도 김유신은 그의 든든한 파트너로 싸움에 나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한계 극복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볼 때, 김유신과 김춘추의 협력은 내 앞의 견고한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함께'가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줍니다. 꼭 나혼자의 힘으로 해내야만 빛나고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뜻을 같이할 사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할 사람과 함께할 때 더 큰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김유신과 김춘추를 통해 알게 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듯이, 내 앞에 높디높은 벽이 놓여 막막할 때 '함께'의 가치를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2. 신분과 성별의 차별을 넘어

 

1) 골품제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성골, 진골)와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6~1)가 통합된 신라의 신분제도 정복하거나 통합한 지역의 부족장을 중앙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세력에 따라 등급을 서열화하면서 마련되었다. 골품제는 정치·사회 활동의 범위뿐만 아니라 가옥의 규모와 수레 크기, 장신구 등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매우 폐쇄적인 신분 제도였다.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으며, 진골도 성골처럼 왕족이었으나 왕이 될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소멸되고 태종 무열왕(김춘추)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2) 선덕여왕

신라의 제27대 왕. 진평왕의 큰딸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불만과 대외적인 냉대에 시달렸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문화적으로 나라를 융성케 하고자 노력했다. 실제로 높이 80여 미터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 분황사와 첨성대 등이 이 시기에 건립됐다. 선덕여왕은 또한 당시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해 정치를 이끌었다. 당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자 김춘추를 당으로 보내 동맹을 제안하며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견제했다.

 

3) 비담의 난

647년에 상대등 비담이 염종 등과 함께 "여성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는 명

분으로 일으킨 반란이다. 비담은 출신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진골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사건은 왕위 다툼이기도 하지만 중앙집권이 약하고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신라의 정치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해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는데, 이에 대한 진골 귀족 세력의 불만이 비담의 난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난 도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해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화백회의를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이 위축되고 중앙집권적 전제 왕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최태성 / 일생일문/ 생각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