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기

일생일문 8 – 성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인가?

hope888 2022. 5. 30. 13:13

1. 성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인가?

 

저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는 아무래도 학생이나 취준생이 많은데,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들과 함께 공부하는 일은 제게도 많은 에너지를 줍니다. 하지만 가끔은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 대입에 실패했거나 취업이 늦어지는 친구들은

불안감을 토로하곤 합니다.

 

친구들은 대학가서 벌써부터 자격증 준비하고 토익 시험을 보는데, 저 혼자 뒤처진 것 같아서 불안해요."

 

"저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학점도 잘 받았고, 스펙도 잘 쌓았고요. 그런데 왜 취업이 안 되는 걸까요?”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자가 된 기분이에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참고 기다리면 때가 온다.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같은 말들이 이때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말을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역사의 경험, 즉 가장 확실한 증거를 토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만, 누가 먼저 출발하느냐가 아니라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말이에요. 성공과 직결되는 빠른 길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사실 속도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더디더라도 제대로 가면 늦었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바라는 성공에 이를 수 있거든요. 이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가장 더디게 성장했지만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신라입니다.

 

신라는 진한의 사로국에서 출발합니다.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까닭에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요.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가 막고 있어 선진 문물의 수용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고 요서, 규슈 지역과 교류를 확대하며 전성기를 누릴 즈음에야 신라는 김씨 왕위 세습이 시작되며 겨우 중앙집권 체제를 갖출 수 있었죠. 하지만 가장 먼저 성장한 백제의 전성기도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고구려에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라는 걸출한 왕이 등장하는 바람에 백제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고구려에 내어줄 수밖에 없었죠.

고구려는 백제를 무섭게 압박했습니다. 특히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펼치면서 백제의 위기는 절정에 달합니다.

이때 백제의 선택은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삼국 중 고구려를 제외한 두 나라가 힘을 합쳐 고구려에 맞서려고 한 것이죠. 백제와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나제 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물밀듯이 내려오던 고구려는 급기야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백제는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왕의 전사, 수도 함락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닥치자 백제는 나제 동맹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에 백제의 동성왕은 신라 왕실과 결혼하며 동맹을 더욱 공고하게 만듭니다.

시간이 흘러 성왕이 다스리게 된 백제는 다시 차곡차곡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합니다. 좁은 웅진을 벗어나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는 등 변화를 꾀합니다. 왜 뜬금없이 남부여였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백제의 출발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부여에

서 내려온 고주몽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고, 고주몽의 아들들이 세운 나라가 백제거든요. 성왕은 백제의 출발 자체를 부여로 잡으면서,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가 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못 박은 것입니다.

백제가 이렇게 국력을 다지며 한강 탈환의 꿈을 꾸던 중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시대가 끝난 고구려가 내부의 권력 투쟁과 북방 돌궐의 침입 등으로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때까지 무려 100년 넘게 백제와 신라의 나제 동맹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성왕은 이 동맹을 이용해 고구려를 공격하고 마침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습니다. 백제는 자신들이 출발한 곳이자 500년 가까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을 되찾았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믿었던 신라의 진흥왕에게 뒤통수를 맞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다시 빼앗깁니다. 사실 신라도 백제만큼 한강을 차지하고 싶어 했어요. 한강 유역은 비옥한 평야로 이루어져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했을 뿐 아니라, 황해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삼국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항쟁했던 겁니다. 실제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는 전성기를 누리며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요.

그러니까 신라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손잡을 때부터 은밀히 한강을 차지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겁니다. 빨리 한강 유역을 차지해 전성기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성왕과 같았겠지만, 속도에 치중하다 일을 그르칠 수 있기에, 중요한 것은 빨리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임을 알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지요.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성왕은 정말 화가 많이 났을 거예요. 오랜 준비 끝에 꿈을 이루었는데, 1~2년도 아니고 100년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힘을 모아온 신라로부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으니까요. 그런데 배신당한 성왕은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자신의 딸을 배신자인 진흥왕에게 시집보낸 겁니다. 사실 이건 성왕의 정치적 한수였습니다. 겉으로는 신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듯 시간을 끌면서 신라와의 전면전을 준비한 것이죠.

마침내 만반의 준비를 마친 백제는 가야와 왜의 지원을 받아 관산성을 공격했고, 전투 초반에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백제군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성왕이 전투를 이끄는 자신의 아들을 격려하고자 관산성으로 향했는데, 이 과정에서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발각되어 전사하고 만 겁니다. 왕의 죽음이 알려지자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결국 전투에 패하고 말죠. 이 일로 백제는 다시 한 번 치명상을 입었고, 전성기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진흥왕은 정말 배신자일까요? 국가 대 국가의 동맹은 그 시기. 그 시대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삼국이 서로 항쟁하던 시기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겨루는 경쟁자들이었을 뿐입니다. 백제 입장에서는 진흥왕이 의리 없는 사람이지만, 신라에는 국익을 챙긴 위대한 왕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신라는 진흥왕 전에 지증왕, 법흥왕을 거치며 개혁을 통해 차근차근 국력을 쌓아왔는데 백제가 그런 신라를 너무 얕잡아본 것은 아닐까요?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결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신라를 변방의 후진국, 그저 자신들의 숙원을 이루도록 도와

줄 세력 정도로만 여긴 것 같습니다. 진흥왕의 배신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오판으로 인해 백제가 중흥의 꿈을 날려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젊은 왕인 진흥왕의 과감하고 발 빠른 선택은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가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진흥왕은 정복 군주로서 영토를 확장해나가며 백제를 도운 대가야까지 정복합니다. 그리고 화랑도를 국가적 제도로 정비해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죠, 훗날 백제의 계백과 황산벌 전투를 벌일 때 화랑들이 몸을 던져서 전세를 뒤집거든요. 이렇게 화랑도는 삼국 통일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곧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냅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린 뒤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죠. 신라는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당시 시대적 변화에 발을 맞추어 나가며 차근차근 국력을 쌓았고, 이렇게 쌓인 내공을 바탕으로 삼국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이지요.

이렇듯 누가 먼저 출발했느냐가 아니라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 그리하여 결국 목표한 종착지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늘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늦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변화해 나간다면 언젠가 전성기는 찾아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늦었다고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조선 시대 문인 김득신의 묘비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역사 속으로 한 걸음 더

"역사에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지금의 성공에 자만할 필요도, 오늘의 실패에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무척 길고 복잡하니까요. 사람마다 전성기가 다를 뿐 언젠가는 나만의 전성기가 열릴 거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분명 바라던 그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2. 나제동맹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항해 신라의 눌지왕과 백제의 비유왕이 체결한 군사 동맹. 이 동맹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남진 정책을 이어나갔고,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기에 이른다. 이후 신라의 소지왕과 백제의 동성왕이 혼인 관계를 맺어 두 나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해나갔으며, 551년에는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120여 년 동안 지속된 나제 동맹이 깨지고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게 되었다.

 

3. 진흥왕 534~576

 

신라 제24대 왕.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령의 대가야를 병합하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 단양 신라 적성비와 네 개의 순수비다. 뿐만 아니라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재편해 인재를 양성했고, 거칠부에게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4. 성왕?~554

 

백제 제26대 왕. 무령왕의 아들로 백제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교통이 편리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부여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재편해 내부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 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체제 정비 이후 신라 진흥왕과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았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겼다. 이후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최태성 / 일생일문/ 생각정원). .